지역의 역사, 문화, 사람이 연결되는 농촌 체험 민박 프로그램
지난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2박 3일 간 전남 강진의 '공무원 푸소(FU-SO) 청렴교육'에 다녀왔다.
푸소(FU-SO)는 Feeling Up, Stress Off의 줄임말로, 강진의 농가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훈훈한 시골의 정과 감성을 경험하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농촌 체험 민박 프로그램이다.
"스트레스 푸소" 할 때 '풀다'의 의미도 갖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공무원 푸소 청렴교육' 은 강진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잘 살린, 지역민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특색이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 18년 간 유배 생활을 하며 600여 권의 저서를 저술한 곳이다.
다산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다산초당, 다산박물관, 백련사를 걷고 머물며 선생님의 삶과 청렴, 애민, 실용정신을 고스란히 느끼고 배울 수 있다.
주변에는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적도 많아 지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또한 넉넉한 인심과 맛을 자랑하는 남도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역사와 인물, 자연과 음식, 지자체와 지역민이 조화롭게 융합된, '엄지 척' 세우며 추천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다.
한옥과 농가에서 묵고, 정성 가득한 남도의 아침상 받는 행복
푸소 프로그램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차별화된 특이점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농가 민박과 안 주인이 제공하는 아침밥'이라 하겠다.
▲ 달빛한옥마을
월출산 아래 자리잡은 한옥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한옥 안주인님이 정갈하고 맛깔스런 한식을 정성스럽게 차려주었다.
ⓒ 이정미
"서울서 내려왔어요. 남편 은퇴하고. 어느 박람회 갔다가, 여기 월출산 아래, 한옥 마을을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벌써 12년이 되었네요."
일흔을 훌쩍 넘긴 고우신 한옥 안 주인님은 공무원이셨던 남편이 은퇴한 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강진에 터를 잡으셨다.
"많이 건강해졌어요. 서울에 있을 땐 환절기 때면 늘 감기를 앓았어요. 비염도 심했고. 여기 와서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요. 매번 월출산을 오르니까. 엊그제 보건소에 독감 주사 맞으러 갔더니 나더러 새댁이래요. 고혈압, 당뇨 약 먹는 거 있냐고 묻길래 없다고 했더니 정말 건강하시다고... 허리 꼬부랑 할머니들이 많으니까 여기선 내가 젊은 축에 들어가요."
여사님은 산에서 주웠다며, 갓 삶은 따끈한 알밤과 차로 방문객인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시원한 연포탕과 새콤달콤 바지락 초절임이 일품인 남도의 저녁상을 배부르게 먹었건만, 달콤한 알밤에 자꾸만 손이 갔다.
손수 만드셨다는 우엉차를 나누며 나무의 결과 향이 스며든 고즈넉한 대청마루 거실에서 평화로운 담소를 나누었다.
달빛 한옥마을의 밤이 조용히 깊어갔다.
따끈한 온돌 바닥에 뽀송뽀송한 광목 이불을 깔고 덮고 푹 잤더니 아침에 피곤이 싹 풀려 온 몸이 개운했다.
"어머나, 아름다운 밥상이에요!"
시원하게 끓여낸 배추 된장국, 죽순 들깨 무침, 애호박 전, 굴비, 도라지 무침, 우엉 조림 등 정갈하게 차려낸 아침을 정말이지 행복하게 먹었다.
푸소 농가를 운영하는 어르신들은 강진군의 권유에 따라 지역 농가에서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이용하여 밥상을 차리는 것 같았다(여사님은 손수 텃밭 농사도 하신다). 우리가 묵은 농가 두 곳 모두 제철 채소와 굴비, 국과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이 정성스럽게 차려졌다.
아침밥을 차려낸다는 것. 그리고 아침밥을 받는다는 것. 내 영혼에 깃든 엄마를 느끼는 일이다.
한국적 정취를 가득 담은 백운동 원림
아침을 먹고 백운동 원림으로 이동하였다.
백운동 원림은 담양 소쇄원, 완도 부용동 정원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이다.
문화재 해설사님의 안내에 따라 백운동 전시관을 둘러 보았다(백운동 원림은 처사 이담로가 1660년대 조성하였다.
2019년 국가지정 자연유산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자연 원림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백운동 원림
백운동 원림 전시관을 둘러보고 호남 3대 정원이라 불리는 백운동 원림과 그 주변을 걸었다.
ⓒ 이정미
백운동 원림 주변에는 동백나무, 대나무, 단풍나무 등이 세월의 깊이만큼 무성하다.
계곡을 끼고 숲길을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평화로워진다.
원림은 소박하고 간결하다.
작은 연못, 초가, 소박한 화단이 아기자기하게 조성되어 있다.
화려하지 않아 정겹고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긴다.
원림을 돌아 걸어 나오면 푸른 녹차 밭이 펼쳐진다.
파란 하늘과 짙은 초록의 녹차 밭은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호젓한 정원을 뒤로 하고 하멜 양조장으로 향했다.
하멜촌 맥주로 유명한 곳이다.
맥주 양조장은 처음이다.
양조장에서 직접 만든 맥주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고 기대되었다(가까운 곳에 하멜 전시관, 병영성을 둘러보는 것도 추천한다).
사장님은 맥주를 맛보기 전에 자신과 양조장에 대해 프레젠테이션하며 자세히 소개했다.
전문가다운 면모가 느껴졌다.
서울 성수동에서 수제양조장을 운영했단다.
강진의 맑은 공기, 강진산 쌀귀리, 이곳 병영면에 체류했던 하멜의 고향 네덜란드 맥아를 이용해 맥주를 생산하다는 설명이었다.
방치되었던 폐양곡창고는 맥주와 전통주를 생산하는 양조장으로 변신했다.
하멜촌 맥주는 지역민 뿐만아니라 방문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귀촌해 지역 살리기 활동에 적극 동참하며 흡족해 하고, 자신의 꿈도 성공적으로 실현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정말 멋있고 보기 좋았다.
▲ 하멜촌맥주
하멜촌IPA맥주는 맥주 맛을 잘 모르는 나에게도 정말 맛있었다.
ⓒ 이정미
젊은 사장님은 맥주의 종류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시는 맥주는 라거로, "목넘김이 깔끔하고 곡물의 풍미가 은은하며 누구나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맥주"다.
반면에 하멜촌 IPA는 에일로 "톡 쏘는 홉향과 쌀귀리의 부드러움이 더해진, 진한 열대 과일향이 스며든 쌉싸름한 맛"이란다.
개인적으로 술과 친하지 않아 술맛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하다.
하지만 유럽 여행에서 맛본 흑맥주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있다.
그런 나이기에, 하멜촌 IPA의 진한 풍미와 맛은 내 취향을 저격했다.
결국 우리는 하멜촌 라거 1병, 하멜촌 IPA 2병이 든 선물용 맥주 한 팩 씩 샀다.
다산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40대에 다산 선생님을 흠모하며 푹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
백련사라는 사찰 이름도 그 무렵 알게 되었다.
나에게 백련사는 다산 선생님이 초의 선사와 교우하기 위해 고갯길을 넘었던 곳이고, 차를 사이에 두고 유배 생활의 고뇌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마음을 굳건히 하였던 곳이다.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다도를 배우고 차향을 음미하며 차분하게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잔잔한 가운데 온전한 쉼의 시간이 되었다.
▲ 백련사
스님과 향긋하고 은은한 차를 나누었다.
저 멀리 다산 선생님이 정약전 형님을 그리워하며 바라보았을 강진 바다가 펼쳐진다.
ⓒ 이정미
차에는 10가지 덕이 있다.
막인 기운을 풀어준다.
생기가 돌게 한다.
잠을 깨운다.
심신의 병을 예방한다.
나와 상대를 공경하게 한다.
관계를 원만하게 한다.
몸을 편안하게 한다.
마음을 맑고 아름답게 한다.
맛을 살피고 음미할 줄 알게 한다.
도리에 맞게 따르게 한다.
스님은 차는 수양이라 하셨다.
"차는 홀로 마시는 것이 제일입니다.
둘이 마시면 도담(道談)이 됩니다.
셋이 둘러 앉으면 차담(茶談)이 됩니다.
넷이 마시면 그냥 물을 마시는 것과 다름 없어요. 조용히 호흡에 집중하여 고요해지고 맑아지는, 홀로 마시는 차가 으뜸입니다.
"
다산 선생님이 초의 선사를 만나 우정을 나누고 저 멀리 강진 바다 너머 흑산도에 계실 형님을 그리워했다는 그곳에 서 보았다.
만날 수 없는 깊은 그리움을 저 먼 바다는 헤아릴까.
다산 선생님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다산초당에 이르렀다.
초당은 변함없이 초연했다.
이곳을 찾은 것이 13년 전이니 아마도 숲이 더 무성해졌을 테다.
초당 마루에 걸터앉아 눈을 감아 보았다.
부디 다산 선생님의 애민, 실용 정신, 학문 정신이 오래도록 기억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기를 기원했다.
▲ 다산초당
다산 선생님의 애민, 실용, 학문 정신이 오래 오래 기억되고 더 많은 사람들 마음에 닿기를 기원했다.
ⓒ 이정미
초당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선생님의 성씨 정(丁)과 돌 석자가 세월의 풍파에도 아랑곳없이 깔끔하고 의연하다.
군더더기 없다.
다산 선생님의 올곧고 흔들림 없는 정신 세계를 꼭 닮은 듯하다.
지역민도 웃고 지자체도 뿌듯한 프로그램
연수 마지막 날, 연수원 현관에는 지역 농가들이 참여한 '로컬 푸드 깜짝 장터'가 열렸다.
나는 싱싱한 파프리카, 작두콩차, 김부각을 봉지 봉지 샀다.
연수 참가자들은 품질 좋은 로컬 푸드를 사서 좋고 지역 농가는 소득이 생기니 이 얼마나 좋은가!
'푸소 프로그램'은 학생, 일반인,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적 프로그램이다.
남도 강진이 가진 역사적·문화적 자원을 활용하고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농가와 참가자를 연결하고 지원한다.
지역 농가 소득이 향상되니 지역민도 웃고 지자체도 뿌듯하다.
지역 소멸이 과제가 된 시대에 지역의 강점을 홍보하고 젊은 인력을 유치하여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지역은 한국의 고유한 정취가 살아있는 곳이다.
강진군의 이러한 노력들이 더 많이 홍보되어 지역마다 제 빛깔로 활기를 띄는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너무 낭만적일까.
전남 강진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