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채보상운동 시작한 ‘민족 항일도시’● 이상화·현진건·이육사 배출한 ‘문학도시’● 삼성·쌍용·코오롱 창업주 대구에서 창업● 김수환 추기경, 대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 전태일과 이윤복, ‘지연’과 ‘학연’의 도시정리=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자료: 국난기의 사건과 인물로 보는 대구 이야기(정영진 저)
대구 수성못 둑에 있는 이상화 시비. 동아DB
달구, 달구벌로 불린 대구는 다양한 별칭을 갖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저항시인 이상화의 고향 대구는 일제강점기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독립에 대한 염원을 일찌감치 불태웠던 ‘항일도시’였다.
또한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약령시 도시’이자, 미 군정 당시 시위가 많아 붙여졌던 ‘폭동(항쟁)도시’였고, 6·25전쟁 때는 ‘군사도시’ ‘피란도시’ ‘사수도시’로 불렸다.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 당시에는 대구 선거구 모두를 야당과 무소속 후보들이 차지한 야당도시였다.
그러나 5·16과 12·12 군사정변을 거치며 ‘정치도시’이자 ‘여당도시’ ‘보수도시’로 이미지가 점차 굳어졌다.
오늘날 대구는 교육열이 높은 ‘교육도시’이자 문화적 다양성이 공존하는 ‘문화도시’이기도 하다.
각계 명사를 여럿 배출한 ‘인물도시’이자 아름다운 여성이 많은 ‘미인도시’이기도 하다.
특화산업에 빗대 한때 ‘능금도시’ ‘섬유도시’로 불리기도 했다.
  이처럼 대구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온 지난 100년 동안 대한민국 국난기에 다양한 사건과 인물이 얽혀 있는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 같은 도시다.
언론인 출신으로 문학평론가 활동을 해온 정영진 선생이 푸른사상에서 2021년 펴낸 책 ‘대구이야기’를 토대로 대구에서 나고 자란 인물과 주요 사건에 대해 살펴본다.
<편집자 주> 120년 전 대구 풍경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대구 성내 인구는 약 4만 명, 가구수는 약 1만 호였다.
지금과 같은 ‘대구광역시’ 전체 인구와 가구가 아니라, 진동문과 달서문, 영남제일관문과 공북문 등 당시 대구 사대문 안에 거주하던 인구다.
지금으로 치면 동성로와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안의 인구와 호수를 집계한 것이다.
  1만 호 4만 명 상주인구 외에 도지사 격인 관찰사와 군수, 우체사와 전보사, 관속이 있었고, 진영대 병사 400명가량이 주둔하고 있었다.
진영대는 관찰사 지휘를 받는 방위군 성격의 군대였다.
하지만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가 조인되고, 그해 7월 20일 ‘군사경찰훈령’에 의해 한국(조선)의 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한다고 통고한 후, 사실상 대구의 일본군 수비대(헌병대)의 지휘 통솔 아래 놓인 허수아비 군대였다.
대구에는 성안에 사는 상주인구와 관속, 병사를 상대로 한 각종 장삿집이 제법 번창했다.
숙박과 술집을 겸한 주막집이 200여 곳에 이르렀고, 각종 수입품을 파는 잡화점이 123곳, 담뱃집이 50곳, 고깃집이 40곳, 포목점이 40곳 있었다.
이 밖에 지체 높은 양반이나 부자들이 주로 드나들던 기생집 50여 곳과 보통 사람들의 ‘객고’를 풀어주는 매음 전문 ‘갈봇집’도 50군데가 있었다.
120년 전 대구 사회상은 당시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정보지 격으로 발행하던 주간신문 ‘조선’지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일본 도쿄대에는 120년 전 일본인이 만든 대구 최초 주간신문 ‘조선’이 보존돼 있다.
  친일 거두 ‘박짝때기’ 박중양 ‘박짝대기’ 박중양. 위키피디아 ‘박짝때기’는 대구 출신 친일 거두 박중양의 별명이다.
중년 이후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으스대던 그를 사람들이 비꼬기 위해 지팡이의 경상도식 표현인 ‘짝때기’를 그의 성씨에 붙여 ‘박짝때기’라 불렀다.
1874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박중양은 1904년 대구 군수로 부임한 후 대구에 반해 원적을 대구로 삼고 80년 평생을 대구에서 살았다.
중인 출신으로 26세 때인 1900년,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에 유학한 그는 임관 후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친일 출세 가도를 달렸다.
그는 권세와 영화가 보장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초지일관 친일을 신념으로 삼아 산 사람이다.
그가 인생 후반에 살았던 대구시 침산동 현 침산공원은 일명 ‘박짝때기산’으로 불린다.
1943년 일등훈장에 서훈되고, 조선인으론 최고 영직인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 그는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특위가 와해되면서 풀려나 대구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 불 지핀 서상돈 국채보상운동의 불을 지핀 서상돈. 위키피디아 술은 끊어도 담배는 못 끊겠고, 한 끼 밥은 굶을망정 담배만은 피워야겠다는 사람이 많다.
그처럼 어려운 게 금연이요, 단연(斷煙)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일본에 진 빚 1300만 환을 갚기 위해 우리 민족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 석 달만 담배를 끊어 모으자고 호소한 일이 있었다.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그것이다.
  대동광문회 서상돈 선생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제국(당시는 대한민국 이전 시기로 대한제국 시절이다) 골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동참했다.
날품팔이 노동자와 기생, 백정과 인력거꾼 등 나라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이들조차 ‘나라를 구하자’는 일념으로 국채보상운동에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 모든 기적 같은 애국심의 발휘는 운동의 주도자인 서상돈 선생의 덕성과 친화력, 솔선수범하는 계몽 정신이 불 지핀 결과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851년생인 서상돈 선생은 서른다섯이던 1886년, 경상도 시찰관이란 벼슬을 제수받았고, 이후 자수성가해 대구 유수의 갑부로 이름을 알렸다.
천주교 대구교구 개설 후에는 성직자 돕기와 선교, 빈민 구호에도 족적을 남긴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이 때문에 ‘서시찰’이란 존칭으로 곧잘 불렸다고 한다.
서 선생은 남보다 싼 소작료를 받아 인기였는데, 소작권은 공평하게 나눠주되, 천주교 신자에게 우선권을 줘 선교의 폭을 넓히려 애썼다고 한다.
  ‘안일암 사건’ 주도한 서상일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서상일. 동아DB 1915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지금의 대구시 남구 대명동 앞산에 있는 안일암에서 영남 지역 애국 유지들이 모였다.
이들은 명절을 기리는 글짓기 시회(詩會)를 연다고 일경들을 속이고 실제로는 ‘조선 국권회복 부흥단 중앙총본부’를 결성했다.
독립운동사에 널리 알려진 이른바 ‘안일암 사건’이다.
이 사건 주역이 바로 동암 서상일 선생이다.
1887년 대구에서 태어난 동암은 1909년에는 김동삼·안희제 등 8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해 대동청년단을 조직했다.
경술국치 해에는 ‘9인 결사대’를 조직해 각국 공사에 선언문을 돌린 후 자결할 계획이던 ‘9공사 사건’을 벌였다.
안일함 사건 이후인 1919년에는 대구에서 3·1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이듬해에는 만주로부터 무기 반입을 꾀하다 잡혀 투옥됐다.
1924년 이후에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면서 대구 사회의 공청(公廳)이라 할 조양회관을 건립해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한민당 총무와 과도입법의원을 거쳐 1948년 대구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헌법기초위원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후 반독재 투쟁의 길에 나선 그는 1956년 진보당 창당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1960년에는 사회대중당을 창당해 대표최고위원에 올랐고, 5대 민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1961년 분열된 혁신 세력을 모아 통일대중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무산됐고, 이듬해 작고함으로써 다난한 정치 일생을 마쳤다.
  한국 현대 100년사 가운데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광복 후 건국 투쟁, 50년대 민권 수호와 혁신에 동암만큼 듬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대구는 물론 전국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이상화, 현진건, 그리고 이육사 시인 이상화. 위키피디아 소설가 현진건. 위키피디아 저항시인 이육사. 위키피디아 이름난 항일 문인 가운데 광복을 목전에 두고 일제의 엄혹한 압제에 희생된 이가 적지 않다.
광복 두 해 전인 1943년 4월 25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와 소설가 현진건이 각각 42세와 43세를 일기로 공교롭게도 같은 날 병사했다.
이듬해인 1944년 1월 16일에는 시인 이육사가 갓 마흔 살에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상화와 현진건은 대구 태생이고, 이육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기자 시절 청년기를 대구에서 보낸 인연이 있다.
대구를 대표하는 세 문인이 일제의 직간접적 탄압에 희생돼 불혹의 나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시인 이상화의 병은 위암이었고, 빙허 현진건의 사인은 폐와 장의 결핵이었다.
두 사람의 직접적 사인은 ‘병사’였지만, 빙허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처럼 당시 일제 치하의 ‘미치고 환장할’ 것 같은 압제에 저항하며 자학하다 골병이 들어 요절한 것과 다름없다.
대구에서 기업 일으켜 재벌 된 창업주들 삼성그룹 모태 대구 삼성상회. 동아DB 대구에서 기업을 일으켜 재벌이 된 대표적 인물이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이다.
그는 광복 후 대구에서 주로 건어물을 수출하는 삼성상회를 운영하는 한편, ‘월계관’이란 상표를 단 청주 전문 조선양조회사를 꾸려가던 재력가였다.
1946년 10월 18일자 ‘대구시보’에는 이런 사고가 실렸다.
“본사 사령. 여상원 임 부사장, 한석동 임 경리국장. 경리국장 이병철 임 기획국장” 당시 초대 경북지사를 지낸 장인환 사장 밑에서 부사장직을 맡은 여상원은 1~3공화국 시절 정통 ‘대구일보’ 사장과 대구상의 회장, 동신섬유 사장을 지낸 대구의 이름난 경제인이다.
한석동은 대구의 현직 변호사였다.
이 두 사람과 함께 이병철 회장이 그의 전공 분야라 할 ‘경리’에서 ‘기획’ 분야 신문사 간부가 된 것이다.
이듬해인 1947년 이병철 회장은 삼성의 기반을 서울로 옮겨, 전국적 기업을 일궜고, 글로벌 기업의 토대를 닦게 된다.
삼성상회가 서울로 옮겼을 때 부사장으로 합류한 이가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다.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 동아DB 쌍용그룹 창업주 김성곤 회장. 동아DB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 동아DB 광복 후 대구에서 가장 역동적 정치활동을 편 기업인은 훗날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회장이다.
광복 전부터 칠성정에서 소규모 비누 제조업체인 삼공합자회사를 운영하며 재력을 키운 그는 광복 후 경북 건국준비위원회의 재정부장직에 올랐다.
일본에서 모자와 피복 제조로 한밑천을 잡았던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도 광복 직후 대구에서 우익정당인 한민당 경북도당 재정부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회장이 정치활동에 몰두한 탓에 그룹 기틀은 2대 회장인 이동찬 회장이 주로 다졌다.
이 회장은 나일론 제조 기술을 최초로 도입해 재계의 샛별로 떠올라 1950년대 말부터 재벌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연료 에너지 분야 국내 최강자가 된 대성그룹 창업주 김수근 회장도 1947년 대구 칠성정에서 종업원 3명에 대지 50평(약 165m2)의 연탄공장을 시작으로 대성산업을 키웠다.
대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김수환 추기경 대구에서 가톨릭시보 사장을 지낸 김수환 추기경. 동아DB 한국 최초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대구시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세 살 이후 초등학교 5학년 말까지는 경북 선산군과 군위군에서 살다가 6학년 무렵부터 다시 대구로 이사해 태어난 동네 근처인 남산3동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했다.
신부 양성이 목적인 이 학교는 초등학교 5, 6학년 과정이었다.
군위에서 5학년을 마친 그로서는 바로 6학년에 들어가 1년 만에 수료할 수 있었지만 입학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5학년 과정부터 되밟도록 배정돼, 졸업 때까지 2년간 청소년기를 대구에서 보냈다.
이후 서울 동성고와 일본 도쿄의 조치대 신학과를 거쳐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51년 신부 서품을 받는다.
신부 초년기 2년 반 동안은 경북 안동과 김천에서 본당 신부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53년 4월 최덕홍 당시 천주교 대구교구장 비서로 발탁돼 다시 대구에서 살았다.
배움의 열망에 가득 찼던 30대 초반의 그는 교구청 허락을 받아 1956년 10월 독일 유학 기회를 갖는다.
7년간 유학 생활을 마친 그는 1963년 11월 귀국해 대구로 돌아오게 된다.
독일 뮌스터대와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김 추기경은 귀국 반년 만인 1964년 봄, 대구시 남일동에서 발행되던 주간 종교신문 ‘가톨릭시보’ 사장직을 맡는다.
김 추기경은 바티칸 소식과 서구 종교 관련 외신도 대구의 통신사와 협력해 단독으로 받아 스스로 번역, 게재함으로써 타 매체에서 볼 수 없는 돋보이는 속보와 해설 기사를 실었다.
그가 다년간 외국에서 닦아온 외국어 실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사원들은 그가 영어와 불어, 독일어는 물론 라틴어까지 할 수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추기경님이 5개 국어인가 6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하는데 잘못 들은 것 아닌지요?”라고 물었다.
김 추기경은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며 “썩 잘한다고는 못하지만 5, 6개 국어가 아닌 8, 9개 국어쯤 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함께 한번 챙겨봅시다”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 독일 유학을 오래 했으니 독일어는 당연히 그렇다 치고, 외방 선교회 일로 자주 드나든 이웃 나라 불란서어도 그럭저럭 하는 축에 들고, 영어는 학생 때 배운 밑천으로 6·25 때 미군 통역 노릇도 했을 정도지. 신부니까 미사 예절과 교리 탐구를 위해 라틴어도 익혀야만 했고. 또 바티칸이 로마 시내에 있으니 그곳 이태리 말도 덩달아 귀동냥할 수 있었지요. 일제 시대에 중학교를 거쳐 일본의 대학에 유학까지 했으니 일본말쯤은 당연하고, 거기다 모국어인 한국말은 필수이고, 그중 특히 ‘참말’도 잘하지만 ‘거짓말’도 가끔 하니, 모두 합쳐 아홉 나라 말을 하는 셈이지요.” 김 추기경은 ‘가톨릭시보’ 사장을 맡았던 2년 반 동안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일에 미쳐 살았다고 한다.
김 추기경도 “내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린 시절”이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고. 그 덕에 1년여 만에 만성 적자였던 경영 실적은 흑자로 돌아섰고, 사원들 월급봉투도 전보다 두툼해졌다고 한다.
  김 추기경이 훗날 서울대 교구장에 이어 추기경이 됐을 때 ‘평화신문’을 창간하고 평화방송 설립을 주도한 것은 ‘가톨릭시보’ 시절 경험과 사명감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전태일·이윤복의 ‘지연’과 ‘학연’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전태일의 동상. 동아DB “근로조건을 개선하라”고 절규하며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에 분신해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전태일, 그리고 열한 살의 어린 몸으로 굶주리는 두 동생과 병든 아버지를 보살피며 쓴 일기를 ‘저 하늘에도 슬픔이’란 책으로 펴낸 이윤복. 두 사람은 대구시 남산동에서 살았다는 ‘지연’에다가 이윤복이 다니던 명덕초 동쪽 교실 세 칸을 빌려 대구 대학생회가 개교했던 중등 과정 ‘청옥고등공민학교’에 1963년 5월 전태일이 편입학해 같은 교실, 같은 운동장에서 동문수학했다는 ‘학연’이 있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대구시 남산동에서 태어났고, 1953년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난 이윤복은 유년기에 남산동으로 이사 왔다.
6·25 전후 두 사람이 살았던 남문시장 서편 남산동은 당시만 해도 근처에 화장터와 공동묘지가 남아 있어 월세가 비교적 싼 대구의 남부 외곽 빈민촌이었다.
이윤복이 또래 보다 2년 늦게 명덕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렵던 이농민 출신의 도시 최하층 빈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집안 사정은 그보다 더 열악했다.
처음부터 최하층 도시빈민 축에 들었던 전태일은 휴전 직후 더 나은 삶을 찾아 부모와 더불어 상경했다.
여덟 살이 되던 1956년 정규 학교가 아닌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4년 뒤인 열두 살 때에 정규학교인 남대문국민학교에 편입했으나, 녹록지 않은 서울살이에 실패한 부모를 따라 다시 대구 남산동으로 돌아와 ‘초등학교 4학년 중퇴’란 기록이 평생 그의 공교육 이력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대구로 다시 내려온 전태일은 1963년 5월 중등과정의 남녀 야간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 아버지가 학업을 중단하고 집에서 재봉 일만 도우라고 명령한 탓에 1년도 안 되는 짧은 학창 시절을 경험했지만, 전태일은 당시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고 한다.
“식모살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오겠다”며 가출한 어머니를 찾을 겸 아버지 행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내 여동생 순덕이를 데리고 대구 집을 나서 서울로 향한 전태일은 7년 후 평화시장의 열악하기 그지없는 미싱공 생활과 노동운동 끝에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하며 분신하기에 이른다.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 포스터. KMDV 이윤복의 아버지는 언제나 술에 젖은 데다 노름에까지 빠져 걸핏하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버릇이 있었다.
여기에 지친 윤복의 어머니는 윤복의 여동생 한 명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열한 살의 이윤복은 남은 두 동생과 취중 교통사고로 누워 있는 아버지까지 네 식구 생계를 도맡은 실질적 가장이자 ‘없는 집’ 주부 노릇을 겸해야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난 오후는 물론 때로 수업도 빼먹어 가며 껌팔이나 신문팔이, 구두닦이로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이때의 아픔과 가출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굶주리며 쓰라렸던 자신의 슬픈 심경을 8개월간 노트에 꼬박꼬박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이 노트는 당시 명덕초등학교 김동식 교사에 의해 신문에 알려졌고, 김 교사의 노력으로 1964년 3월 ‘저 하늘에도 슬픔이’란 제목으로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돼 수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이어 김수용 영화감독에 의해 신영균, 주증녀 등 당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같은 제목의 실화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책과 영화 덕에 가출했던 어머니와 동생이 돌아와 오랜 슬픔이 걷혔다고 한다.
  이윤복은 이후 대구 경복중, 능인고를 거쳐 군복무까지 마치고 직장 생활을 했지만 어려서 굶주리며 가장 노릇을 하느라 몸을 혹사해 온 탓인지 37세 나이에 만성 간염으로 사망하고 만다.
 
항일도시에서 문학도시까지…한국 근현대사 축소판, 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