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위대한 지도자인가] 싱가포르가 ‘번영의 모범국’이 된 이유
● 싱가포르, 현대 국가의 대표적 성공 사례
● 일본군이 싱가포르 점령했을 때 19세 청년
● 종전 후 영국 치하에 친영국 정당 맞서 인민행동당 창당
● 1959년 7월, 35세에 싱가포르 최초의 국무총리로
● 140여 년 식민 기간과 지리적 여건상 독립 어렵던 싱가포르
● 31년간 연임하면서 강력한 리더십으로 환골탈태 이뤄
● 선진국 제도 철저히 분석해 싱가포르에 맞게 변용
영국 케임브리지대 로스쿨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20대 후반의 리콴유. 위키피디아
챗GPT에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명멸했다.
역대 도시국가 중 가장 번창하고 의미 있는 5개 도시국가를 선정해 달라”라고 요청했더니, 5대 도시국가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Athens),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Sparta), 고대 페니키아계의 카르타고(Carthage), 중세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ice), 그리고 현대의 도시국가 싱가포르(Singapore)”라는 답변을 받았다.
  싱가포르 하면 누구나 ‘도시국가’라 규정하고, 규모나 역사의 ‘특수성’을 지적하며 지나치기 일쑤다.
인류 문명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나 상징성 면에서 앞서 언급된 다른 4개의 고대 도시국가들과 구별되나, 21세기 기준으로 본다면 싱가포르는 다민족·다문화 사회, 세계적 금융·물류 중심지, 높은 삶의 질과 혁신적 정책 등에서 현대 국가의 대표적 성공 사례임이 분명하다.
  ‘규모가 작다’ ‘도시국가다’ 하는 편견을 넘어, 싱가포르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번영의 모범 국가가 된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리콴유(李光耀·Lee Kuan Yew·1923~2015) 총리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한층 엄밀한 성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싱가포르의 성공 스토리와 리콴유의 탁월한 리더십에는 세계의 모든 국가와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지혜의 교훈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정치인 리콴유의 싱가포르 건국 이야기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싱가포르는 지도상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대표인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Raffles)이 발견하고 식민지화할 당시 싱가포르는 어부 200여 명이 살던 어촌(당시 테마섹(Temasek)으로 불렸음)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싱가포르를 자유항으로 만들자 다양한 민족이 모여들었다.
싱가포르는 1824년 정식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됐고, 이후 영국이 자유항 정책을 펼쳐 국제무역 중심지로 성장해 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1942년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며 ‘동아시아의 지브롤터’라 불리던 영국의 요새가 무너지고, 싱가포르는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했을 때 리콴유는 19세 청년이었다.
식민주의의 현실과 권위주의의 위협을 체험하면서 리콴유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일본어를 배워 일본 행정기관에서 통역사로 일했다.
자서전에서 “일본인들이 체제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내부에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들은 냉혹했지만 체계적이었다”고 회상하며 “싱가포르가 자주적이고 효율적인 나라가 돼야 했다”라는 신념을 확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 식민지로 복귀했다.
리콴유의 정치인으로서의 첫 경험은 1951년 영국 식민지 시절 친영국적 정당인 진보당(Progressive Party)의 후보로 나선 그의 상사 존 레이콕(John Laycock)을 위해 선거운동원으로 뛴 것이었다.
중국인 유권자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진보당에는 희망이 없었기에 1954년 11월 21일 리콴유는 “맥주 마시는 부르주아들”이라고 그가 지칭하던, 영어를 배운 사람들과 함께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PAP)을 결성했다.
이 당은 친공산주의적 무역 노조와 정략적 연계를 통해 만들어졌다.
이는 영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친공산주의자 다수의 지지가 필요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가리기 위한 지도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59년 6월 리콴유 싱카폴 총리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지지자들이 그를 업고 거리로 향하고 있다.
 Gettyimage 인민행동당 당수인 리콴유는 1955년 선거에 출마·당선해 의회에 진출했다.
1957년 친공산주의자들이 가짜 당원들을 동원해 당권을 장악하자 리콴유는 인민행동당에서 위상이 흔들리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됐다.
다행스럽게도 친공산주의자들이 대거 구속되자 리콴유는 사무총장으로 복직했다.
  1959년 영국에서 자치권을 획득해 싱가포르 자치정부가 구성되고, 그해 7월 1일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51개 의석 중 43개 의석을 차지함에 따라 35세의 젊은 지도자 리콴유가 싱가포르 최초의 국무총리가 됐다.
그러나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함에 따라 교육, 주거, 실업 등 많은 난제에 부딪히게 된다.
  1961년에 인민행동당은 두 번의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데 따른 당원들의 탈당, 좌파의 노동운동에 직면했다.
말라야 연방의 총리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이 1961년에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바(Sabah), 사라왁(Sarawak) 간의 연방을 제안하고, 70%가 찬성한 1962년 9월 1일의 국민 투표 결과에 따라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됐다.
하지만 이 연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64년 7월과 9월에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무력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리콴유는 연방에 계속 머물기 위한 타협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1965년 8월 7일, 말레이시아와의 분리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1826년부터 140여 년간 식민 통치를 받고, 1965년 8월에야 완전한 독립을 이룩했으나 바다에 떠 있는 외로운 섬 신세가 된 싱가포르는 독립국가가 됐지만 경제적으로 생존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대외적으로는 싱가포르를 탈퇴시킨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거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가 있었다.
또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간 영토분쟁으로 싱가포르가 위협을 받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전쟁 여파로 라오스와 캄보디아 등이 공산화되면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도 공산당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도 싱가포르의 장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리콴유는 1959년부터 1990년까지 31년 동안 총리를 연임하면서 자신만의 원대한 구상과 균형 잡힌 국가전략과 정책 그리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싱가포르를 환골탈태시켰다.
리콴유는 독서를 즐겨 했다.
그가 추진한 온갖 정책의 착상이 자신의 독서에서 나왔다는 다음 술회는 참으로 감명스럽다.
“독서는 나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독서가 주는 더 큰 유익은 나의 상상력을 항상 자극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독서를 통한 상상력으로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싱가포르는 원래 나의 독서 상상이 하나의 실체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 리콴유가 추진한 정책은 부지기수였다.
대표 정책을 꼽으면 △인종·종교 통합과 다문화국가 형성, △인종 혼합 주거정책, △주택개발청 설립을 통한 슬럼 철거 및 대규모 공영주택 공급, △경제개발청 설립으로 외국인 직접투자의 적극적 유치, △자유무역과 금융 중심지 구축, △항만·도로·철도·통신·전력·수자원 등 국가 인프라의 대대적 확충, △실력 중심의 교육제도와 능력 위주(meritocracy)의 인재 양성, △부패 없는 청렴한 정부, △시민 통제 및 질서 유지, △가족계획과 인구 관리, △공직자에 대한 파격적 처우 등 매우 다양했다.
전반적으로는 이들 정책이 안정적인 사회구조를 구축하고 고속 성장과 발전을 이끌어냈지만, 개인의 자유 제한, 인구정책 논란, 통제 중심 정치 등 일부 정책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8년 1월 영국 총리 에드워드 히스의 런던 자택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는 리콴유 총리. Gettyimage 리콴유는 1990년 총리직 퇴임 이후에도 1992년까지 싱가포르 여당인 인민행동당의 서기장을 맡아 당수 역할을 했고, 후임 고촉통 내각에서 2004년까지 제2대 선임 장관(Senior Minister)을 지냈으며, 아들 리셴룽이 총리에 취임한 2004년부터 2011년까지는 초대 고문장관(Minister Mentor)을 역임하면서 정계 막후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리콴유는 2015년 3월 23일 향년 91세에 서거했다.
사후에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도록 한 것도 묘지 만든답시고 국토라고는 도시 하나뿐인 싱가포르의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리콴유는 영국령 싱가포르 자치 정부 총리, 말레이시아령 싱가포르 주 총리를 거쳐,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해 31년간 무려 8차례에 걸쳐 내각을 이끌면서 장기 집권했다.
리콴유 총리는 자신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1965–2000)’에서 “나는 일생 네 나라의 국가(國歌)를 부르며 살아야 했다.
영국의 ‘신이여 여왕을 보우하소서’, 일본의 ‘기미가요’, 말레이시아의 ‘나의 조국’, 그리고 싱가포르의 ‘전진하는 싱가포르’이다”라고 술회했다.
1963년 7월 말레이시아 연방 창설 협정서에 서명하는 리콴유 총리. Gettyimage 싱가포르 건국 과정에서 직면한 난제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건국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난제에 직면했다.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이 단순한 정치적 것들이 아니고 국가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것이었다는 데 있었다.
첫 번째 난제는 말레이시아와의 강제 분리에 따른 예상치 못한 독립이었다.
1965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강제로 추방되다시피 분리됐다.
원래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연합해야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고 봤지만, 말레이계와 중국계 간의 인종 갈등과 정치적 충돌로 인해 말레이시아 연방이 더는 지속할 수 없게 되자 싱가포르는 추방되고 독립하게 됐다.
리콴유는 이 분리 독립을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라 표현했다.
국가로서의 정체성도 생존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출발해야 했다.
두 번째 어려움은 자원이 거의 없었던 것이었다.
석유, 천연가스, 식량은 물론 심지어 식수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경제적 자립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고, 살길은 전적으로 무역과 외국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인재도 새로 양성해야 했고 수입해야 했다.
세 번째 난제는 다민족 간의 갈등에 따른 사회불안이었다.
싱가포르는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이 섞인 다인종사회였다.
독립 전에도 독립 후에도 인종 폭동, 종교적 갈등, 민족 간 불신이 빈번했으며 사회통합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리콴유는 인종 갈등, 종교 대립, 민족 불신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법질서 확립, 공정한 정책 추진, 공용어로서의 영어 사용 등을 통해 사회통합을 추진했다.
네 번째 난제는 높은 실업률과 빈곤 문제였다.
독립 당시 실업률은 매우 높았고, 인프라도 열악했으며, 빈곤과 주거 문제가 심각했다.
리콴유는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 자본 유치, 공공주택 개발, 산업 인프라 정비, 기술 중심 교육 강화 등 실용적 조치를 취했다.
다섯 번째 난제는 국가안보가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와의 긴장, 인도네시아의 콘프런타시(Confrontasi) 정책 등으로 인해 외부로부터 군사적 위협이 그대로 있었다.
리콴유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군사 자문을 해 자위군(싱가포르군)을 신속히 창설했고, 국민복무제를 도입해 안보 기반을 다졌다.
이들 난제로 인한 총체적 위기 속에서 리콴유는 철저한 현실 인식, 과감한 개혁, 엄정한 원칙주의를 바탕으로 난제들을 하나씩 해결함으로써 싱가포르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리콴유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초인(超人)에 가까운 국가 창업자이자 경영자였다.
2024년을 기준으로 할 때 싱가포르는 국가경쟁력지수, 정부경쟁력지수 (CGGI), 정부효율성지수, 경제 성과, 기업효율성, 인프라 등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한 나라다.
이들 각 지수에서 대한민국의 순위는 20~30위였다.
싱가포르는 부패인식지수(TI CPI)에서 세계 3위, 금융부문 경쟁력에서 4위, 남녀평등지수(GII)에서 8위, 인간개발지수(HDI)에서 9위, 그리고 노동자유지수에서는 아시아 41개 국가 중 1위를 차지했다.
어떻게 건국한 지 66년밖에 안 된 나라가 수많은 주요 지수에서 이렇게 훌륭한 성과를 달성했는가.  리콴유가 성취한 위대한 업적 2024년 싱가포르 1인당 GDP는 명목 미국 달러 기준 9만3956달러로, 1위 룩셈부르크, 2위 스위스, 3위 아일랜드에 이어 세계 4위다.
구매력 평가(PPP) 기준으로는 13만3737 국제 달러인데 이는 룩셈부르크 1위, 아일랜드 2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2024년 우리나라의 명목 기준 1인당 GDP는 3만6024달러로 세계 33위, 구매력 평가 기준 6만2960달러로 세계 29위를 기록했다.
한때 한 연방국이었던 밀레이시의 1인당 GDP가 1만3140달러이고, 자원이 풍부한 이웃 나라 인도네시아의 1인당 GDP가 4980달러에 불과한데도 어떻게 싱가포르의 1인당 GDP가 세계 4위 9만3956달러에 달했는가. 2024년 한국의 총인구는 약 5174만 명이고 싱가포르의 총인구는 약 604만 명으로 한국의 인구수는 싱가포르의 8.5배다.
필자가 40여 년 전인 1980년대 중반에 싱가포르를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가졌던 의문은 “우리 인구 5000만 명 중 똑똑한 상위 12%만 해도 600만 명에 달하는데, 어떻게 우리나라가 각종 성과 지표에서 싱가포르에 크게 뒤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의 조금 높은 곳에서 싱가포르항을 내려다볼 때마다 즐비하게 서 있는 그 많은 선박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1985년 10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백악관을 방문한 리콴유 총리가 연설하고 있다.
Gettyimage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5대 ‘경제 기적’은 1950~60년대 서독의 라인강의 기적, 1950년대 후반~1980년대 초 일본의 경제 기적, 1960~90년대 한국 한강의 기적, 1960~90년대 대만의 경제 기적, 그리고 1965년 독립 이후~1990년대 싱가포르의 경제 기적 등이다.
싱가포르의 경제 기적은 리콴유에 의해 설계됐는데, 리콴유 이후 지도자들의 노력 덕택에 오늘날까지 계속 유지됐다.
2024년 기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명목 미국 달러 기준 9만3956달러에 달해 1인당 소득 세계 4위의 최우량 선진국이 됐다.
아시아 ‘네 마리 용’의 1인당 GDP를 비교하면 홍콩은 5만3165달러, 대만은 3만3234달러, 대한민국은 3만6026달러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1965년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517달러였고, 홍콩 700달러, 대만 200달러, 대한민국은 110달러 수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1961~1979) 동안 한국의 연평균 실질경제성장률은 8.7%였고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집권 25년(1965~1990) 동안 싱가포르의 연평균 실질경제성장률은 7.8%를 기록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18년 경제 성적표와 리콴유 총리 집권 25년의 경제 성적표를 평면적으로 비교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앞선다.
그러나 2024년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한국의 2.5배나 더 높은 수준이다.
한강의 기적 흔적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인류 역사에 기록된 바 없는 세계 최고의 경제 기적을 창출해 자원 하나 없는 섬나라 싱가포르를 세계 일류의 부국(富國)으로 만들기 위해 도대체 리콴유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 리콴유가 성취한 싱가포르의 경제 기적은 경제 관련 정책을 잘한 것과 더불어 나라 전체의 시스템을 합리적 효율적으로 구축한 결과다.
  리콴유는 현실 인식에 기초한 철저한 전략과 실행력, 그리고 인재 중심의 국가 운영을 통해 싱가포르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리콴유는 1967년 미국을 처음으로 방문해 뉴욕, 시카고 등을 돌며 수많은 학자와 경영인들을 만나 조언을 들었다.
리콴유는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을 싱가포르에 유치하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완벽한 개방경제, 자율 경제체제를 구축했다.
자원이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외국인 투자 유치(FDI)에 총력을 기울였다.
세계의 모든 자본과 기술을 유치했다.
  ‘Made in Singapore’보다는 ‘Assembled for Export’ 모델을 추진해 외국 기업이 싱가포르에서 생산하고 세계로 수출하도록 유도했다.
이를 위해 낮은 세율, 투명한 행정, 노사 안정성을 보장해 다국적기업의 생산기지와 본부 유치에 성공했다.
리콴유는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에 진력했다.
싱가포르를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고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경제개발처를 설치해, 원스톱 서비스(one-stop service)를 제공했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해 노사분쟁과 파업이 없는 나라를 만들었고, 외국자본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외환을 자유화했다.
한마디로 싱가포르를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
세계 최고의 항만(싱가포르항)과 공항(창이 국제공항)을 건설해 물류 허브로 만들었고, 도시계획과 환경 관리를 철저히 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청결을 유지했다.
체계적인 대중교통망(경전철, 대량고속수송철도)을 확충해 외국 기업과 인재가 살고 싶어 하는 도시를 구축했다.
또한 “사람밖에 자원이 없다”라는 철학 아래,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체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국립대학(NUS, NTU)들이 세계 30위권 대학으로 성장했다.
수학·과학·기술 중심 교육을 강화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실업자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기술교육, 직업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작지만 강한 국가’ ‘작지만 잘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자원 대신 사람을 키우고, 원칙과 법치로 신뢰를 쌓고, 개방과 투자로 세계를 끌어들인 위대한 전략가였다.
그가 택한 방식은 단순한 경제성장 정책이 아니라 국가 경영의 예술이자 과학이었다.
리콴유의 인간적 매력과 정치가로서의 남다른 특징 리콴유는 단순한 정치지도자를 넘어 ‘인간적으로도 매력적’이고, 정치가로서 ‘독특한 특징’을 지닌 인물이라 판단된다.
  리콴유의 인간적 매력은 첫째 진솔함과 소탈함이다.
권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겸손하고 솔직한 태도를 보였고, 자신의 실수나 약점도 숨기지 않고 인정하며 국민과 소통하려 노력했다.
두 번째 매력은 강한 의지와 결단력의 지도자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의지를 갖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임을 보여주었고, 목표 달성을 위해 흔들리지 않는 추진력과 책임감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세 번째 그는 늘 현실적이고 실용적 관점을 견지했다.
이상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을 냉철히 판단했으며, 국민 실제 필요한 것을 고민했고, 국가의 먼 장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네 번째는 그가 참으로 국민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졌고,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국민의 삶 개선에 평생 진정으로 헌신했으며, 다민족국가 싱가포르에서 사회통합과 공공복지에 정열을 쏟았다.
리콴유가 정치가로서 지닌 남다른 특징은 그가 싱가포르를 건국하는 과정, 싱가포르가 처했던 각종 난관, ‘작지만 강한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정책 등 총체적 구상과 관련돼 있다.
  첫 번째 특징은 강력한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발휘와 엄격한 법치주의 적용이다.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면서 법과 질서를 엄격히 지키도록 호소했으며 부패 척결과 공무원 청렴성 유지에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실행했다.
두 번째 특징은 장기적 비전과 체계적 계획 수립을 강조한 것이다.
단기적 인기보다 국가의 장기 발전을 위한 정책 설계에 집중했다.
그리하여 경제·사회·교육 등 다방면에서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국가 발전 계획을 추진했다.
세 번째의 남다른 특징은 실용적 경제개발 전략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이념보다는 효과적인 경제성장과 경쟁력 확보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자유시장경제와 정부의 적절한 개입을 절묘하게 조합했다.
넷째, 다문화·다인종 사회통합과 관련해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인종·종교·언어 차이를 넘어 사회적 통합과 협력을 이뤄내고, 강력한 사회규범과 균형 정책으로 갈등 최소화했다.
끝으로 탁월한 언변과 설득력으로 뛰어난 말솜씨와 설득력으로 신뢰를 구축해 국제사회에서 싱가포르의 위상을 고양했다.
리콴유는 단순히 싱가포르만의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작은 나라의 위대한 거인”이었다.
전 세계 지도자들이 주목한 지도자였고, 세계 여러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만나 대화하고 싶어 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서구의 개인주의보다는 사회적 화합을 강조했다.
다른 역사와 필요성을 가진 싱가포르에 서구 방식의 강요를 거절했기에 리콴유가 서구에서 한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 화합을 강조하는 리콴유의 사상이 결국 서구 민주주의와 같은 맥락임을 서구 지도자들이 인지하게 되면서 그는 서구에서도 존경받는 세계적 지도자로 부상했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리콴유는 탁월한 지성과 지도력으로 후진국이었던 싱가포르를 세계적 선진국으로 탈바꿈시킨 지도자였다.
그는 1870년 중국 광둥(廣東)성에서 이주한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난 중국계 싱가포르인 3세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리콴유는 타고난 수재였다.
그가 수재임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는 탁월한 학업 성취에서 나타난다.
초등학교에서는 월반했고, 1935년 싱가포르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공립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일등을 했다.
1940년에 치러진 고등학교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 수석을 차지했다.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 학교로 엘리트만 모이는 래플스 칼리지(Raffles College)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래플스대 재학 중 수학에서는 늘 1등을 차지했으나 영문학·경제학·역사학에서는 콰걱추(柯玉芝·Kwa Geok Choo)란 여학생에게 1등을 내주곤 했는데, 그 여학생이 훗날 리콴유 총리의 부인이 됐다.
  수재(秀才) 리콴유와 부모님의 가정교육 영국 케임브리지대 법학과 유학 중 현지에서 ‘천재적 동양인’으로 주목받았으며, 최우수 성적(First Class Honours)으로 수석 졸업했다.
영국 법정 변호사(barrister) 시험에서도 최고 점수를 받았다.
그는 언어의 천재로 영어는 물론이고 말레이어, 중국어(표준어 및 복수 방언), 일본어에 능통했다.
일본 점령기에 일본어를 독학으로 배워, 일본 정부 통역가로 일할 정도였다.
  리콴유의 명석한 두뇌가 싱가포르 발전에 기여한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면 그는 선진국 전략 모방과 변용 능력이 뛰어났다.
리콴유는 “좋은 아이디어는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가져온다”는 실용주의자였다.
스위스의 중립성, 이스라엘의 군사훈련 제도, 일본의 기업윤리 등 선진국 제도를 스스로 철저히 분석해 싱가포르에 맞게 변용했다.
싱가포르의 청렴한 공직 시스템은 영국과 북유럽의 제도를 활용한 것이었다.
국제 정세를 꿰뚫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냉전 시기 미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 사이에서 기민하게 줄타기하며 외교적 자주권을 확보했다.
리콴유의 수재성은 단순한 지능이 아닌 실용적 판단력, 국제 정세에 대한 분석력, 국가 경영 철학과 시스템 설계 능력 등에서 발현됐다.
그는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지식인·전략가·교육자·설계자·경세가(經世家)가 한 몸에 결합한 21세기형 천재 지도자였다.
아버지 리친쿤과 어린 리콴유. 위키피디아 리콴유는 자신의 자서전과 여러 인터뷰에서 부모님, 특히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그의 가정환경은 그가 훗날 보여준 철저함, 실용주의, 근검절약 정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리콴유의 아버지 리친쿤(李进坤·Lee Chin Koon)은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우 절제된 생활을 했다.
그는 아들에게 돈의 소중함과 허영을 경계하는 법을 가르쳤다.
리콴유는 나중에 국가를 운영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해 낭비 없는 정부 운영을 강조했다.
  어머니 추아짐니오(蔡珍娘·Chua Jim Neo)는 전통적 중국 가정의 여성이었지만, 자녀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특히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린 리콴유가 영국식 교육을 받도록 적극 지원했다.
어머니 덕분에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됐고, 그 결과 그는 세계 무대에서 효과적으로 외교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리콴유 집안은 화교(華僑) 가정이었으며 유교적 가치(효, 절제, 근면)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고, 항상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중요시하는 태도를 배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이 다문화사회 싱가포르에서 성공하려면 언어적·문화적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다양한 언어와 문화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니도록 이끌었다.
이는 훗날 리콴유가 다인종·다언어 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부모는 기본적으로 자녀에게 높은 기대를 걸면서도 과잉 간섭을 피하고 자율성을 부여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공부 계획을 세우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훈련을 받았다.
이는 리콴유의 자기통제력과 철저함의 기초가 됐다.
 
국가 창업자이자 경영자였던 리콴유의 탁월한 리더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