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자중지란’ 국힘, 요원해진 보수 재건] 보수정당 비주류 시대, 출구는…
● 국민의힘, 패배 반성도 모자랄 판에 선전했다?
● 대선 패배 한 축, 진보진영으로 기울어진 시민사회
● 시민사회 육성하는 진보…군중 동원 용도로 쓰는 보수
● 비주류 된 보수, 과거 민주당의 시민사회 전략 따라야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이 나온다.
김문수 전 국민의힘 대선후보 이야기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탄핵, 후보 교체 사태 등 온갖 악재가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치러진 21대 대선이었다.
그럼에도 4할이 넘는 유권자의 선택을 얻었다.
그의 최종 득표율은 41.15%. ‘내란 세력 심판’이 선거의 핵심 구도 중 하나였다는 걸 감안하면 결코 낮은 득표율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게 문제다.
당 안팎에서 “의외로 선전했다”라는 이야기가 나온 사실 말이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나. 소속 대통령 두 명이 연이어 탄핵당했다.
총선에서도 두 번 연속(21·22대) 상대에게 180석에 달하는 의석을 내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7번의 전국 단위 선거에서 2번 이기고 5번 졌다.
대선과 지방선거를 모두 이긴 2022년을 제외하면 국민의힘과 그 전신 정당이 선거에서 이긴 해는 없다.
구성원 모두가 패배의 충격에 잠겨 자기반성을 해도 모자랄 마당에 선방했다는 식의 분위기가 감지된다.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이 얼마나 ‘만성 패배’의 늪에 빠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보 우위 공고히 하는 시민사회
국민의힘은 윤석열 한 사람 때문에 진 게 아니다.
물론 그의 느닷없는 비상계엄으로 정권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 헌납한 건 틀림없다.
하지만 윤 정부 이전부터 국민의힘은 한국 정치 비주류로 전락한 상태였다.
과거 진보진영은 모든 자원을 긁어모아야만 보수정당과 가까스로 경쟁할 수 있었다.
호남 인구가 영남의 절반밖에 되지 않아서다.
지역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는 상황에서 지형적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 진보는 김종필·정몽준·안철수 등 중도·보수 성향의 정치인과 단일화하고, 충청 표심까지 끌어와야 했다.
이제는 반대다.
지역주의는 옅어졌고, 세대 효과는 강화됐다.
인구수가 많은 4050세대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는 민주당이 선거에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도권이라는 지역 요인, 4050이라는 세대 요인과 함께 진보 우위를 공고히 하는 요인이 있다.
바로 시민사회다.
21대 대선 선거운동 기간을 복기해 보자. 선거 막판 판세를 뒤흔든 건 단연 이준석 전 개혁신당 대선후보의 ‘젓가락 발언’이다.
5월 27일 마지막 TV 토론에서 그가 한 발언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온라인에서도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물론 여러 시민단체가 그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준석 전 후보가 TV 토론에서 해당 발언을 전한 것은 대단히 부적절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른바 ‘혐오 정치’를 규탄하며 그를 의원 제명하자고 한 시민단체들의 태도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은 있다.
해당 발언의 ‘원저자’에 대해 일언반구가 없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대통령 아들의 관련 발언은 20대 대선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논란이 됐었다.
당시 권인숙 전 민주당 의원은 이를 두고 “안타깝지만 평범하기도 하다”고 평했고, 여성단체들도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만일 보수진영 후보의 자녀가 그랬어도 같은 반응이었을까.
시민단체들의 비판은 우리 편이냐 아니냐에 따라 그 온도가 확연하게 달라진다.
주목해야 할 건 시민단체들의 정치 편향성이나 ‘내로남불’이 아니다.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시민사회가 진보진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풀뿌리 민주주의 핵심 도구로 부상한 시민사회
시민단체는 권력과 시장을 감시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땐 이런 기능이 빛을 발하며 국민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시민에게 시민단체란 정경유착으로 환란을 초래한 정치권과 기업을 감시하는 존재였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는 시민사회가 주도한 낙천·낙선 운동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성 정당이 ‘좋은 후보 배출’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유권자들의 불만이 표출됐고, 이는 시민단체를 적극 따르는 행위로 이어졌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2002년 45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주요 기관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시민단체 신뢰도는 77%로 조사 대상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같은 조사에서 정부 신뢰도는 25%, 국회 신뢰도는 11%에 불과했다.
오늘날 상황은 바뀌었다.
한국행정연구원이 매년 실시하는 ‘사회통합실태조사’를 보면 시민단체는 그들이 감시하는 대상보다 신뢰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민단체를 ‘정부 예산 타 먹는 도둑’으로 여기는 여론마저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역할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미국 경영학자 테오도르 레빗은 1970년대에 이미 사회가 다변화하고 복잡해지면서 정부가 모든 영역을 관장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와 시장만으로는 사회 유지·발전에 빈틈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봤다.
정부든 기업이든 조직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필연적 한계는 있게 마련이다.
이 사각지대를 메우는 게 제3섹터(The Third Sector), 즉 시민사회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요즘 시민단체는 단순히 비판자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정부와 함께 정책을 계획하고 집행한다.
이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변호사가 당선되며 더욱 강화됐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이기도 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정책을 집행·평가하는 민관 거버넌스를 강조했다.
그가 서울시장으로 재임한 10년 동안 시민단체들은 시정의 감시자보단 파트너에 가까웠다.
시는 교육·복지·문화 등 지역의 각종 사업을 이들에게 위탁했다.
이후로도 진보진영의 많은 정치인이 시민사회를 꾸준히 지원하고 육성했다.
정치적 우군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시민사회를 풀뿌리 민주주의의 핵심 도구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를 통해 의제를 설정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식이다.
정치, 노동뿐 아니라 교육, 환경, 소비자, 여성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시민단체들은 ‘시민의 대리자’로 활동한다.
개인들은 평소 시민단체의 효용성을 체감하기 어렵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는 이들처럼 든든한 지원군도 없다.
그동안 군 장병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때나, 끔찍한 아동학대가 일어났을 때 누가 전면에 섰는지를 보면 답이 나온다.
진보진영 시민단체들은 오랜 역사만큼 다양하고 너른 범위에 분포해 있으며 네트워크도 탄탄하다.
반면 보수진영은 시민사회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고, 수도 적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정치적이고 이념적으로 협소하며 강경하다.
2000년대 중반 등장해 보수진영 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나 국민적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한 뉴라이트가 대표적 예다.
뉴라이트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진보진영의 연속 집권에 위기감을 느낀, 이른바 전향한 86세대 인사들이 주축이 됐다.
반북·반공 중심의 구보수 세력(올드라이트)과 차별화를 꾀했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론, 대안 교과서 도입 등 이념적으로 강경한 태도를 보인 탓에 외연 확장에 실패했다.
시민단체 정치하는엄마들 관계자들이 5월 28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민원실 앞에서 ‘대선 TV토론 이준석 성범죄 발언 단체 고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뉴라이트 논란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걸핏하면 대두됐는데, 이는 보수 시민사회가 그 시절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대선 직전 불거진 ‘리박스쿨’ 논란 역시 보수진영 시민사회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어떻게 리박스쿨과 같이 정치색 강한 단체에 아이들 교육을 맡길 수 있냐고 하겠지만, 아마 보수정권으로서는 이들을 배제하면 사업을 맡길, 정권에 우호적인 단체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최근 보수진영에선 극우 성향 유튜버가 시민단체 역할을 대체하는 경향도 보인다.
극우 유튜브 채널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보수 지지층이 기성 언론에 등을 돌리면서 대안 세력으로 부상했다.
때마침 우리나라에서 유튜브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수많은 구독자로부터 얻는 광고비·후원금 등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윤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를 주도한 것도 이들이었다.
보수 정치인들이 극우 유튜버와 전광훈 목사 등 극우 성향 종교인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건, 보수 시민사회에서 이들 말고는 조직된 집단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에서 시민사회란 군중 동원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듯하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과거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를 압박해 보수 단체에 수십억 원대 자금을 지원, 관제 데모를 유도했다.
우리가 태극기부대로 기억하는 바로 그들이다.
‘화이트리스트’로 불리는 이 사건은 문재인 정부 당시 적폐 청산의 표적이 됐다.
보수진영에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시민단체마저 이 시기에 상당수 와해됐다.
5월 31일 정준호 당시 더불어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신속대응단 부단장(맨 왼쪽)과 소속 의원들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는 리박스쿨을 항의 방문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비주류 된 보수, 과거 민주당 전략 따라야
시민사회의 역할은 단지 여론을 형성하고 사람들을 조직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정치권 밖에서 정당에 의제와 논리를 제공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90개 개혁 과제를 제안한 참여연대처럼, 민간 싱크탱크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 한국에서 몇몇 시민단체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아랫단에서 드러나는 역량 차이도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지금도 진보진영 곳곳에선 소규모 공부 모임에서부터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토론회까지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보수진영도 이런 활동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대개는 지속적이지 못하고 그 숫자도 진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
시민단체는 인재를 양성하는 사관학교로서도 기능한다.
민주당은 과거 86세대 운동권에서 정치인 후보군을 영입했다.
인재풀이 바닥난 뒤에는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대체했다.
정치권 주변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이들은 형식상 신인일 뿐 기성 정치인과 진배없다.
같은 법조인, 교수라고 하더라도 시민사회 활동을 통해 훈련된 인물과 어쩌다 지도부 눈에 띄어 깜짝 영입된 인물 사이에는 정무 감각, 전투력 등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이 의제 설정과 인물 경쟁력 측면에서 민주당에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시민사회로부터 인물·정책적 지원을 받는 민주당과 달리 국민의힘은 그런 지원을 기대할 만한 후방 세력이 없다.
기반이 취약하니 위기를 겪을 때마다 자력으로 극복하기보다 외부에서 사람을 데려와 이미지를 바꾸려고만 한다.
국민의힘이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이던 윤석열을 대선후보로 내세우고, 대통령이 된 그가 뜬금없이 ‘홍범도 흉상 이전’이나 ‘수능 킬러문항 폐지’ 같은 정책을 추진했던 건, 인물·정책적 토대가 빈약한 국민의힘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니 친윤 세력이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그 사달을 경험하고서도 ‘한덕수 차출론’을 띄운 것 아니겠는가.
보수정당은 시민단체라는 개념 자체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편 혹은 적으로만 생각해서다.
시민사회의 역할과 기능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 정권을 잡더라도 이쪽을 키우기보다 제재하고 억누르는 쪽으로 정책을 폈다.
그런 무관심의 역사가 누적되며 오늘날 진보 우위의 정치 구도를 형성했다.
보수진영이 정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시절에는 가만히 있어도 인재들이 알아서 모였다.
그런 시절은 넉넉히 잡아도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보수정당은 이제 수도권도 험지라며 기피하는 정당이 됐다.
명망 있는 인물들이 민주당으로 가면 민주당으로 갔지, 이런 정당에 오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은 반대로 과거 민주당이 비주류였던 시절 취했던 전략을 따라야 한다.
시민사회를 키우고 ‘풀뿌리’ 기반을 다지는 것밖엔 없다.
‘만성 패배’ 늪에 빠진 국민의힘, 시민사회부터 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