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사회간접자본·초고층 빌딩 건설사 새로 쓴 삼성의 비결
● 위기와 기회 공존한 영종대교 건설
● 세계 최고 케이블 기술 배우러 일본행
● 주야 교대 24시간 작업, 혹한에도 떨며…
● 영종대교 성공, 해외 토목 사업 활로 마련
● 이건희 회장 인맥으로 외국 핵심 기술자 영입
● 해외 인재,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완공 3개월 앞당겨
● 현장소장 신뢰하며 교체 않는 리더십
영종대교는 한국 사회간접자본(SOC) 민자사업 1호로, 1995년 11월 29일 착공해 2000년 11월 28일 개통했다.
사진은 영종대교 전경. Gettyimage
‘신동아’ 4월호에서 이건희 회장이 건설 기술 수입을 위해 일본에 대거 기술자 연수를 보낼 때 일본 내 인맥이 크게 작용했다는 이상대 전 삼성물산 부회장의 증언을 소개했다.
일본에서 배운 기술을 토대로 국내 최대 규모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지어 건설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사례가 있으니 바로 영종대교 건설이다.
영종대교는 한국 사회간접자본 민자사업 1호로, 국내 토목 사업에서 이전까지 없었던 가장 기념비적 프로젝트였다.
인천국제공항과 육지를 연결하는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총연장 40.2km)의 한 부분으로 인천 서구 경서동과 영종도(중구 운복동)를 잇는 바다 위 구간(4.4km)에 건설됐다.
논문에만 존재하던 다리를 짓다
겉보기에는 바다 위에 세워진 평범한 다리로 보이지만 전체 길이가 4km가 넘고, 위층은 6차선 도로, 아래층은 4차선 도로와 철도 복선이 지나는 세계 최대 통행 능력을 자랑한다.
영종대교는 1995년 11월 29일 착공돼 2000년 11월 28일 개통됐다.
영종대교 건설은 논문에만 존재하던 기술을 현실에서 구현해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바로 ‘자정식(自定式) 현수교(懸垂橋)’ 기술이다.
현수교는 일반적으로 대형 구조물(블록)을 세워 케이블을 고정하는 공법을 사용하나 영종대교는 케이블을 다리에 직접 고정하는 공법을 채택했다.
기둥과 연결된 케이블로 교량 스스로를 지탱한다는 의미에서 자정식이란 표현이 사용된다.
산의 협곡에서 흔히 만나는 구름다리를 현수교라고 할 때 대부분 양쪽 큰 바위에 다리 끝을 박아 넣어 케이블을 고정한다.
이렇게 다리 양쪽에 케이블을 박아 넣는 것을 타정식이라고 한다.
자정식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지만 미관상 매우 아름답다.
영종대교는 케이블을 다리에 고정해 앞에서 보면 럭비공 같은 곡선 모양을 띤다.
이를 3차원 자정식이라고 한다.
케이블을 지탱하려면 다리 자체가 무거워야 하고, 제대로 매달려면 힘을 정확하게 분산하는 기술이 중요해 구현이 쉽지 않다.
당시 정부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세계의 첫 관문 역할을 할 인천국제공항을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처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타정식 현수교 현상공모를 했다.
하지만 공정이 까다롭고 공사비를 둘러싼 정부와 시공업체 사이의 이견으로 2년여를 허송세월하는 바람에 공항이 완공돼도 다리를 못 세워 개항이 늦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컸다.
민자사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주관사 현대건설이 탈퇴하는 바람에 삼성건설(현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맡게 된다.
하지만 국내외의 우려가 컸다.
그때만 해도 삼성건설은 아파트는 그런대로 지었지만 토목 분야에서는 변변한 다리 하나 놓지 못하는 업체였다.
2006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버즈 두바이’ 건설 현장을 찾은 이건희 회장. 동아DB
교수들도 성공 가능성 절반이라 말했지만…
영종대교 건설은 기술력을 인정받을 절호의 기회였지만 실패하면 회사가 통째로 망할 수도 있는 리스크가 큰 사업이었다.
‘삼성건설 사사’에는 당시 현장소장을 맡았던 윤만근 전 전무의 증언이 담겨 있다.
‘국내 교량에 관한 한 국보급 최고 전문가’라는 수식이 따라붙은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전 구간을 예산으로 건설하겠다던 정부가 1996년 예산이 부족하다며 인천국제공항에서 한강까지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민자사업으로 변경 추진하겠다고 하면서 현대건설을 리딩사로 한 컨소시엄이 구성돼 삼성건설도 참여했다.
그런데 정부가 1공구까지 민자사업에 포함하자 현대건설이 반발해 탈퇴해 버리는 바람에 갑자기 우리가 리딩사를 맡아 컨소시엄을 결성하게 됐다.
당시 삼성건설은 이 공사의 핵심이자 가장 어려운 구간인 영종대교를 시공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특히 세계 최초로 3차원 형상의 현수교를 어떻게 건설할지 아무런 아이디어도 없었다.
게다가 발주 방법 변경으로 절대적으로 공기(工期)가 부족했으며 현상공모 작품의 기초 설계가 현장 여건에 부적합하다는 것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고 무엇보다 3차원 형상의 케이블을 만들기 어렵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교수, 일본 전문가들에게도 자문해 봤지만 가능성이 절반이라는 답을 들었다.
결국 회사 내 기술본부장을 비롯한 많은 임원이 3차원을 2차원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안을 내 건설교통부(현 국토교통부)와 한국도로공사에 변경 시공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당초 설계는 현상공모 작품이어서 3차원이 왜 불가능한지를 입증해야 했다.
만약 입증이 된다 해도 설계 회사와 공모작을 심의한 교수, 전문가들이 문책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 기술자들은 외국 시공사를 권했다.
삼성의 기술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면 실제로도 가능한 것이니 뛰어들기로 했다.
일종의 오기 같은 것도 강하게 솟았다.
국내에는 기술이 없어서 외국의 도움을 받기로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세계 최고 케이블 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 신일본제철이 일언지하에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일본 삼성 본사의 도움으로 고베 스틸 케이블 기술팀과 접촉했다.
하지만 또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기술 지원은 가능하지만 자기들이 서울에 올 수는 없고 우리 직원들을 고베로 보내라는 거였다.
아쉬운 처지이니 우리가 우물을 팔 수밖에 없었다.
15명으로 팀을 꾸려 비장한 각오로 고베로 갔다.
케이블의 기본부터 배우면서 설계도면 검토와 시공 방법 등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
이들이 18개월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뒤 시공 준비에 들어갔다.
모의 주탑을 땅에 설치하고 단계별로 테스트를 해가면서 습득한 지식을 점검 및 보완해 나갔다.
국내 스키 리프트를 보수하는 기능공들을 모집해 용어와 시공 방법을 숙지시킨 뒤 모의 시공으로 시공 능력을 쌓아갔다.
이렇게 기능 인력을 교육한 다음 실제 케이블 가설 작업에 투입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세계 최초로 성공시켰다.
정말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가슴이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해외에 갈 때마다 영종대교를 지나가면 느끼는 감회가 새롭다.
”
일본 기술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고생
높이 108m의 주탑은 지름 5.1mm의 와이어 6720가닥을 원형으로 겹쳐 만든 케이블과 연결돼 영종대교 현수교 상판을 지지한다.
이 케이블은 승용차 6200대를 들어 올릴 만큼 강하고, 사용된 와이어를 펼쳐 이으면 서울과 부산을 10회나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된다.
무게 또한 1300t이나 되며 교각 사이로는 1만t급 선박이 지나갈 수 있다.
윤 전 전무는 2005년 ‘신동아’ 6월호에 ‘영종대교 바다 위에 신화(神話)를 매달다’는 제목의 심층 기사에서 “일본 사람들의 기술력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는 단 한 줄로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기사에는 당시 케이블 기술을 배우면서 겪었던 서러움이 자세히 담겨있다.
기사의 일부다.
“일본 기술자들은 질문하는 것만 답해 줄 뿐 그 밖의 것은 좀체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고, 관련 사진을 보여주는 데도 인색했다.
한마디로 ‘너희가 알아서 공부하라’는 자세로 일관했다.
사정사정하며 케이블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하면 딱 계약한 만큼만 가르쳐줬다.
돌아서는 기술자에게 구걸하면서 공부했다.
그래도 우리 팀이 워낙 악착같이 매달리니까 나중엔 딱해 보였던지 조금씩 도와주기 시작했다.
”
어렵사리 일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뒤 25m의 현수교 모형 탑을 만들어 시공 실습에 들어갔다고 한다.
실제 다리에 비하면 장난감과 다를 게 없는 모형 탑이었지만 설계 도면대로 연습하면서 현장에서 발생할지 모를 갖가지 문제에 대비해 나갔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리 공사 현장은 갖은 악조건에 놓여 있었다.
바람이 거세고 조수간만의 차가 9m 이상인 바닷길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아야 하는데, 이 지역은 수심이 깊어 물속 암반 위에 교각을 세우기도 힘들었다.
주탑 기초를 해저 암반에 고착하는 과정이 최대 난공사였다.
이 때문에 국내 최초로 로봇이 기초공사를 했다.
결국 무인굴착식 뉴매틱 케이슨(pneumatic caisson) 공법으로 교각 기초공사를 수행했다.
뉴매틱 케이슨 공법은 가물막이(공사 현장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임시로 치는 울타리)가 필요 없고 안정적이어서 주탑 설치 때 이용하는 기초공법이다.
1923년 일본의 관동 대지진 당시 무너지지 않은 구조물 대부분은 이 공법으로 기초공사를 했다.
그러나 이 공법은 심해에서 오랫동안 작업해야 해 작업자가 잠수병을 일으킬 수 있어 막상 잘 이용되지 않는다.
영종대교 현장에서는 앞선 한계를 로봇으로 극복했다.
로봇을 동원해 원격조종 방식으로 굴착한 것이다.
주탑의 기초가 되는 강재 케이슨은 9층짜리 아파트 1개 동 크기(가로 18m, 세로 47m, 높이 26m)로 무게는 2700t에 달한다.
이를 수중에 설치하고 그 안에 압축공기를 넣어 물을 제거한 후 로봇이 지반을 굴착하면서 구조물을 단단한 지반 위에 앉혔다.
이 공법을 적용한 덕분에 현장에서는 부상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루에 8t 트럭 12대 분량의 흙을 굴착할 수 있었으며, 공기(工期)도 3개월이나 단축할 수 있었다.
영종대교에서 새롭게 시도된 다른 기술로는 일괄가설 공법과 3차원 에어 스피닝(air spinning) 공법이 있다.
짧은 기간에 2만7000t이나 되는 현수교 주탑과 트러스 강재 등 거대한 강교를 제작해야 하는데 제작 장소가 부족하고 좁아 공사가 자꾸 지연됐다.
하는 수 없이 육지에서 강교를 제작한 다음 이를 해상 크레인을 이용해 가설했다.
힘들게 만든 어마어마한 크기의 강교를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3000t급 해상 크레인에 매달아 바다로 옮기는 일괄가설 공법을 적용했다.
단 한 번의 시도로 교각 위에 꿰어 맞춰야 하는 만큼 고도의 정밀성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신동아 기사에는 당시 대리부터 소장까지 현장 상황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 담겼다.
김선곤 소장은 “해상 크레인이 무게 1200t, 길이 75m에 달하는 첫 번째 트러스 블록을 들어 올릴 때 정말 가슴이 졸아붙는 것 같았다”고 했다.
블록을 받치기 위해 임시 교량을 설치해 놓았는데 그것이 저렇게 무거운 블록을 제대로 받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크레인이 임시 교량 위에 트러스 블록을 겨우 올리긴 했는데, 자꾸 미끄러지려 하는 것이다.
고생고생해서 만든 트러스 블록이 그냥 바닷속에 빠져버리면 어떻게 되겠나. 다들 피 말리는 심정으로 지켜봤다.
첫 트러스 블록이 제대로 올라앉았을 때의 감격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
에어 스피닝 공법은 스키장의 리프트와 같은 원리로, 공중에서 왕복하면서 와이어를 설치하는 것이다.
영종대교 현수교의 경우 총 1680회를 왕복하며 케이블을 설치했다.
신현양 부장은 “5개월 동안 작업해 199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케이블을 다리에 모두 장착했는데, 지난여름 태풍 때는 배는 못 다녔어도 다리는 끄떡없었다”고 했다.
처음 시도되는 공법이 많고 빠듯한 공기를 맞추려다 보니 현장 근로자들의 노동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주야 교대로 24시간 작업이 계속됐고, 영하 20℃까지 떨어지는 혹한에도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달랑 전기스토브 하나만 두고 언 손을 녹여야 했다.
여름엔 순간 최대풍속이 28m나 되는 강풍이 불어 애를 먹기도 했다.
최영재 대리는 그때 겨울만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착잡하다고 한다.
“밤에 순찰을 하고 있는데 탑정(塔頂)에서 연기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담배 연기인가 싶어서 올라가 봤더니 작업자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고 있었다.
안전 때문에 모닥불을 피우는 것은 물론 담배 한 개비 못 피우게 한 터라 한바탕 호통을 치고 즉시 모닥불을 껐다.
불이 다 꺼져가는 모닥불 통을 들고 내려오는데 코끝이 찡했다.
얼마나 추웠으면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불을 피웠겠나. 살을 에는 추위에 작업자들만 남겨놓고 혼자 내려오려니 스스로가 야박스러웠다.
”
현수교는 대개 바람에 약하다.
상판이 교각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케이블에 의지해 공중에 떠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태풍이 불면 다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게다가 바다는 육지보다 풍속이 20% 빠르고 건물 20층 높이쯤 되는 다리 위는 해수면보다 1.5배 이상 강한 바람이 분다.
영종대교에 부는 바람은 육지에 놓인 다리에서보다 3배나 강하다.
삼성물산은 이 구간이 바람에 철저하게 버틸 수 있게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서울대 연구진과 현수교 모델을 이용해 풍동(風洞) 실험을 해 초속 65m의 강풍에도 100년 이상 견뎌낼 수 있게 설계했다.
근처를 지나는 태풍의 최대속도가 초속 30m를 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영종대교는 이변이 없는 한 적어도 100년 동안은 안전하다.
또한 국내 최초로 실제 교량을 이용한 진동 실험을 통해 바람에 대한 안전성을 확인받았다.
아무리 바람에 견고하게 건설해도 유지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
모든 구조물은 조금씩 흔들리게 돼 있으며, 구조물은 공진 때문에 피로가 누적될 경우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교량은 연결 부위에 피로현상이 집중될 수 있어 유지관리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수대교도 연결 부위의 용접 시공이 부실해 누적되는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15년 만에 붕괴했다.
삼성물산은 다리의 피로현상을 덜기 위해 원래 계획한 12㎜ 강상판 대신 14㎜ 제품을 사용했다.
항아리 모양의 트러스가 압축에 잘 견디도록 트러스 중간에는 수직재를 넣었다.
영종대교는 차량보다 무거운 전철의 통행에 기준을 맞춰 행거와 케이블을 연결하는 밴드 지점에 피로가 누적되지 않는 한 매우 안전하다.
철사는 비를 맞으면 녹슬기 마련인데 이를 방치하면 케이블의 안전성이 떨어진다.
삼성물산은 철사로 된 현수교 케이블에 녹슬지 않도록 케이블 안에 건조한 바람을 계속 불어넣어 습기를 없애는 장치를 사용했다.
영종대교의 성공은 해외에서 추진되는 굵직굵직한 토목 사업에도 뛰어들 수 있는 활로를 마련했다.
실제로 영종대교는 2002년 7월 세계적인 엔지니어링 잡지인 ENR 커버스토리에 소개됐고, 그해 9월 국내 토목 구조물로는 처음으로 일본 최고 귄위상인 다나카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일본 토목학회에서 매년 전 세계에서 준공된 교량 및 관련 구조물 가운데 계획, 설계, 시공, 미관 등에 대해 특색 있다고 인정되는 구조물을 선정해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삼성물산의 수상은 일본 국외 교량으로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국내 교량으로는 최초였다.
건설에도 핵심 인재 영입
한편 삼성물산은 영종대교에 이어 영종도와 송도국제도시를 연결하는 인천대교도 시공(2005년 6월 착공 2009년 10월 완공)한다.
인천대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긴(총연장 18.38km) 6차선 대로다.
이상대 전 부회장은 “고베 제강 기술자들을 직접 한국으로 불러와 작업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영종대교가 현수교로 건설된 반면 인천대교는 주탑을 세운 뒤 케이블로 상판을 지지하는 사장교로 설계했다.
교량 가운데 주탑을 세우고 강선으로 지지하는 공법인데 주탑 높이(238.5m)가 여의도 63빌딩(239m)에 육박하는 데다 강선이라는 게 철사를 가닥가닥 꼬아 올리는 거라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송도 앞바다는 풍력이 세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바람이 심하고 안개가 잦은 데다 하루 두 번씩 바뀌는 조수간만 차가 심해 밀물과 썰물 때는 유속이 초당 1.27m에 달해 휩쓸리면 빠져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천만한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에 무사고로 건설했다.
인천대교의 3분의 1 정도 길이인 서해대교만 해도 72개월이 걸렸는데 말이다.
그만큼 최첨단 신공법과 신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무엇보다 이건희 회장 인맥으로 일본의 고베 제강에서 유능한 교량 기술자들을 직접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
이후 외국의 핵심 인재 영입도 한결 수월해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일본의 이치노헤 히데오 전 부사장과 미국의 아메드 압둘라자크 전 부사장이다.
두 사람은 영입된 이후 ‘이치노헤 팀’ ‘아메드 팀’으로 이름을 딴 별도 조직이 있을 정도로 삼성물산 건설 부문을 대표한 외국인 대표 전문가였다고 한다.
이치노헤 전 부사장은 초고층 건물, 하이테크 공장 건설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로 종로 탑클라우드를 설계한 사람이다.
1990년대 초 일본 다이세이 건설에서 설계와 엔지니어링 업무를 맡아 교류하다 1995년 입사했는데 이후 구조설계팀장을 맡으며 인천국제공항 교통센터, 삼성전자 반도체 LCD 공장 등 대형 프로젝트의 구조 설계를 도맡았다.
아메드 압둘라자크 전 삼성물산 부사장. 그는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를 비롯해 중국 상하이의 진마오 타워, 한국의 타워팰리스 3차 등을 설계했다.
동아DB
삼성의 고층 빌딩 사업을 이끈 아메드 전 부사장은 초고층 건물 설계로 유명한 시카고 ‘솜(SOM)’에서 17년간 일했고, 비(非)미국계로는 처음으로 미국 토목공학회 초고층학회장을 지낸 초고층계의 거장이다.
삼성에 영입된 이후 세계 최고층 빌딩인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를 비롯해 중국 상하이의 진마오 타워(88층), 한국의 타워팰리스 3차(69층) 등을 설계했다.
다시 이 전 부회장 증언이다.
“두 분은 회장님이 사장보다 월급 많이 줄 수 있는 인재를 데려오라고 하셔서 영입된 분들인데, 그들이 기여한 것을 돈으로 따질 수가 없다.
이치노헤 전 부사장은 외국인 기술자 중 처음으로 삼성인상 1호를 탄 사람이다.
이들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완공을 평균 3개월씩 앞당겼다.
한 달에 최소 7조~10조 원을 아꼈다고 본다면 20조~30조 원을 아낀 분이다.
공기를 당기니 제품도 남보다 먼저 출시할 수 있었고, 칩 가격도 낮출 수 있었다.
회장님이 말한 ‘한 사람의 천재가 몇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건설에서는 토질도 중요하다.
기계로 살핀다고 하지만 기계만 갖고는 알 수 없는 게 땅속이다.
자고 있는 순간에도 지구가 움직이고 있으니 땅이 움직이고 건물들도 움직인다.
그래서 토질 기술자, 전문가가 매우 중요하다.
이 분야에도 회장님이 ‘세계적인 기술자를 영입하라’고 해서 영국인 인재들을 데려왔다.
회장님은 ‘한국의 감리는 발주처 사정에 따라 감리가 그때그때 이뤄지고 있다.
제3자를 데려다가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셔서 영국인들을 데려와 맡겼다.
‘공사중단권’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으로 부여했다.
삼성물산은 중국 상하이의 진마오 타워 건설에 참여했다.
88층 높이의 진마오 타워는 지역 명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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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중단권은 감리를 맡은 사람들이 ‘이 공정, 이 품질로는 안 된다’고 판단하면 공사를 중단할 수 있는 권리다.
회장님 아이디어였다.
현장 소장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품질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CM(Construction Managemen)’이라는 제도도 도입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 없었다.
공사 손익부터 시작해 규모와 진행, 품질, 준공까지 프로젝트 시작부터 준공까지 모든 걸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관리해 나가는 것이다.
회장님께서 ‘우리도 그렇고 발주자도 그렇고 동(東)으로 가는지 서(西)로 가는 지도 모르고 무조건 제대로 지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다.
종합적으로 처음부터 하라’고 해서 도입했다.
특히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대부분 돌관(突貫)공사(예정된 공사 일정을 맞추거나 단축하기 위해 장비와 인원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시행하는 공사)다.
칩 라이프사이클이 짧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투자는 최대 조 단위로 들어가니 철저한 품질관리 즉 CM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세계 최고 CM 회사인 미국 터너(Turner)에 관련 부분을 맡겼다.
터너는 나중에 버즈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 CM도 맡았다.
”
삼성물산은 세계 초고층 빌딩 역사에 여러 기록을 갖고 있다.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88층)를 시작으로 필리핀 최고층 건물인 피비콤 타워(55층), 태국 최고층 건물인 랑산 타워(68층), 한국 타워팰리스 3차(69층), 대만 타이페이 세계금융센터(101층)가 포함된다.
세계 최고층 빌딩인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가운데). 삼성물산
최고층 빌딩 역사 새로 쓴 부르즈 할리파
단연 대표 작품은 UAE 두바이의 신도시 중심부에 들어선 세계 최고층(163층·830m) 빌딩 부르즈 할리파다.
삼성물산이 공사를 수주했을 당시엔 이름이 ‘버즈 두바이’였으나 두바이가 모라토리엄을 맞고 아부다비로부터 32조 원을 지원받게 되면서 아부다비 국왕이자 UAE 연방 대통령인 할리파 빈 자예드 알나얀의 이름을 따서 부르즈 할리파로 바뀌었다.
높이가 여의도 63빌딩(249m)과 남산(262m)의 4배가량으로 서울에서 가장 높은 산인 북한산(836m)과 비슷하다.
연면적은 약 50만㎡로 삼성동 코엑스몰(11만9000㎡)의 4배, 여의도 공원(21만㎡)의 2.5배, 잠실종합운동장의 56배에 달한다.
현재까지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기자도 몇 년 전 이곳을 찾은 적이 있는데 건물 앞에 삼성 로고가 선명하고 건설에 참여한 한국 직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어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삼성물산은 세계 유수 건설사들과의 피 튀기는 경합 끝에 2004년 12월 이 공사를 8억8000만 달러(당시 9000억 원대)에 수주하는데 ‘삼성건설 사사’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2004년 7월 입찰에 참여해 세계 유수 건설사들이 구성한 7개 그룹과 경쟁을 벌였다.
최종 경쟁을 벌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호주 건설사들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두바이 등지에서 건설 사업을 해온 업체여서 만만치 않았다.
삼성물산은 그야말로 사즉필생으로 덤볐다.
경쟁업체들이 가격 낮추기 경쟁에 몰두한 반면 기술 심사에 승부를 걸었다.
전략은 적중했다.
프레젠테이션을 본 심사위원들이 ‘원더풀’을 연발한 것.”
얼마 후인 2004년 12월 1일 현지에 있던 김계호 당시 전무는 “발주처 회장이 초대했으니 직원 몇 사람과 함께 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의 말이다.
“긍정적인 신호라는 직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 자리에서 발주처인 알라바 이마르사 회장은 ‘삼성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했고 참석자들은 모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짜릿함을 느꼈다.
거의 1년여 넘게 초고층 실적이 있는 세계 30여 개 건설회사들의 피 말리는 수주전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
당시 요인은 여러 가지였지만 무엇보다 삼성이라는 브랜드의 힘이 결정적이었다고 이 전 부회장은 말한다
“발주처인 UAE 정부 소속 부동산 디벨로퍼 회사 에미르사 알리바 회장, 메트루시 사장이 세계적 브랜드인 삼성과 해야 자기들 평판도 올라가고 건물 가치가 올라간다고 했다.
”
한편 이 전 부회장은 당초 이 프로젝트에 대해 보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실패에 대한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경제적으로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의심도 있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로 연간 10조 원을 버는 데 아무리 세계 최고 빌딩을 세운다고 해도 많아야 1조 원 정도 벌 수 있을까.
건설은 ‘경험 산업’이라고 했다.
당시 세계 최고 빌딩(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빌딩)을 지어보긴 했는데 높이 500m에서 700m, 800m로 가는 건 다른 차원이다.
이전의 경험이란 건 그저 참고만 될 뿐이다.
풍압, 기압도 따져봐야 하고 특히 수직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빌딩이 조금만 삐딱해도 쓰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콘크리트를 땅에서 700~800m 높이까지 쌓아 올려야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강도를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쌓아 올릴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잘못하다 중간에 막히면 전부 뜯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데 너무 리스크가 크지 않겠나, 하여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물론 엄청난 도전이자 기회였다.
특히 사장을 맡고 있던 입장에서 세계의 랜드마크가 될 현장 공사를 수주한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다.
하지만 까딱 잘못했다가는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완전히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다.
일본도 초고층 빌딩을 세울 때 건물 주인이 바뀌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대표적 예다.
부르즈 할리파도 두바이가 부도 나는 바람에 아랍에미리트 쪽에서 도와줘서 다시 설 수 있었다.
”
주저하던 그를 북돋운 사람들은 부하 직원들이었다고 한다.
“한번 해보자는 열망이 대단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제 방에 모여서 ‘해야 한다.
하게 해달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꺾겠나. 공부도 참 많이 했다.
마지막에 구조조정위원회(비서실)에서 최종 결정을 하는데 역시 반대와 걱정이 많았다.
그때 회장님이 최종적으로 ‘해보자’고 하셔서 수주전에 들어갔고 마침내 공사를 따냈다.
하지만 바깥에서는 국토교통부까지 ‘삼성이 제대로 해 낼지 모르겠다’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
실제로 건설 과정에서 맞닥뜨린 도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우선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온 근로자의 문화와 언어 차이에 따른 인력 관리가 쉽지 않았다.
현장소장을 지낸 김경준 전 부사장은 세계 건축업계에서 손꼽히는 초고층 건물 전문가로 통한다.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현장소장으로도 일했던 그는 필리핀 최고층 빌딩 피비콤 타워 현장소장을 거쳐 부르즈 할리파 건설을 총괄했다.
다음은 사사에 소개된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부르즈 할리파 수주는 어떻게 준비했나.
“가장 역점을 두고 준비한 것이 기술적 능력 즉 ‘테크니컬 프로포절’이었다.
그다음 우리가 제안한 공법들이 실질적으로 공사 수행에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공기라든지 공사비에 대해 자료를 상세하게 만들어 제출했다.
7개 그룹이 경쟁했는데 우리가 제시한 기술 제안이 가장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금액이 좀 높았는데도 발주처에서는 우리를 선정했다.
오히려 우리가 요구했던 리스크 매니지먼트에 대한 여러 가지 제안 사항을 다 받아주었다.
심지어 제시했던 공기보다 한 달을 더 주면서 여유를 가지고 품질을 지켜서 공사해 달라고 할 정도로 우리를 신뢰했다.
”
공사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었다면.
“공사 착수 이전에 굉장히 디테일하게 준비했다.
장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이며, 조직은 어떻게 구성하고, 공사 초기에는 어떻게 관리를 하고 하는 것 들을 디테일하게 1년 이상 준비했다.
공사 착수 이후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두바이 건설 시장이 급팽창하다 보니 자원을 조달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기술적 문제보다는 인력을 조달하고 자재를 적기에 투입하는 데에 애로가 많았던 것이다.
‘1개 층당 3일’ 공정을 달성하려고 하면 자재가 제때 들어와야 되는데 그 부분이 제일 어려웠다.
우리가 현장에 종사하는 직원들 국적을 조사했더니 총 40개 국가였다.
그야말로 다국적군이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려면 무엇보다 의사소통이 중요했다.
매일 오전 차를 함께 마시면서 미팅을 했고 그날 할 일, 발주처와 해결할 일, 팀별 협의 사항 등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며 하루 일과를 정했다.
주 단위로 주간 공정, 월 단위로 월간 공정을 점검했다.
또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성장한 사람 사이에 문화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썼다.
매달 한 번씩 팀워크 파티를 열었다.
한국의 호프데이처럼 맥주를 마시면서 팀원뿐 아니라 발주처, 감독관과 서로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무슬림 기능공들은 라마단 기간에는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 1시에 일을 끝내야 했다.
특히 이 기간에 생산성 관리를 신경 써서 해야 했다.
”
모든 일을 업의 개념에서 출발하라
이상대 전 부회장은 “사막이라는 현장이 도전 그 자체였다”고 했다.
“모래 먼지와 돌풍은 늘 복병이었다.
최고층 상부에서 작업 중에 거센 바람이 불거나 모래바람으로 시야가 흐려지면 목숨이 위험한 위태로운 순간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첨탑을 올리는 작업이 가장 고난도였다.
주변에 초속 55m의 강풍이 불 때도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서 이렇게 강한 바람과 싸우며 첨탑을 올리는 게 가장 어려운 순간이었다.
”
초고층 빌딩 건설은 그야말로 반도체와는 또 다른 레벨의 최첨단 기술의 총집합체다.
부르즈 할리파 건설에 최고층, 최다층, 최고속 엘리베이터(124층 전망대까지 45초) 기술이 동원됐고, 이외에도 최고 높이까지 콘크리트를 직접 올린 것처럼 다양한 세계 기록이 있다.
삼성은 레미콘 차량 45대 분량인 650t 콘크리트를 126층까지 배관을 통해 올렸는데 쉽게 말하면 해수면에서 남산 서울타워 꼭대기까지 콘크리트를 올린 셈이다.
이처럼 배관을 통해 콘크리트를 수직으로 601.7m까지 올린 기록은 세계신기록이었다.
다시 사사를 인용한다.
‘160층 이상 초고층을 지으려면 무엇보다 콘크리트가 단단해야 한다.
현장에서 사용된 콘크리트 강도는 주사위만 한 크기가 리히터 규모 6.0수준 강진에도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층에 평균 3일씩 걸리는 공기를 맞추려면 콘크리트를 빨리 굳게 하는 기술도 요했다.
보통 하루가 걸리는 양생 시간을 10시간으로 단축했다.
마지막으로 점성이 높은 고강도 콘크리트를 지상에서 위로 쏘아 올리려면 처음에는 물처럼 부드럽게 올라가다가 마지막 시공 단계에서 단단하게 굳히는 기술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콘크리트 자체 물성을 바꾸는 첨단기술을 개발했다.
콘크리트를 부어 넣는, 타설에 필요한 거푸집도 한 개 층 공사가 끝나면 10t급 유압잭 200개를 이용해 자동으로 다음 층으로 끌어올리는 기술이 적용됐다.
거푸집을 뜯어내고 다음 층으로 올려 다시 조립하는 이전 방식에 비해 시간이 훨씬 절약됐는데 계산해 보니 한 개 층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자동이동거푸집(ACSF) 시스템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
한편 초고층 건물은 ‘수직도’를 항상 직각이 되게 해야 한다.
지상에서 1도만 틀어져도 800m 상공에선 14m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건물을 올릴 때마다 이 시공 중 발생하는 미세한 움직임과 하중의 변화를 감지해 수직도를 측정하는 게 중요한데 이를 위해 최첨단 통신 위성기술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부르즈 할리파는 700여 개 센서를 건물 내부에 설치하고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추적시스템(GPS)을 활용해 건물의 수직 변위와 수평 변위의 오차를 점검하는 측량 기법을 세계 최초로 적용했다.
여기에 막대한 자재와 근로자들을 타워크레인과 가설 엘리베이터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양중 관리시스템’이나 지상에서 기둥과 옹벽의 철근을 먼저 조립하고 이를 타워크레인으로 끌어올리는 철근 조립 공법도 도입됐다고 사사는 전한다.
다시 이 전 부회장의 증언이다.
“공정 자체가 6만 개에 달했던 부르즈 할리파는 초고층 최첨단 건설 기술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회장님도 남다른 애착이 있어서 2006년 10월에는 미국과 유럽 출장을 마친 뒤 이재용 당시 상무님과 함께 현장에 직접 오셨다.
현장에 있었는데 큰 힘이 됐다.
‘삼성과 우리 경제의 진정한 버팀목’이라고 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축적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다.
계획된 공기 내에 마친 것은 물론 흑자도 냈다.
제일 중요했던 건 회장님이 소신껏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셨다는 사실이다.
회장님은 한번 믿어주면 끝까지 믿어주는 분이다.
현장소장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대부분의 건설 현장은 소장이 자주 바뀐다.
기술적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빨리 공정을 진행할 수 있는 공정기술자가 들어가는 등 상황이 바뀌면서 소장이 바뀌게 된다.
하지만 회장님은 끝까지 애정을 갖고 믿어주되 중간중간 체크하고 현장까지 와 신입 사원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쳐주고 힘을 주셨다.
”
“회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김경준 전 부사장은 사사에서 이건희 회장이 어떤 경영자였느냐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경영하는 회사가 잘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지만 그보다 깊숙한 마음속에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여와 공헌을 깊이 깔고 계셨다.
그걸 사명으로 생각한 분이었다.
경영에서는 항상 모든 일을 ‘업의 개념’이라는 근본에서 출발했고 생각은 미래를 향하되 현장에 기초를 두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했다.
무슨 일이든 현장에서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현장에서의 적용과 추진이 가능한 것인지를 직접 확인했다.
다들 선의로 한다고 해도 때로는 현장을 모르고 한 일도 있지 않겠나. 회장님은 선의를 일단 믿어주되 현장을 모르고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되새기게 했던 적이 많았다.
냉정하면서도 혁명적이고 담대한 분이었다.
미래에 어떤 사업에 투자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구상하고 감내해야 될 리스크는 무엇인지 분석한 뒤 구체적인 해답을 갖고 과감하게 실행한 분이었다는 점에서 위대한 경영자 반열에 오를 분이다.
한번 믿으면 대폭적인 권한 위임을 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보상해 주니 다들 소신껏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자부심을 가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저 역시 ‘회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것을 모든 경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말씀을 새기고 또 새기다 보면 답이 떠올랐다.
그런 점에서 문제 해결의 ‘마스터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사장보다 월급 많이 받을 인재 데려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