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립영화계의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는 여성의 사라진 서사를 다시 쓰는 일이다.
미처 쓰지 못한, 시간에 파묻혀버린 이야기. 그래서 이런 시도는 대개 선대의 여성을 향한다.
<양양>은 이런 조류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렇다고 <양양>을 ‘선대 여성 서사 쓰기’ 카테고리 속 하나로 심상하게 분류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 내부에서 지워진 고모를 가족 안에서부터 다시 찾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특별한 영화의 성취를 오롯이 인정하면서도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건 <양양>뿐 아니라 여성 서사의 복구를 시도하는 작품들에 함께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말해지지 않던 것을 말하는 작업 <양양> 술에 취한 아버지의 한마디 고백으로부터 <양양>은 시작된다.
나에게 고모가 있었다고? 초반에 영화를 추동하는 것은 가족의 역사에서 사라진 고모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녀와 나 나이의 ‘닮음’이 이끄는 모종의 연대감이다.
남자 형제의 뒷전에 물러나야 했던 처지는 대물림하며 반복된다.
이는 동아리의 신입회원 소개 자리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왔다”라고 당차게 말하는 고모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양주연 감독은 이 에피소드에서, 집 안에서와 달리 밖에서는 솔직하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우리의 일부를 발견한다.
<양양>이라는 제목은 양씨 성을 가진 여성을 의미하는데, 양 감독과 그녀의 고모를 하나로 묶는 호칭이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DNA를 통해 두 여성을 묶는 <양양>의 손길은 영화에 공감하는 모든 관객에게 닿는다.
이 초반부를 통해 <양양>은 고모의 흔적을 찾을 동력을 얻으며,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 연루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본격적으로 고모가 지워져야 했던 이유를 되짚는다.
그것은 고모의 죽음을 둘러싼 중층의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내는 과정이다.
고모는 강압적이며 의심이 많은 남자 친구의 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그녀는 이미 떠나갔기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해명할 수 없다.
또한 그녀는 이렇게 떠났다는 이유로 그 죽음에 대해 말해지지 않았다.
수상한 마지막이지만 가족들은 수사를 원하지 않았다.
이때 생긴 그림자는 고모의 역사 전체에 드리워진다.
그래서 점차 그녀의 이야기는 가족 내에서 발설되지 않는다.
이것은 한 죽음을 둘러싼 여러 겹의 침묵이다.
이런 고요는 양 감독이 영화를 찍는 순간에도 계속된다.
양 감독은 용기를 내어 고모의 죽음에 관한 화제를 꺼내지만, 어느 누구도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이 영화는 그만 암흑과 마주한다.
고모의 죽음은 모든 침묵의 시작이지만, 그 침묵은 오래 이어져 죽음을 덮어버린다.
비록 조심스럽지만 또박또박 걸어가던 처음과 달리 여기서부터 <양양>은 머뭇거리며, 혹은 다른 곳을 오가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한다.
이 짧은 순간에 영화의 호흡이 살짝 달라졌다는 인상이 있다.
약간의 체념일까, 혹은 슬픔일까. 아니면 방향을 재설정하기 위한 숨 고르기인가. 하지만 양 감독은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움직인다.
비슷한 사례에 관해 듣기도 하고, 아버지에게 제안을 하기도 하고, 고모에게 편지도 쓴다.
결국 한편의 영화로 완성되는 이런 시도들에 다른 말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좀 다른 층위의 것이다.
침묵과 마주쳤을 때, 그것에 저항하는 영화는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침묵을 깨려고 시도할 수도 있고, 침묵 자체에 대해 새로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양>은 전자를 택하는 영화다.
하지만 나는 후자를 시도하는 <양양>이 궁금하다.
이 영화에서 고모의 서사와 침묵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고모의 죽음을 둘러싼 침묵을 만든 이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그것을 강요한 시대는 어떠했고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사라진 여인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 않으려 하는 이들을 좀더 치열하게 따라갔다면 어땠을까. 그런 측면에서 <양양>과 나란히 두고 이야기할 만한 작품은 연상호 감독의 <얼굴>이다.
한 여성의 역사를 되살리며 그 아래 놓인 수치의 문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았다.
후반부에서 <얼굴>은 영화의 초점을 ‘영희’(신현빈)의 얼굴에 맞추고, 결말 부분에서 여태 보여주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을 공개한다.
하지만 의미를 알 수 없이 평범한 얼굴. 이 마지막은 온갖 가십과 폭력에 시달린 영희의 얼굴이 아니라, 그걸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우리에게로 시선을 돌려놓는다.
텅 빈 영희의 사진을 지켜보며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얼굴이며, 이 마지막 장면으로 <얼굴>은 그녀에게 강요되던 수치심을 관객에게 돌려준다.
물론 픽션인 <얼굴>과 <양양>을 같은 선에서 비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침묵하는 죽음으로부터 시선을 넓혀 그걸 지켜보는 이들을 겨냥하는 과감함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여러 겹의 침묵을하나하나 뜯어보며 <양양> <양양>의 마지막은 깔끔하다.
나는 이 깔끔함이 의심스럽다.
괜한 딴지라 해도 좋지만, 여기에 아직 덜 말해진 이야기가 있는 것 같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영화의 특권이라 믿는다.
동시에 이것은 죽음을 찍는 것의 어려움에 관한 유구한 질문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으로 끝난 여성의 이야기 앞에서 영화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어떻게 하여야 길을 잃지 않으면서도 영화의 힘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양양>의 경우 그것은 죽음 위로 뒤덮인 여러 겹의 침묵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렵고 고단한 작업이 될 것이다.
고모를 둘러싼 침묵을 향한다는 것은 곧, 가족으로 되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가장 깊숙한 어둠을 들여다보고, 이를 온몸으로 관통하여 시대와 접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양양>은 가족 앞에서 질문을 던지며, 이러한 태도만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하지만 어느 선 앞에 머물렀다는 인상은 나의 착각에 불과한 것 일까. 그렇기에 여성 서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실은 괴로운 일이다.
그건 단순히 끄적이는 행위에 머무를 수 없으며, 당대에 쓰이지 못한 이유에 닿는 순간에야 완료된다.
가족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가족의 치부와 만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길을 기어이 걷고자 다짐하는 영화는 더 큰 응원을 받을 만하다.
앞으로도 여성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고서 우릴 찾아오는 영화는 많아질 것이다.
이 글은 어떤 제안을 하기보다, 작은 가능성을 여는 계기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궁금해진다.
여성과 동행하는 영화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오래도록 겹겹이 쌓여온 어둠 앞에서 말이다.
박수를 준비하고 있겠다.
[비평] 침묵 깨기의 어려움, 홍수정 평론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