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삶을 흔히 생의 마무리라 포장하지만, 영화 속 노인들에겐 버티기일 뿐이다.
마무리를 할 만큼 생의 과정이 정연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끝을 설계할 만큼 삶을 꾸미며 살지 않았다.
폐지를 줍고 노상에서 채소를 팔며 생을 이어가는 세명의 노인은 법과 제도의 보호망 밖에 있다.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고기를 먹고 도망치는 이들의 행위는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존재가 현실의 질서 안으로 잠시 침투하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영화에서 범죄를 다룰 때 종종 명확한 판단을 요구하지만, 이 영화는 그 판단을 미루게 한다.
‘노인들이 잘못한 건 알겠는데, 왜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나.’ 관객은 무전취식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분노보다 혼란을 느낀다.
세 노인의 삶이 이미 사회의 손이 닿지 않는 구역에 놓여 있다는 걸 알아서다.
영화는 도덕의 내용보다 도덕이 의미 없어지는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
관객은 그들의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대신 자신의 판단이 어떤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주시한다.
굶주림과 질병, 사회적 고립은 그들의 행동을 윤리적 판단 영역의 바깥으로 밀어내고, 그를 본 관객은 옳고 그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흔들림을 경험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살아남을 수 있나 <사람과 고기> 영화의 제목을 보면 생략된 말이 떠오른다.
사람과 고기(의 경계는 무엇인가). 또는 사람과 고기(는 어떻게 다른가). 인간 존엄이 사회구조 안에서 어떻게 고기로 환원되는지를 묻는 의문문. 불판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장면은 식사 행위처럼 보이지만 불 위에서 구워지는 건 고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이 제거된 삶, 존엄의 잔여물이다.
그들은 더 이상 사회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
일할 수 없고 소속도 없으며 인간관계도 없다.
남은 건 오직 몸. 그들에게 남은 단 하나의 자산은 신체며 그 신체는 인간의 정신이나 양심으로 온전히 통제되지 않는다.
세 노인이 고깃집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은 인간의 생존 본능이 원초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불판 위의 고기는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생존 또한 누군가의 소비를 통해 유지된다.
이 영화가 비극인 이유는 세 노인이 ‘소비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소비의 주체로서도 기능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전취식의 방식으로 경제질서와 사회윤리에 반격을 가한다.
그 저항은 미약하기 이를 데 없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지만 관객은 그들을 비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모호한 감정에 갇힌다.
불판의 고기와 노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의 표면과 노인의 주름진 피부를 보면서 관객은 불안을 느낀다.
사람과 고기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둘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발생하는 불안. 배고픔 앞에서 윤리는 설 자리를 잃는다.
세 노인이 고기를 뒤집는 단조로운 동작은 인간의 윤리가 얼마나 허약한 몸체를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불판 위의 고기가 익어가듯 인간의 양심도 서서히 열기에 녹아내린다.
관객은 고기 굽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윤리는 생존의 조건과 맞닿은 문제임을 환기한다.
먹지 않으면 죽고, 먹으면 죄가 되는 세계. 세 노인의 테이블은 그곳에 차려져 있다.
고기 접시에 담긴 소멸 3인분. 고기는 열에 의해 형태를 잃고, 노인은 생의 열기에 타들어간다.
둘 다 시간과 온도에 의해 변형되는 존재다.
소멸해가는 이들을 한 테이블에 두고 관객에게 합석을 권한다.
사람과 고기를 구별하는 법을 찾아내길 기다리며 망을 봐줄 수 있는지 묻는다.
노인들이 식당에서 도망치는 장면이 희극처럼 보여도 웃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웃음 뒤에 죄책감과 두려움이 남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의 감정을 따라가려 할 때마다 관객은 벽에 부딪힌다.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이해와 공존의 감각. 이들을 비난할 수도, 변호할 수도 없다.
대신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묵묵히 ‘본다’ . 이 영화가 제안하는 최소한의 윤리가 보는 행위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잠시 바라보는 일. 거기에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
결국 영화의 모든 질문은 인간을 향한다.
인간은 어디까지 살아남을 수 있나. 생존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어디까지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가. 목적은 감동보다 사고(思考) <사람과 고기> 인상적인 건 세 노인이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착하고 바르게 살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불행을 원망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연민을 구걸하지도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할지언정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전시하지 않는다.
눈물 바람 없이 80년 세월을 한줄로 요약하며 자신의 인생을 지나간 날씨처럼 말한다.
고깃집에서 도망친 뒤엔 마치 장난이라도 친 듯 서로를 다독이고 웃는다.
울면 무너진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의 웃음. 고기 먹고, 도망치고, 웃고, 서로를 챙기는 세 노인의 시시하고 사소한 행동은 영화에 묘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가족 없고 돈 없고 내일도 없는 세 노인이 넉넉하게 가진 것이 하나 있다.
거실과 길거리와 빈방에 드는 햇살. 그늘진 삶에 드리운 따뜻한 빛은 그들을 동정하지 않고 공평하게 비춘다.
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은 빛의 활용에서 이루어진다.
사회의 그늘 속 인물들을 양지로 불러내 평등한 햇살 아래 두는 연출은 이들을 ‘가난한 사람’에서 ‘존재하는 사람’으로 위치를 재설정한다.
어떤 삶도 어둠 속에만 있을 수 없으며, 어떤 상황에도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관객은 그것을 미학적 관점으로 소비하거나 감정적으로 소화하지 않는다.
대신 생각한다.
이 영화의 목적은 감동보다 사고(思考)에 있으며 그를 통해 사회 현실을 감각하는 일에 있다.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다니지만, 인물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감독은 연출의 권력을 내려놓고 무표정한 관찰자로 물러선다.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바라보려는 태도. 사실 <사람과 고기>는 영화관을 나선 후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세 노인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빈방에 든 햇빛과 담장 덩굴을 흔들던 바람이 떠오르고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노인에게 시선이 조금 더 머문다.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보며 누군가의 삶을 이해했다고 착각하지만, <사람과 고기>는 관성적으로 고수해온 나름의 기준이 의심스러워지는 현상을 마주하게 만든다.
영화는 어떤 결론도 내지 않는다.
단지 생각하라는 당부를 남길 뿐. 생각한다는 행위는 영화가 줄 수 있는 첫 번째 변화다.
<사람과 고기>는 극적 사건이나 감정의 폭발 대신 사유로 채운다.
영화관을 나와도 영화가 끝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유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는 경험. 세 노인이 먹는 건 고기가 아니라 활기다.
살아 있는 감각을 되찾고 싶은 욕망. 살아 있는 척하기다.
활기가 고파서, 그들은 먹는다.
[비평] 살아 있는 척하기, 최선 평론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