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서울시장은 슬픈 예감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오 시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국민의힘 의원에게 오 시장이 왜 대선에 나서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의원은 몇몇 이유를 말했지만, 결정타는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 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명태균 게이트에 엮여 이름이 오르내리는 오 시장의 입장에선 한 총리 아니어도 변수가 많은데, 당 지도부가 한 총리를 이미 그때부터 밀고 있었다는 걸 알고 불출마를 선언한 게 팩트"라고 말했습니다.
이 의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민의힘 단일화 협상이 지지부진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당 지도부가 애초에 당 밖의 인물을 염두에 두고 경선을 치렀다면 후보 입장에선 기가 막힌 일이기 때문이죠.
경선에 탈락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단일화가 지지부진한 것을 놓고 "이럴 줄 몰랐냐"고 묻는 것도,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설마 대선 패배가 불보듯 뻔한 그런 짓을 자행하겠느냐는 의구심이 들었다"고 말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가 됩니다.
물론 김문수 후보도 경선 내내 한덕수 무소속 예비후보와의 단일화를 내세워 1위를 차지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의 후보가 된 날부터 단일화를 하라고 압박하는 지도부의 행태가 못내 거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 대선에서 성공한 단일화의 과정을 보면 언제나 통 큰 결단이 있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공동정부를 구성해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을, 김종필 후보가 국무총리를 맡기로 했던 단일화가 대표적입니다.
2002년 대선에서도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는 여론조사 문항 방식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결국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의 방식을 수용하면서 극적으로 단일화를 이뤄냈습니다.
두 단일화를 몇 문장으로 다 설명하는 게 한계가 있긴 합니다만, 당시 단일화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물밑에선 수많은 협상과 줄다리기가 계속됐고, 그 과정에서 결렬 일보 직전까지 가는 일을 수차례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단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후보의 최종결단을 이끌어낸 참모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언제나 다양한 유형의 참모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대의를 위해 한발 물러설 이유를 늘어놓는 참모부터, 어떤 방식이 후보에게 가장 유리한지 고민하는 참모 등이 후보에게 조언을 했다는 것이죠. 이런 참모들의 직언을 새겨듣고, 통 큰 결단을 한 후보들은 대세론을 뒤엎는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의 대선판에서 통 큰 결단은 열세인 국민의힘이 아닌 대세론의 주인공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대한 법원 판결과 여당 단일화 이슈에 묻혔지만 지난 4월 27일 이 후보는 당의 후보로 선출되자마자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습니다.
이런 행보는 과거 같으면 당내에서 엄청난 공격의 대상이 됐을 겁니다.
2017년 문재인 민주당 후보도 박정희 묘역에는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민주당에서 지금 이재명 후보의 행보에 딴지를 거는 당내 세력도 언론도 보이지 않습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순 없지만 정권을 되찾아오겠다는 그와 야당의 결기 앞에 국민의힘 단일화 갈등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흔히 하는 말로 '졌잘싸'를 기대해 봅니다.
독자님들, 행복하세요.
[마감을 하며] 통 큰 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