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 국립공원 카운트다운 (4)
뜻밖이었다.
산새소리와 풍경소리가 그윽하게 들려올 줄 알았다.
하지만 경내로 들어서자 여러 소음들이 기이했다.
먼저 한쪽으로는 등산객들이 몸을 풀며 내는 기합소리가 들려온다.
또 반대쪽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인근 중학교 학생들의 사생대회가 있었다.
그래도 어린 학생들의 고주파수 웃음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문제는 자동차가 절 턱 밑까지, 아니 절 안에까지 들어온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바로 옆에 옷깃을 스칠 만큼 가까이 차가 지나다닌다.
한 곳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조성된 주차장이 2~3곳 더 있다.
양산 통도사나 설악산 신흥사처럼 거리가 좀 떨어진 절 앞 넓은 부지에 큰 규모의 주차장이 있는 형태가 아니다.
왜 그런 걸까? 또 이런 상황에서 왜 범어사는 환경규제가 강해질 확률이 높은 국립공원 승격을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걸까? 국립공원되면 오히려 규제가 완화된다? 사연을 들어보기 위해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을 만났다.
정오 스님은 벽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90년도 수계했다.
가야사, 장안사, 고불사 주지를 지냈으며 제15~16대 중앙종회의원과 종립학교관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본론부터 꺼냈다.
왜 범어사가 국립공원 지정에 찬성했느냐고. 금정산 내 사유지 비율이 80%인데 그중 단일로는 가장 큰 8%가 범어사 땅이라 이들의 입장이 늘 열쇠였다.
"인식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국립공원공단과 대화하면서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됐거든요." 범어사 일주문. 선찰대본산이라고 써 있는 것이 남다른 점이다.
한국불교에 선을 일으킨 곳이 범어사기 때문이다.
금정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려는 운동은 이미 10여 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범어사는 이에 미지근한 태도였다.
애초에 범어사 일대는 그린벨트에다가 공원녹지구역, 상수원보호구역 등으로 규제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간에는 "범어사 마당의 풀도 국가의 동의를 얻어야 뽑을 수 있다"는 농담이 돌았다.
이런 판국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까지 하면 여러 사찰의 현안들을 해결하기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놓고 반대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찬성하진 않았다.
하지만 2년 만에 상황이 급변했다.
"그동안 국립공원공단 관계자와 수십 차례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국립공원으로 지정됐을 때 범어사와 금정산에 어떤 변화가 생기고,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알게 됐어요. 이런 걸 보면 시절인연이란 걸 실감하게 됩니다.
" 시절인연은 쉽게 풀면 '다 때가 있다'는 뜻의 불교용어다.
소통의 문제였다.
국립공원이 되면 수행 환경에 방해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공단에서 현재 범어사가 갖고 있는 문제를 풀어 줄 수 있다고 했다.
바로 앞서 살펴 본 주차문제와 등산객 문제였다.
"주차장 확장은 현재 규제 속에서는 해결이 요원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 국립공원공단에서 제도적으로 이를 풀어 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양산 통도사는 차를 3,000대나 댈 수 있다.
그런데 범어사는 여기저기 흩어진 주차장에 차를 다 댄다고 해도 고작 300대밖에 주차할 수 없다.
그래서 주말 오전이면 주차장이 순식간에 가득 찬다.
문제는 불자들보다 등산객 수가 더 많다는 데 있다.
차를 대고 산으로 가버리기 때문에 평균 주차시간이 훨씬 길다.
그렇다고 범어사 입장에서 '등산객은 주차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최근에는 범어사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도 크게 늘었는데 주차문제 때문에 다들 방문에 난색을 표한단다.
성보박물관 내 전시된 괘불도. 지난 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 고시됐다.
"또한 기존의 등산로가 아니라 절 밑에 있는 향나무, 편백나무, 측백나무 군락지를 통해서 절을 우회해서 올라가는 길을 내자는 것도 공감대를 형성했어요. 지금은 찻길을 따라 경내로 들어와야 하거든요." 국립공원 지정 후 이런 현안들이 해결되면 모두에게 좋다.
등산객은 더 좋은 숲길을 따라서 금정산을 즐길 수 있고, 불자들은 등산객과 조우하지 않아 좀 더 조용한 경내에서 부처님을 뵐 수 있고, 주차도 원활해진다.
당연히 금정산의 환경도 더 잘 보전된다.
야간산행이 금지되는 것도 새벽에 수행하는 스님들에겐 희소식이다.
또 다른 현안도 있다.
지난 봄 경상 지역을 휩쓴 산불 문제다.
이번 산불로 천년고찰 고운사와 운람사가 전소되는 피해가 있었다.
그러자 다른 경상 지역 사찰들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내년 봄, 아니 당장 가까운 가을철에 우리 사찰이 불타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는 것. 범어사도 마찬가지다.
"국립공원은 물론 산림청과도 같이 풀어야 될 문제인데, 이번 산불 때 숲이 절 바로 뒤까지 번져 산불이 나면 속절없이 절에 옮겨 붙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전각 주변에 적어도 10m 이상은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싣고 있어요. 산불로 피해 본 다른 일반 가구들도 숲이 가까워 피해를 본 경우가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산림법이 엄하다 보니 개인이 함부로 나무를 자를 수 없죠. 사찰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건 좀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성보박물관 전경. 주차장은 넓어지고 등산로는 편해진다 국립공원이 되면 범어사는 어떻게 변할까? 생각보다 구체적인 얘기가 돌고 있다.
먼저 범어사의 탐방로를 계곡 아래에서부터 새로 놓는 지 살펴봤다.
주차장은 구체적인 부지와 미래계획이 있다.
먼저 매표소 밖, 회전교차로에서 성보박물관으로 가는 길 일대가 모두 범어사 땅인데 여기에 100~200대 정도 주차공간을 선제적으로 확보한다.
그리고 그 아래 음식점 거리에 있는 빈 땅을 국립공원공단이나 범어사, 혹은 부산시가 매입을 해서 주차장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최종 목표는 범어사를 '차 없는 도량'으로 만드는 것. 또 금정산으로 오르는 길도 정비된다.
"범어사에서 금정산으로 가는 길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입니다.
그래서 인대가 늘어나거나 다리를 삘 위험이 높죠. 가지런히 정비돼 있지 않고 울퉁불퉁하거든요. 주말이면 범어사에 119가 출동하는 일이 허다해요. 최근에도 한 번 출동해서 다리 삔 분을 업어갔죠. 고백하자면 저도 한두 번 삐었어요." 길이 정비되면 범어사도 좋다.
범어사 스님들도 금정산을 자주 오른다.
대표적인 때가 단오제. 범어사는 고당봉에서 단오제를 지낸다.
스님들이 주먹만 한 소금 주머니 300~500개를 짊어지고 올라간다.
소금은 바다의 결정체며, 물은 불을 끈다.
그러니 산을 지키는 것은 물이다.
즉 금정산 산신할머니에게 올해도 산불이 나지 않도록 금정산을 지켜달라는 의미다.
물론 소금을 땅에 뿌리거나 하진 않는다.
식생에 해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한테 나눠주며 집 선반 위 같은 곳에 올려두라고 한다.
액막이다.
또 정상에 있는 특정 지형에 소금항아리를 묻어두는데 이걸 매년 단오제할 때 교체한다.
그만큼 범어사에게 금정산은 소중한 존재다.
"금정산이 아버지라고 하면 범어사는 어머니입니다.
손바닥과 손등 중 어디가 더 크다 작다를 논할 수 없듯 한 몸입니다.
하늘과 땅이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한 뿌리인 것처럼 말이죠. 물아일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 국가가 어려우면 앞장서는 사찰 듣다보니 범어사에 대해 궁금해졌다.
불자가 아닌 등산객 입장에선 범어사는 대상이 아닌 수단, 들머리 이름에 불과한 존재였다.
범어사의 역사에 대해 묻자 시작은 678년이다.
"천년고찰이죠. 의상대사가 창건했는데 원효대사도 상주한 적이 있어 이 두 분이 함께 머문 절이라는 역사성을 갖고 있어요." 광복 이후로는 일제 잔재 청산에 앞장섰다.
일제는 조선 불교를 일본화하려고 스님의 결혼을 장려했었다.
일본에선 그게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한 스님이 크게 늘었는데 광복 후 이를 되돌리려는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주도한 것이 범어사다.
그렇게 비구승(결혼하지 않은 스님) 청정수행 가풍을 확립했다.
그리고 한국불교에 '선'을 일으켰다.
선을 가장 먼저 주장한 것이 범어사라 한다.
그래서 일주문에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고 써 있다.
선이란 마음을 닦는 것이다.
마음을 닦는 것이 무엇인지, 불교의 가르침에 어둡다고 고백하니 주지 스님은 '감인대堪忍待'라는 세 글자만 내어줬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란 뜻이다.
이것이 마음을 닦는 것의 기본이다.
멋대로 해석하자면, 범어사의 역사를 보니 감인대라는 가르침은 마냥 참기만, 견디기만, 기다리기만 하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때가 오면 일어선다.
범어사는 3.1 운동을 주도한 바 있고, 독립운동 비용도 많이 지출했다.
조금 더 전으로 가면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훈련소를 금정산에 두고 의병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6.25 전쟁 때는 낙동강 전선이 형성됐을 때 야전병원 역할을 통도사와 더불어 했다.
통도사는 그나마 경상인 군인이 갔다면, 범어사는 중상자를 맡았다.
늘 보자기에 싸인 시체가 즐비했고, 아침마다 화장하며 목탁 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사령관 하멜 장군이 합동위령제를 범어사에서 열기도 했다.
"그러니 말하자면 국가가 어려울 때 늘 앞장서는 사찰, 호국종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도사와 범어사가 2년 전에 현충시설로 지정된 것도 이 때문이죠." 절이라고 해서 모두 속세와 단절된 역사와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지금도 범어사는 국가가 어려우니 앞장서고 있다.
바로 저출산이다.
주지 스님은 "저출산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로 아이가 있어야 가정에 에너지가 충만해지고 행복이 들어찬다"고 했다.
주지 스님은 저출생극복프로젝트 부산 위원회의 9명 위원 중 한 사람이다.
국립공원 지정에 찬성한 것도 저출생 극복을 위한 고민의 연장선이라고 한다.
현재 부산의 출산율은 0.6 정도로 전국 평균보다도 낮다.
또 젊은 층들이 도시를 나가는 경우가 많아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부산에 살러 올지, 미래 세대에 어떤 부산을 남겨야 할지 고민을 했고, 부산의 명산을 국립공원으로서 잘 보전해 넘기는 것도 한 방법이란 생각에 이르렀다고 한다.
범어사 대웅전 전경. 바로 앞에 탑은 통일신라시대 때 쌓은 3층 석탑으로 대웅전과 같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금정산을 오르는 마음가짐, '답설야중거' 한편 범어사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문화재를 100개 이상 소장하고 있다.
부산시민들이 자긍심을 가질 만한 문화유산의 보고다.
주지 스님은 "성보박물관은 꼭 가봐야 한다"며 "일주문에서부터 대웅전까지 올라가는 길도 꼭 걸어보길 추천한다"고 했다.
성보박물관에는 일연의 <삼국유사>가 있다.
지금은 동산 스님 열반 60주년 특별기획전시 '인내로 열린 길, 감인대도'가 8월 29일까지 열린다.
동산 스님은 앞서 본 일제 잔재 청산 불교정화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며칠 전에는 가수, 유튜버 8명이 금정산을 직접 산행하고 범어사로 내려와 사찰음식을 먹고 간 적이 있습니다.
범어사 음식이 진짜 맛있거든요. 그래서 이 맛을 좀 더 알리려고 최근 성보박물관 위에 사찰음식체험관을 만들었습니다.
최신형 조리대를 둬서 누구나 와서 수업 받고 사찰음식을 만들 수 있게 했어요. 월요일과 화요일은 사찰음식, 목요일, 금요일은 떡을 만들고 차를 내리죠." 취재 일정 상 인터뷰 이후 금정산 산행이 예정돼 있어 서둘러 자리를 떠야 했다.
돌아가는 발걸음에 주지 스님은 '답설야중거'라는 글귀를 보태줬다.
눈이 내리는 길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걸으면 뒤따라오는 사람이 불편하니 반듯하게 걸으란 뜻이 담긴 시의 첫 마디다.
"금정산에 있는 길은 금정산을 찾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기자님의 발걸음 또한 뒤따라 금정산을 오를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될 터지요. 마구잡이로 걷거나, 꽃을 꺾는 발걸음을 남기면 안 되겠지요. 반듯하게 걸으셔야 합니다.
" 당부대로 반듯하게 걸어본다.
국립공원 금정산을 향해 한 발자국 반듯하게 나아간 범어사처럼. 월간산 7월호 기사입니다.
"불자와 등산객 모두 좋은 길…시절인연따라 사찰도 변해야" [금정산 범어사 주지 정오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