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서 대규모 트레일러닝 대회 만든 김영록, 박하영 부부
장수트레일레이스를 만든 박하영(왼쪽), 김영록 부부. 두 사람은 호주 유학생 시절 만났다.
김영록씨가 반해 좇아다녔고, 결국 박하영씨를 따라 장수에 정착해 트레일러닝 대회를 만들었다.
사진 조준
'장수는 어디에 붙어 있을까?'
장수트레일레이스를 만든 김영록 대표에게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그중 그가 장수를 선택한 이유가 특히 의문이었다(김영록은 대회를 이처럼 크게 만들기 전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 장수가 가까웠나? 장수에서 보물을 발견했을까? 대회가 끝나고 장수에 다시 내려가야 했다.
그를 또 만나 좀 더 여유롭게 인터뷰하기로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자가용을 이용하면 서울과 장수를 오가는 체감 거리가 줄어 그를 이해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계산했다.
서울에서 장수읍까지 교통편이 얼마 없었다.
기차로는 바로 갈 수 없고, 고속버스가 그나마 유용했는데, 그마저도 직행이 하루 4회 운행했다.
나는 동서울터미널에서 완행으로 버스를 두 번 갈아탄 끝에 장수공용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집에서 출발한 지 5시간 반 만이었다.
대전 터미널에서 매표소 직원에게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장수까지 가는 버스가 왜 얼마 없죠?"
매표소 직원은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 짜증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야 거기까지 가는 손님이 얼마 없으니까 그렇죠."
이전까지 나는 장수가 그래도 꽤 큰 지역인 줄 알았다.
흔히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의 줄임말)'으로 엮인 채 소식을 들었으니까. 어쨌든 장수읍은 작았다.
장수군 전체 인구는 2만여 명이다.
서울과 비교하면 아주 한적한 동네다.
그렇다면 김영록씨는 왜 하필 멀고 먼 장수까지 내려와 대회를 열었을까?
별 볼일 없었던 남편
장수트레일레이스 스태프가 머물고 있는 사무실은 장수읍 안에 있다.
터미널에서 걸어서 10분쯤 걸린다.
작은 단독주택이다.
사무실에 도착해 바깥에서 마당을 들여다보니 대회 때 쓰던 장비들이 널려 있었다.
바구니 수십 개, 각종 방수 장비들, 등산용품들, 용도를 알 수 없는 막대기 등등으로 어지러웠다.
이때 집에서 김영록씨가 바깥으로 나왔다.
양복 차림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말했다.
"기자님, 먼 길 오셨네요. 저, 어떡하죠? 마을 이장님이 좀 보자고 해서요. 얼른 갔다 올게요. 제가 올 때까지 제 아내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될 거예요."
나는 알겠다고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 박하영씨가 나왔다.
그녀는 김영록씨의 아내이자 장수트레일레이스 운영 디렉터이다.
그러니까 대회는 김영록씨와 그의 아내가 처음 만들었다.
제1회 장수트레일레이스는 2022년에 열렸다.
김영록씨가 장수에서 살기로 결정하고 내려온 시기는 그로부터 2년 전이다.
박하영씨는 식탁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냈다.
"남편은 호주에서 만났어요. 유학 갔다가요. 그때 영록씨는 호주에서 학교 다니려고 했어요. 어느 정도 준비를 마친 상태였죠.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장수 사람인 건 몰랐을 거예요. 장수가 어딘지도 몰랐을 테고요. 그때 저는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집에 불이 났거든요(가족들은 무사했다). 가족 걱정이 됐고, 불탄 집 수습도 해야 했고요. 그러니까 영록씨가 별 고민 없이 자기도 돌아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한국에 돌아가도 당신을 계속 만날지 말지 모른다'고요. 그래도 가겠다고 하대요. 말릴 수 있나요? 그러자고 했죠."
김영록씨는 당시 박하영씨에게 한눈에 반했다.
그녀가 어디에 살고, 뭘 하면서 살았는지는 아무 상관 없었다.
박하영씨도 비슷했던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둘은 서울 한성대입구 근처의 허름한 빌라에 방을 얻어서 같이 살았다.
박하영씨는 집이 꼬질꼬질해도 괜찮았다.
빌라 옥상에 텐트를 치고 살아도 만족했을 것이었다.
당시 그녀는 20대 초반 대학생이었고, 자본주의 시스템을 경멸했다.
그래서 트레일러닝을 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닌 김영록씨의 삶을 한편으로 동경했다.
박하영씨 부모님의 마음은 그녀와 정반대였는데, 어느 날 딸이 사는 집에 방문한 뒤 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간 적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얼마쯤 지났다.
박하영씨는 남편 김영록씨가 별 볼일 없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당시 남편 나이가 20대 후반이었어요. 20대 때 진창 놀았던 사람이죠. 전 세계를 누비면서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했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오니 별 거 없는 거예요. 그때 제 친구들은 학교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거나 이미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도 했어요. 주위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저도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20대를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라고요. 영록씨도 별 계획이 없었어요. '앞으로 뭐 할 거야?' 물어봐도 정답 같은 대답을 한 적이 없었어요."
박하영씨 집에 불이 난 건 두 사람 운명이 보낸 어떤 신호였을까? 한국에 돌아온 뒤 그녀는 서울과 장수에 한 달에 여러 차례 왔다갔다 했다.
당연히 김영록씨도 따라 나섰다.
김영록씨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박하영씨 집 복구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당연히 부모님이 당황하셨죠. 불난 집에 처음 본 남자를 데리고 왔으니. 잘은 모르겠는데, 탐탁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도 영록씨는 트레일러너잖아요. 될 때까지 도전하고 잘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랄까? 무척 성실했어요. 농번기 때는 농사 일 도와주고, 집 지을 때는 같이 짐을 나르거나 공사에 직접 참여도 했어요."
그리하여 2020년 두 사람은 아예 장수로 내려왔다.
둘의 성향은 비슷했다.
자연을 좋아하고 농사 짓는 것도 적성에 맞았다.
마침 둘 다 서울에서 한량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할 일이 있었던 장수로 내려가는 것이 두 사람에겐 타당한 일이었다.
장수에 내려왔지만 마냥 부모님 일만 도우면서 살 수는 없었다.
김영록씨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닥치는 대로 장수읍 여기저기 들락거렸다.
컴퓨터 강사로도 활동하면서 장수 외에 무주나 진안까지 가서 강의를 했다.
'무진장' 헤매고 다녔다.
물론 김영록씨는 일을 하면서 틈틈이 달리기를 했다.
'장수러닝크루'를 만들어 주민들을 회원으로 만들었고, 또 근처 산에서도 뛰어다녔다.
그걸 볼 때마다 박하영씨는 "미쳤다"면서 혀를 끌끌 찼다.
"남편은 늘 트레일러닝 대회를 열고 싶다고 했어요. 자신은 트레일러닝을 너무 사랑하고, 또 계속 도전하는 삶을 살겠다고 했어요. 저는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서포트만 해주겠다고 했죠. 어느 날 본인이 코스를 만들었다면서 보여 줬어요. 그게 장수트레일레이스 첫 대회 코스가 됐어요. 38km 'J' 코스였죠."
2022년 열린 제1회 장수트레일레이스에는 18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장수군에서 동아리 지원금과 청년공동체 활성화 지원사업비 800만 원을 받았고 그중 600만 원을 대회 운영에 모두 썼다.
나머지 비용은 실제로 동아리(장수러닝크루) 활동에 보탰다.
그러니까 대회를 열어도 수익이 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매년 대회를 치르고 있다.
4회차 때부터 조금씩 수익이 났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컴퓨터 강사 일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
첫날 버티컬 레이스가 열린 논개 활공장에서 김영록 대표. 대회가 열린 2박 3일 동안 그는 매우 분주했다.
밤 늦게 골인하는 선수들을 맞이하느라 잠도 못잤다고 했다.
'긍정록' 우울증 걸리다
마침 김영록씨가 이장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일 때문이었느냐고 묻자 김영록씨는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혼나고 왔어요. 대회 때 마을회관을 잠깐 이용했는데, 보일러를 틀어 놓고 문을 안 닫고 나왔대요. 보일러가 밤새 돌았대요. 그것 때문에 주의를 받았어요. 신경썼어야 했는데, 놓쳤네요. 죄송하다고 했어요."
그가 왔으니 재차 확인해야 했다.
그가 장수에 살게 된 이유, 박하영씨를 만났을 때부터 장수에서 트레일러닝 대회를 열겠다는 계획이 있었는지에 관해.
"호주 유학 시절, 박하영씨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왜 따라서 귀국했죠?"
김영록씨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첫눈에 반했어요. 결혼할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아내를 처음 보고 집으로 온 날 친구들에게 전화했어요. '나 결혼할 사람 만났어!'라고 온갖 데 말하고 다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해요. 특이한 경험이었어요."
그러니까 김영록씨는 박하영씨를 만나기 전 장수가 어디에 있고, 여기 무슨 산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장수트레일레이스가 만들어진 계기는 순전히 박하영씨에게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
계기는 그렇지만 김영록씨는 장수에 뿌리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동네 자율방범대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박하영씨 집에 얹혀 살면서 매일 집 짓고, 농사 짓고, 청소하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장수 생활 초반은 삶을 억지로 이어갔다.
"호주에서의 생활과 장수에서의 삶은 완전히 달랐어요. 원하던 삶이 아니었죠. 책임감이 무겁게 짓눌렀어요. 회사도 답답했고, 퇴근하고 집에 가도 답답했어요.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요. 결국 우울증에 걸렸어요. 아내와 처가댁 식구들을 뒤로하고 혼자 여러 차례 산에서 쏘다니기도 했어요."
김영록씨가 우울증에 시달렸던 즈음 박하영씨의 아버지가 큰 사고를 당했다.
막사 지붕에서 일을 하다가 굴러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하영씨의 아버지는 얼마 후 회복했고, 가족들은 안정을 찾았다.
김영록씨도 이때쯤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선 제1회 장수트레일레이스를 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지금처럼 대회가 커지리라고 예상은 했어요. 해외에서 이런 대회를 많이 봤거든요. 다들 조그맣게 시작했다가 점점 커졌어요. 장수트레일레이스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이처럼 시간이 단축될 줄 몰랐죠."
2회 대회 때는 700여 명의 선수가 장수를 찾았다.
3회 때는 1,200여 명이 몰렸고, 4회 때는 1,500명이 참가, 올해 5회 때는 2,500여 명이 참가 신청을 했다.
참가자가 해마다 500명 이상 늘었다.
장수트레일레이스는 마니아 대다수로부터 호평을 얻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지역민들의 대회 참여다.
많은 수의 마을 주민이 주로에 나와 종을 치면서 선수들을 응원하는 대목에서 큰 감동을 얻었다고 언급한다.
대회 분위기가 이처럼 친근하면서 흥겨운 이유를 두고 김영록씨의 타고난 성격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긍정적이면서 아주 열정적인 한편 무진장 성실하다.
장수읍의 한 식당 주인은 김영록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침마다 가게 앞을 뛰어다녀요. 하루도 거른 적이 없어요. 장수트레일레이스 덕을 봤냐고요? 당연하죠. 대회 때가 되면 전화가 많이 와요. 언젠가 저 사람 장수군수가 될 거예요."
그저 재미있어서 치른 첫 대회 이후 두 사람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5년 전 장수에 처음 내려왔을 때와 지금은 180도 다른 부류가 됐다.
우선 사명감이 생겼다.
"우울증은 어느새 사라졌어요. 지금은 우울할 틈이 없어요. 세계 여행을 가겠다는 꿈도 없어졌어요. 이제 아기 낳아서 키워야죠. 장수트레일레이스는 앞으로 5년, 10년만 보고 하는 게 아니에요. 100년 혹은 200년 뒤에도 열리는 대회로 키울 거예요. 장수는 너무 작은 지역이에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간이 대회 때밖에 없어요. 정체돼 있다는 느낌이 너무 심해요. 그게 안타깝고 아쉬워요. 장수트레일레이스로 그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요. 이 지역의 어떤 독특한 문화가 생겼으면 해요. 이전과 달리 사명감이 생겼어요!"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아내 따라 장수 내려간 호주 유학생, 100년 대회 꿈꾸다 [제5회 장수트레일레이스 운영자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