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31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서울 종로 축구회관에서 승부조작범 사면 철회 입장을 발표한 후 자리를 옮기고 있다.
photo 뉴시스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에 가담해 영구제명된 선수들이 제도의 공백을 이용해 계속해서 축구 현장으로 복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선수 혹은 감독으로 복귀가 어렵자 유소년 클럽을 직접 창단하거나 '대리 지도자'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축구계에서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대한축구협회의 징계 당시 절차를 문제삼으며 소송을 제기해 자격정지 무효 처분을 이끌어냈고, 축구협회는 패소한 뒤 항소를 포기해 사실상 길을 터줬다.
이런 사실이 주간조선의 보도를 통해 밝혀지자 복귀가 무산되는 듯했지만, 취재 결과 이들은 여전히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내 축구계로 복귀하고 있다.
2011년 당시 프로축구 K리그는 불법 베팅 사이트와 연관된 승부조작 사건으로 홍역을 앓았다.
당시 고의적으로 패배하거나 브로커를 자처한 현역 선수들만 59명이 기소됐고, 프로축구연맹과 대한축구협회를 통해 48명이 최종 영구제명됐다.
선수도 지도자도 안 되지만… K리그 지방 시민구단 공격수 출신 A씨는 2011년 프로축구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 가담해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된 인물이다.
당시 브로커에게 억대 금품 수령을 약속받고 승부조작을 한 사실이 검찰 조사 결과 드러나 불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그는 지금 출신 학교 이름을 딴 유소년 팀을 창단해 단장으로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가 동호인, 유소년, 프로를 통틀어 팀 정보를 관리하는 '통합경기정보 시스템(JOIN KFA)'에 따르면, A씨는 서울에 소재한 중학생 대상 유소년 클럽의 팀 대표(단장)로 등록돼 있다.
영구제명된 인물들은 선수와 지도자 등록이 금지돼 있지만 임원 등록은 그렇지 않아 가능한 일이다.
익명의 축구계 관계자는 "임원 신분이지만 사실상 감독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이런 식의 운영 형태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영구제명된 B씨는 지방 구단 출신으로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이력까지 있었다.
당시 직접 선수를 섭외하고 승부조작 대금을 나누는 등 주도적 역할을 맡아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 3월까지 경기도 시흥의 15세 이하 클럽에 '임원' 신분으로 등록한 뒤 실제로는 선수들을 지도했다.
최근에는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유소년 클럽으로 적을 옮겼다.
여기서도 임원 신분이다.
익명의 지역 축구 관계자는 "B씨가 아예 경기 때 벤치에 앉아 코치 역할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C씨는 당시 승부조작 사건의 대표적 인물로 축구팬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는데, 그도 경남 군단위 지방자치단체의 한 18세 이하 유소년 팀에서 실질적 코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는 연령별 대표팀은 물론 성인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돼 아시안컵 본선에서 득점했고, K리그에서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던 고액연봉자였다.
그는 사건이 불거질 당시 연루 의혹을 부인하다, 승부조작 사전모의에는 관여했으나 돈을 받지 않았다며 자진 신고했다.
그러나 검찰 조사 결과 승부조작 가담 대가로 금품을 받고 동료 선수를 끌어들이는 브로커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었다.
선수들만 이러는 것도 아니다.
심판 D씨는 2013년 경기에서 유리한 판정을 해달라며 K리그 시민구단 관계자로부터 수천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유죄가 확정됐다.
그 역시 경남의 군단위 지자체의 유소년 팀에서 타인 명의로 팀을 창단하고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축구계 관계자는 "최근 지역의 소도시에서 유소년 클럽을 창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틈바구니에서 축구계와의 연을 이어가려는 축구계 인물들이 많다"고 했다.
이런 소도시의 클럽엔 지역 체육회를 통해 지자체의 보조금이 투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 photo 뉴시스 '제명 취소' 선수들, 공식적 활동경로는 막혀 동호인 선수로 뛰려다 무산된 경우도 있다.
이른바 '조기축구'로 알려진 동호인 팀과 선수도 축구협회에 등록을 해야 하는데, 원래 영구제명 처분을 받으면 자격정지 상태가 되어 선수 등록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최근 2011년 축구협회의 징계 의결 당시 절차적 문제가 있었다는 이유로 일부 선수들이 자격정지 무효소송을 제기했고, 축구협회는 연이은 소송에서 패소를 거듭했다.
올해 초에는 영구제명 선수 4명이 1심에서 승소한 뒤 축구협회가 항소를 포기해 자격정지가 해제됐고, 이 가운데 2명이 경기 지역 축구협회 산하기관의 선수로 등록을 완료했다는 사실이 주간조선의 보도로 밝혀진 바 있다.
이들은 영구제명 사건 당시 형사소송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었다.
주간조선의 취재에 따르면,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진 직후 축구협회는 이 두 선수의 등록을 금지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국민체육진흥법상 승부조작으로 형사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에는 선수와 지도자 등록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다"며 "본래라면 어차피 등록이 되지 않았어야 하는데, 영구제명 조치가 해제되면서 시스템상 등록이 가능하도록 잠깐 풀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들을 바로 다시 등록금지 조치했다고 축구협회로부터 전달을 받았다"면서도 "징계 처분을 받은 선수가 임원 등록이 가능한 현 규정은 추후에 보완하겠다고도 했다"고 전했다.
대한축구협회도 영구제명 선수가 '임원' 등록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협회 관계자는 주간조선에 "최근 법률이나 규정 검토 업무를 하는 '컴플라이언스실'이 생겼다"면서 "향후 개정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체육회에 질의를 거친 후 규정 개정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승부조작 가담자들이 팀을 창단하고 암암리에 선수를 지도하는 등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는 실정이다.
혐의가 없는 '합법' 축구인들에게는 '이름을 빌려달라'는 식의 제안을 하는 경우도 있다.
비수도권의 한 축구계 관계자는 "지역에 유소년 팀을 창단하려고 하는데, 자기는 지도자로 등록할 수 없으니 창단을 도와달라는 제의도 받았다"며 "마치 건축기사나 토목기사 자격증을 돈 주고 빌려 건축사무소를 차리듯이 축구지도자 자격증을 보내달라는 식으로 말하더라"고 했다.
그는 "축구판이 좁기 때문에 부탁을 하면 무언가 들어주지 않기가 어렵다"며 "등록된 곳이 아니라 민간 축구교실 등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경우는 훨씬 더 많을 텐데, 이들 가운데는 아이들에 대한 체벌까지 일삼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대한축구협회가 적극적인 대처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3년 축구협회는 승부조작 제명 선수 47명에 대한 사면을 발표했다 여론의 비난을 받고 철회한 바 있다.
최근 자격정지 무효소송에서도 패소 이후 항소를 진행하지 않고, 당시 징계절차를 보완하기 위한 추가적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축구전문가는 "지금 승부조작이 일어난다면 2011년보다 수법이 훨씬 다양하고 치밀할 수 있는데, 이럴 때일수록 축구협회가 승부조작에 단호히 대처한다는 '시그널'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