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삼성의 디자인 아이덴티티 고민하던 이건희의 한마디
● 쓰기 불편하다면 디자이너 잘못…‘서비스 디자인’ 중요
● “이 회장은 물건과 ‘눈(目)싸움’을 했던 분”
● 메모지에 적은 딱 한 줄…‘질(質) 경영 = 디자인 경영’
● 약점 말하는 용기…모든 사람의 ‘인풋’ 받아
● 사업 성패는 디자인이 결정…경영진 마인드셋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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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신경영 선언이, 삼성전자 고문이었던 일본 출신 디자이너 후쿠다 다미오 씨가 내부 경영 실태를 진단한 ‘후쿠다 보고서’에서 촉발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후쿠다 보고서는 삼성이 일본 기업 베끼기에나 급급하면서 스스로 제일이라는 자만에 빠져 창조적 도전을 하지 않고 있다며 자신으로서는 더 할 일이 없으니 사표를 쓰겠다는 내용이었다.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보고서를 읽은 이건희 회장은 도착하자마자 비서실을 통해 임원들을 소집한 것이 신경영 선언의 시작이었다.
후쿠다 전 고문은 신경영 선언 22주년을 맞은 2015년 삼성 사내 언론인 ‘미디어삼성’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는 이 회장의 디자인 철학이 잘 담겨 있다.
후쿠다 전 고문은 1993년 6월 5일 도쿄에서 이건희 회장과 회의한 기억을 떠올리며 “보고서를 접한 회장께서 ‘아니, 아직도 개혁해야 할 부분이 이렇게 많은가’ 충격을 받으셨던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쓰기 불편하다면 디자이너 잘못
후쿠다 다미오 전 삼성전자 고문. 미디어삼성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서 사장단 회의가 있었는데 저도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저녁 6시가 돼서야 회의가 끝나 다른 임원들과 식사하고 있는데 회장님이 저와 또 다른 일본인 고문에게 ‘방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회장님을 일대일로 뵙는 것은 처음이라 간단하게 인사만 드리고 끝나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저녁 8시 반에 시작한 미팅이 자정이 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
무슨 대화를 주로 나눴나요.
“질문을 많이 하셨지만 이미 정답은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일하면서 그런 식의 질문을 던지는 경영자는 처음 만났습니다.
‘내가 지금 시험당하고 있는 건가’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모르는 건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열심히 답을 드렸습니다.
목소리 톤은 굉장히 조용하고 억양 변화도 별로 없이 일정하고 말씀하시는 속도도 느렸는데 질문이 굉장히 날카로워 놀랐습니다.
”
어떤 질문이었나요.
“세계시장에서 한국 디자인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한국 내 다른 경쟁사들의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어떤지 같은 일반적 질문에서부터 CAD(Computer Aided Design·컴퓨터 설계) 같은 구체적 기술에 대한 질문까지 다양했습니다.
”
후쿠다 전 고문은 그중에서도 “‘디자이너에게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와 같은 본질적 질문에 답하느라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고 했다.
“디자인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라는 제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셔서 ‘내가 괜찮은 답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디자인을 혁신한다고 할 때에는 단순히 모양을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이런 제품이 사람들에게 필요한지, 혹시 필요 없는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고 디자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자이너가 그림만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디자이너는 아티스트와는 다릅니다.
아티스트라면 작품을 이해해 주는 사람만 상대해도 괜찮지만, 디자이너는 대중의 지지를 받고 소비자의 감동까지 이끌어내는 데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아, 이 물건 괜찮네’라며 샀다가 거의 쓰지 않고 집 안에 처박아 두는 물건이 하나 이상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건 디자이너의 가장 큰 죄입니다.
겉으로는 멋지고 예쁜데 뭔가 쓰기 불편해 한 번 쓰고 버리게 되는 그런 걸 저는 ‘판매만을 위한 디자인’이라고 말합니다.
소비자를 속이는 거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물건을 사고 싶다’고 계속 느끼게 하는 겁니다.
판매 촉진이 아닌 감동 가치, 경험 가치가 있어야 하는 거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비스 디자인’이 중요합니다.
”
‘서비스 디자인’이란 또 뭔가요.
“제품을 뛰어넘어 제품과 관계된 여러 가지 환경 전체를 디자인하는 겁니다.
호텔이나 식당에 가면 분위기는 어떤지, 어떤 가구나 식기를 쓰는지, 어떤 음악이 나오는지 등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평가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설명서가 필요 없는 디자인’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포장을 열었을 때 ‘아, 이렇게 쓰는 거구나’를 바로 알 수 있고, 다소 작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설명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 한마디로 매뉴얼이 없는 ‘매뉴얼리스(manualliss) 디자인’이 가장 이상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건희 회장은 디자인에 대한 매우 본질적인 철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의 전언이다.
“1993년만 해도 삼성에서 임원 대부분이 ‘디자인은 모양과 색깔’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디자이너들을 ‘그림 그리는 사람’ 정도로 본 거고요.
회장님만 유일하게 달랐습니다.
‘삼성 철학을 디자인에 넣으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 대단한 통찰이지요. 그런 경영자는 일본에서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좋은 디자인이란 눈에 잘 띄고 많이 팔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이 회장의 방대한 지식량에도 놀랐다고 한다.
“공학, 역사, 예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심사를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하나 매우 깊게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다시 이 회장을 뵙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오히려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어떤 준비를 하면 될지, 또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지 말이지요. 회장님은 항상 미래만 이야기하셨습니다.
언제나 앞을 향해 있었던 거죠.”
후쿠다 전 고문은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4년 일본 잡지 ‘닛케이 디자인’ 10월호에 ‘이제 일본은 삼성을 상대하기 힘들게 될 것’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기업들을 향한 경고성 내용이 담긴 기고문을 싣는다.
10여 년 만에 삼성은 도저히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견해가 180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의 글 중 일부다.
“삼성전자는 일본 메이커가 30년 걸린 디자이너와 브랜드 육성을 10년 만에 실현했다.
디자인 경영을 기업 개혁의 핵심으로 설정한 이건희 회장 덕이다.
일본 메이커는 아직도 어딘지 모르게 품질만 좋은 제품을 판매하면 그것으로 된다는 생각에서 미처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한국 메이커를 1.5류라고 보고 있을지 모르지만, 각별히 삼성만은 돌출하고 있다.
이제부터 세계시장에서 삼성을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
“물건과 ‘눈(目)싸움’을 했던 분”
이 회장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은 그가 1979년 삼성전자 부회장을 맡은 직후 시작된다.
2년 만인 1981년 경기도 수원 삼성종합연구소 산하에 디자인실을 만들었고, ‘신경영 선언’ 이듬해인 1994년 디자인실 사무실을 수원에서 서울로 옮겨 디자인연구소로 확대 개편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인 1996년을 ‘디자인 혁명의 해’, 2000년에는 ‘디자인 우선 경영’을 선언하면서 연구소를 ‘디자인경영센터’로 개편했다.
당시 이 센터에서 일하던 정국현 전 전무는 2004년 삼성 사내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 회장의 디자인 철학이 어떻게 현장에서 구현됐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당시 그는 디자이너들의 맏형 격으로 삼성전자의 디자인 경영을 실무적으로 추진하는 ‘키맨(Key Man)’으로 소개됐다.
그는 인터뷰에서 1993년 LA 회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1993년 회장은 삼성 제품이 해외시장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직접 봐야 한다면서 삼성전자 임원들을 LA로 불렀습니다.
당시 저는 부장이었는데도 불려 갔는데 아마 디자인 쪽에서는 제일 고참이라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처음으로 회장님을 가까이서 뵙게 됐습니다.
”
당시 LA 회의에서는 선진국 경쟁사 제품을 모두 모아다 놓고 삼성 제품과 비교 전시를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100여 평 되는 공간에 삼성 제품과 선진국 경쟁사 제품을 모두 모아 갖다놓고는 비교해 보라고 하셨어요. 공간이 좁아 위아래로 진열한 것들도 있었는데 이걸 본 회장께서 ‘위아래로 놓으면 안 된다’고 하셔서 부랴부랴 옆으로 죽 늘어놓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
그때 이 회장은 뭐라고 했습니까.
“제품 하나하나를 보면서 삼성 제품의 문제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팩시밀리를 일본 샤프 제품과 삼성 것을 나란히 놓게 한 뒤 인쇄 상태는 물론 디자인·컬러·금형·사출 등등을 꼼꼼하게 지적하셨는데, 말씀하실 때마다 디자이너의 역할을 이렇게 중시하는 분이 있다니 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회장님이 이런 생각이라면 앞으로 비전이 있겠구나 느꼈습니다.
”
그는 이날 회의를 마친 후 이 회장으로부터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소프트 제품과 관련된 책을 사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회장님과 중·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이해민 부사장과 동행했습니다.
이 부사장은 회장님 집에도 놀러 갈 정도로 가까운 친구였다고 했습니다.
‘소년 시절 회장님이 어땠느냐’고 여쭈었더니 ‘함께 놀다 보면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집 안팎을 찾다 보면 마당 한구석에서 자전거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면서 닦고 있었다는 겁니다.
회장님은 자전거뿐 아니라 모든 물건을 죄다 뜯어서 다시 조립하면서 노는 걸 좋아했다고 합니다.
사무실 책상 서랍 안에는 분해 중이거나 조립 중인 손목시계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
그러면서 그는 “이건희 회장은 물건과 눈으로 싸웠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건희 폰’으로 불린 삼성 휴대폰 T-100. 삼성전자 사사
“경쟁사 신제품이 나오면 반드시 댁으로 보내게 돼 있었습니다.
댁에는 그런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방이 따로 있었습니다.
회장님은 처음엔 한동안 그 물건들과 눈(目)으로만 싸운답니다.
그런 ‘눈싸움’으로 물건이 이해되면 분해해서 더 깊이 들어가고, 그런 다음에야 해당 사업 책임자를 불러 이것저것 묻고 당신의 견해를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물건과 도구에 대한 확실한 철학을 가진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품에 대한 고객의 경험이나 가치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으니까요. 리모컨에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경우에도 이미 고객에게 익숙해 있는 버튼 배열은 그대로 유지하되 새로운 버튼은 앞단이나 뒷단에 배치하라고 했습니다.
중간에 섞어놓으면 소비자가 혼란을 일으킨다면서 말입니다.
”
그는 “디자이너로서 강한 느낌을 받았던 건 세간에서 ‘이건희 폰’ 또는 ‘회장 폰’이라고 불리는 T-100이라는 휴대전화였다”라고 했다.
“이전까지 휴대폰이라면 어떻게 하면 더 작고 더 가볍게 할 것인지에만 집중하는 경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장께서 ‘너무 작으면 잡기도 어렵고 조작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 조금 넓고 얇게 만들어보라’는 아이디어를 내셨습니다.
이 아이디어가 이후 휴대폰 디자인의 룰을 바꾸었습니다.
T-100은 사람이 오랫동안 주물러서 매끄러워진 조약돌처럼 생겼잖아요. 이전까지는 휴대폰이 네모꼴이었는데, 모서리 없이 납작하고 동그란 모양으로 변화한 겁니다.
T-100은 1000만 대 이상 팔린 히트 상품이 됐습니다.
”
정 전 전무는 “회장이 중간중간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큰 메시지를 주셨는데, 그때마다 직원들은 그야말로 ‘불 맞은 호랑이’처럼 뛰어다니면서 일했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입체적 사고를 하라’는 말씀이 한창 화두에 올랐던 무렵에는 ‘만드는 입장에서, 파는 입장에서,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제품 하나를 갖고도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메시지가 없었지요.
당신 스스로는 ‘말이 어눌하다’고 하셨지만, LA 회의 때 깜짝 놀랐어요. 그렇게 말씀이 빠를 수 없었으니까요. 프랑크푸르트 선언도 평소 생각하신 것이 워낙 많고 깊으니까, 회오리가 몰아치듯 한꺼번에 폭발시킨 것입니다.
”
한편 정 전 전무가 속해 있던 디자인경영센터의 정승은 당시 디자인전략팀 과장(책임 디자이너)도 1997년 ‘미디어삼성’과 인터뷰하면서 이 회장의 디자인 마인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이 회장의 마인드는 한마디로 유저(user), 즉 사용자 마인드였다”면서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로 “삼성의 아이덴티티를 석굴암에서 찾아야 한다”는 그의 말을 꼽았다.
“석굴암에서는 참배자가 유저(user)죠. 본존불(本尊佛)과 내부 공간을 들여다보면 유저를 생각한 마인드를 느낄 수 있다는 거죠. 실제로 석굴암 본존불은 키가 170cm, 눈높이는 160cm로 일반 참배자들의 눈높이와 딱 마주칩니다.
본존불 광배(光背)에도 이런 세심한 유저 마인드가 녹아 있습니다.
실제로는 타원형이지만, 참배자 처지에서는 본존불 두상과 딱 겹치는 원형처럼 보이죠. 이것이야말로 제조자 중심이 아닌 유저의 시각을 중시한 거라는 게 회장님 말씀이셨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김연아 선수가 성화 점화 직전 스케이팅 연기를 펼치고 있다.
오른쪽은 성화대. 뉴시스
메모지에 적은 딱 한 줄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봉을 든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팅해서 성화대에 점화한 감동적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 성화대는 기둥 다섯 개가 백자 달항아리를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올림픽 정신과 한국의 미를 담은 이 성화대와 성화봉은 김영세 이노디자인 대표의 작품이다.
김 대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꼽힌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한 그의 발자취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국립중앙박물관 나들길’은 2013년 ‘디자인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미국 IDEA의 스페이스 부문에서 수상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명작이다.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일리노이대 산업디자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교수로 임용됐지만 교수직을 접고 1986년 실리콘밸리에 ‘이노디자인(Innodesign)’을 설립했다.
국내 업체들과도 협업을 많이 했는데 동양매직의 휴대용 ‘랍스터 버너’, 삼성 ‘애니콜 가로본능 휴대폰’, 아이리버 MP3 플레이어 ‘아이리버’, 아모레퍼시픽의 라네즈 ‘슬라이딩 콤팩트’ 등이 대표 작품이다.
그는 2014년 삼성 사내보와 한 비공개 인터뷰에서 이건희 회장과 디자인 이야기를 나눈 추억을 길게 이야기했다.
기자가 단독 입수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 회장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1995년 회장님 초청으로 한국에 갔습니다.
토요일이었는데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12시간 논스톱 미팅을 했습니다.
”
첫 만남은 어땠나요.
“예상은 했지만, 너무 조용하고 진중하셔서 제가 긴장했던 기억이 납니다.
삼성은 이미 세계 최고 회사였습니다.
저는 디자인 회사를 실리콘밸리에 만들고 나서 늘 한번 뵙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디자인이라는 이슈가 미래의 전자산업에서는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인데, 기회가 있다면 꼭 제 의견을 전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뉴스를 통해서 삼성 사장단이 외국의 선진 기업에 관심을 갖고 직접 방문하거나 유명한 교수, 전문가들을 초대해 의견을 듣고 배우거나 상담하고 있다는 걸 듣고 있었어요. 그러던 차에 회장님께서 직접 저를 찾으셔서 서울로 초대해 주셨다는 게 너무 놀랍고 감동적이었습니다.
”
그는 첫인상에도 회장이 디자인에 꽂혀 있다는 걸 강하게 느꼈다고 했다.
“1996년에 ‘디자인 신경영’을 선언하시잖아요. 대화 내내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요즘 말로 ‘꽂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지요.”
1993년 신경영 메시지는 양에서 질 경영으로 가야 된다는 건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디자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질 경영과 디자인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저를 초대해서 하루 종일 독대하실 정도였다고 하면, ‘질 경영 = 디자인 경영’이라고 생각하셨음을 말하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근본은 품질부터 시작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경영의 핵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디자인이란 그냥 겉모양이나 이미지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품질을 완성하고, 창조해서 소비자한테 양질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겁니다.
요즘에야 모든 경영인이 다 잘 알고 있는 거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당시에 대한민국 재벌 그룹 회장님 중에는 이건희 회장님이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제일 크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첫 만남 때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말씀은 거의 없으셨는데 한 번도 초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 일본에 갔었는데 기업 총수가 젊은 직원들과 디자인 이야기를 나누는 걸 봤다고 했던 말씀이 기억나요. 중간에 잠깐 쉬시긴 했지만 종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대화에 집중하셔서 상당히 놀랐습니다.
자세도 아주 똑같으셨어요. 테이블 끝에 딱 앉으셔서 이렇게 살짝 팔을 놓으시고.
사소한 기억이긴 한데 옆에 담뱃갑을 두고서도 담배를 전혀 태우지 않았어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이미 담배를 끊은 시기였다고 해요. 그냥 옆에 놓기만 한 거죠. 그래야 마음이 편하셨던 것 같아요.
책상 위에는 메모지와 펜인가, 연필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어요. 나중에 이 회장님이 남긴 메모지에 ‘디자인 혁명’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많은 이야기를 두 단어로 싹 정리하신 거죠. 제가 애를 써서 전달해 드린 그 메시지가 회장님한테 두 단어로 정리됐고, 그걸 실천하셨다는 점에서 매우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훗날 들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컨설팅을 하고 강연을 하고 있지만 그날 이건희 회장과의 독대는 제 인생에서 최고의 가치가 있는 거였다고 생각합니다.
”
생전에 이 회장은 “아름다운 것이 결국 이긴다”라는 말을 했는데 어떤 의미일까요.
“그분이 생각했던 아름다움은 그냥 비주얼만은 아니에요. 감성, 기술, 품질, 성능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창조죠. 결국 디자인의 근본을 말씀하신 겁니다.
디자인이라는 근본을 단순한 미적인 표현에서만 생각하신 게 아니라 큰 틀에서 보신 거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기업의 경쟁력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겁니다.
삶의 아름다움, 사회의 아름다움, 환경의 아름다움, 기업의 아름다움. 디자인을 이 모든 것의 근본이자 기본이라고 생각한 거죠.
또 음향기기, 전자기기, 리모트컨트롤 등 생활의 많은 도구가 쓰기 불편하게 만들어졌다고 했어요. 이걸 해결하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데 공감했고요. 회장님은 세상에 있는 것 다 갖다놓고, 만져보고, 써보고, 평가한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그런 전체 문제를 해결하는 매직이 바로 디자인이다 이런 말씀을 제가 드렸는데, 거기에 공감하셨고 같은 걸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기능과 품질과 불편을 해소하는 모든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우리는 디자인으로 다 잡겠다는 결심을 하신 거죠. 저는 그 메모지 한 장에서 딱 느낄 수 있었어요. 이어서 ‘디자인 경영’ 선언을 한 것을 보면 그날이 참 중요한 날이었구나. 그렇게 회상하죠.
아름다운 것이 결국 이긴다
이 회장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디자인은 어떤 것이었다고 생각하나요.
“사람을 위한 것, 사용자를 위한 것이죠. 제가 쉽게 설명해 드린 것 중 하나는 디자인은 ‘진선미’라는 말이었어요. ‘진은 진실한 기능이고, 선은 착한 가격이며, 미는 아름다운 모습. 이 세 개가 만나야 굿 디자인이다’라고 설명했죠. 그 저변에 기술과 기능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는데, 아마 회장님도 이미 아는 내용이었을 거예요. 다만 표현을 처음 들었을 수는 있지요.
1996년 디자인 혁명 선언 후 삼성의 디자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실감을 했는지요.
“그룹사 전체 디자인에 관련된 CEO들의 마인드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로 기억하는데 1996년 디자인 경영을 선언하시고 5년여 지났는데 그동안 모든 삼성전자 제품이 디자인으로 대결하는 쪽으로 많이 바뀌는 걸 봤습니다.
가장 크게는 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업 쪽에 상당히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
삼성전자의 가로본능 폰. 동아DB
2004년에 출시된 ‘가로본능 폰’을 디자인했습니다.
당시 디자인하게 된 과정을 소개해 주시죠.
“어느 날 이기태 전 부회장이 미국에 있는 저한테 팩스를 한 장 보냈어요. 저를 좀 치켜세우는 말씀이었겠습니다만 ‘당신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함께하면 1위 노키아를 7년 이내에 따라잡고 삼성전자를 휴대폰 1위로 만들 자신이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게 강한 동기부여가 됐습니다.
당장 서울로 날아갔고 계약이 이루어져서 여러 아이디어를 내게 되는데, 당시에 휴대폰이 전부 세로형이었잖아요? TV는 다 가로인데 왜 휴대폰은 다 세로냐, 이런 발상에서 나온 게 가로본능 폰이에요.
그걸 스케치해서 모델을 만들어 불과 6개월인지 8개월 만에 제품을 출시하게 됩니다.
한국 시장에 선풍을 일으켰죠. 이후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블랙박스에 새로운 모델을 넣어서 서울에 가지고 가서 보여드렸는데 그중에 골라서 ‘이거 만들자’고 하면 불과 1년 안에 세상에 내놓곤 했어요.
때에 따라서는 1000만 대 이상씩 히트 상품이 나왔는데 요즘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10여 년 전에는 정말 대단한 거였지요. 그러더니 삼성폰이 불과 진짜 7년 만에 1등이 됐습니다.
노키아는 거의 사라졌죠.
어쨌거나 이 모든 건 이건희 회장께서 디자인을 강조하고, 각 계열사 CEO를 독려한 결과죠. 우리나라 전자제품이 디자인으로 장족의 발전을 가져오게 한 분입니다.
”
‘디자인 혁명의 해’ 선언 이후에 보르도 TV, 벤츠 폰 등 브랜드가치가 2000년대부터 계속 올라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삼성의 국내외 평가는 어땠나요.
“미국 전자제품 판매장인 ‘베스트 바이’에 가면 미국·일본 제품이 맨 앞줄에 진열됐었는데 어느 순간 삼성 제품이 맨 앞줄에 있는 거예요.
라스베이거스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만 가봐도 매년 삼성의 위상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거의 쇼의 중심이 되면서 최고의 주목을 받았죠. 보르도 TV, 냉장고, 세탁기 모든 가전제품이 새로운 형태로 미국 시장에서 눈에 많이 띄는 양상을 보여준 거죠.
소비자는 디자인을 통해서 브랜드를 알게 되잖아요. 삼성 브랜드가 계속 한 계단씩 올라가면서 세계 톱5 안에 들었다는 건 어마어마한 겁니다.
대한민국의 자부심이기도 하고요. 전 세계 인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 늘 가까이 있는 브랜드톱5 안에 ‘삼성’이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가치죠. 그 동력 중 하나가 바로 디자인이었던 겁니다.
”
대한민국 기업의 디자인 역사에서 이건희 회장은 무슨 역할을 했나요.
“회장께서 디자인 혁명 선언을 하기 전부터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옛날부터 존재했고, 기업마다 전문 인력이 다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처럼 디자인을 경영으로 끌어안은 분은 없었어요. 더구나 회장은 누가 가르쳐드린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걸 깨우쳤고 사장단한테 전파하셨죠.
회장님을 처음 뵌 이후 거의 10여 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은 서울과 미국을 오가며 삼성 사장단, 임원진, 디자이너 전담 직원들에게 강연했는데 회장께서 자신의 디자인 경영 철학을 얼마나 처절하게 전 직원에게 설득하고 전파하려고 했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
약점을 말하는 건 용기다
토미오 타키(Tomio Taki)는 일본 패션업계의 선구자이며 기업인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품 브랜드인 ‘앤 클라인(Anne Klein)’과 DKNY 브랜드를 성공시킨 인물이다.
1935년생인 그는 일본 게이오대 법학부와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1957년 이토추 상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 가족 기업 타키효(Takihyo Co., Ltd.)에 합류해 26세에 사장에 취임한다.
1973년 미국 디자이너 브랜드 앤 클라인 지분 절반을 인수한 뒤 앤 클라인이 사망하자 도나 카란(Donna Karan)을 후계 디자이너로 발탁해 1985년 DKI(Donna Karan International DKI)라는 회사를 공동 설립한 뒤 ‘DKNY’ 브랜드로 확장한다.
전통적인 일본 섬유 회사를 글로벌 패션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며, 동서양의 비즈니스 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리더십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생전에 이건희 회장과 친교가 있었는데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내보 인터뷰 기사를 입수해 싣는다.
처음 회장님을 만난 때가 1993년 도쿄로 알고 있습니다만 당시 상황이 기억나나요.
“회장님과 많은 사람이 방에 모여 있던 자리였어요. 한국의 거물 기업인을 처음 만나는 자리여서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회장님은 매우 친절했고, 격의 없이 편하게 대해 주셨어요.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저는 그때 ‘고화질 TV’의 디자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는데, 회장께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저는 제가 알고 있는 일본의 훌륭한 전자 공학자와 광학 공학자를 소개해 드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
고화질 TV에 대한 특별한 비전이 있었나요.
“이전에는 거대한 콘솔이 있는 이른바 ‘NTSC TV’라는 것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후 무엇이 출시될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소니의 모리타 회장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NHK와 협력해서 HD 고화질 TV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데 NTSC가 500화소라면 HD TV는 두 배인 1100 이상의 화소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만났지요.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처음에는 한국에 대해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나중에는 세계경제, 무역, 어느 나라가 무엇을 만들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또 전 세계 고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현지 인력을 많이 활용하자는 이야기도 나눴어요. 그렇게 할 경우 현지인들에게는 한국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전 세계에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대화도 나눴습니다.
이 회장님은 삼성이 당시 소니와 도시바, 히타치와 같은 종류의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이 회사들 제품보다 10%가량 더 저렴하게 판매해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만약 가격이 같다면 기존의 것에 추가로 무엇인가를 더해 넣자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히타치나 도시바, 소니보다 조금 더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한 디자인 콘셉트의 일부였습니다.
저는 회장께 디자인에는 세 가지 개념이 있는데, 첫째 심미적 디자인, 둘째 기술적 디자인, 셋째 과정적 디자인이 있다고 말했어요. 고객의 니즈와 일상생활, 업무 생활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야말로 남과 다른 것을 만드는 출발이라고 말이죠.
모든 제품은 저마다 디자인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자 친화적인지 아닌지, 사용성은 어떤지, 효과적인지 효율적인지, 외관은 예쁜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져볼 수 있지요.
우리는 자동차 디자인, 소형 라디오 디자인, 카세트 플레이어 등등 온갖 다양한 제품의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식기세척기나 세탁기에 대해서도요.
이 회장님은 매년 ‘디자인 대(大)콘테스트’를 열었는데 다음 시장에 내놓을 새 제품을 전시하는 자리였어요. 그분은 다양한 디자인 개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일본이나 미국 제품보다 더 나은 디자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전 세계 많은 기업인을 만났을 텐데 이 회장이 어떠한 점에서 차별화되나요.
“가장 큰 차이는 매우 열려 있는 분이었다는 겁니다.
다른 대기업의 경영자, 회장에게 ‘혹시 회사에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아니 없어요, 우리 회사는 잘하고 있어요’라는 답이 나옵니다.
이러면 대화가 더 나아가지 못해요.
하지만 회장님은 달랐어요. ‘조선에서는 이런 문제가 있고, 화학과 관련해서는 이런 문제가 있고, 정유 회사와 관련해서는 이런 문제가 있고’ 등등 말했습니다.
그러면 삼성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회장님만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룹의 다른 사장님들도 ‘문제를 이야기해 보세요’ 하면 모두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사실 약점을 노출하는 것만큼 용기 있는 일은 없습니다.
”
그게 왜 용기인가요.
“부족한 점을 말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개선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지 노출하지 않으면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사람은 대부분 자기 회사의 장점, 직원들의 장점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려 합니다.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알려주려 하지 않죠. 거듭 말씀드리지만, 문제점을 노출하지 않고, 그 뒤에 숨으면 그 문제가 나중에는 더 커다란 문제로 불어납니다.
문제는 빨리 처리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님은 강한 마인드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문제를 노출한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지만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를 더 맞대면,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의 머리를 모으면 더 좋은 아이디어를 도출할 수도 있다는 확신 말이죠. 그는 모든 사람의 인풋(Input)을 받고, 모든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
이 회장이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나요.
“훌륭한 신사였습니다.
항상 미소를 짓고 계셨지요. 늘 질문을 갖고 계셨고 무엇보다 경청해 주셨어요.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회장님의 고문 역할을 한 것은 제 생에 큰 영광이었습니다.
항상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삼성전자 디자인 및 브랜드 경영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글로벌 경제지. 왼쪽은 ‘비즈니스위크’(2004년 11월29일자) 표지, 오른쪽은 ‘포브스’(2004년 7월 26일자) 표지로 당시 윤종용 부회장의 얼굴 사진이 실렸다.
동아DB
나를 변화시킨 디자인 경영
앞서 김영세 대표는 이건희 회장이 디자인 철학을 사장단에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는데, 1997년 삼성이 비공개 발간한 신경영 책자에는 수용자인 사장들이 회장의 철학으로 어떻게 행동이 바뀌었는지를 전하는 수기가 있다.
여기서 발췌해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유현식 전 삼성종합화학 사장의 말이다.
“1994년 12월 어느 날 오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회장님이 갑자기 제일모직을 거론하며 ‘모직은 하루빨리 패션 회사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라며 조르조 아르마니나 도나 카란 같은 세계 일류 브랜드를 우리도 키워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잠재 능력이 있는 해외의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찾아 향후 5~10년 앞을 내다보고 사업을 추진해야 한다고 하셨다.
‘패션 같은 벤처사업은 실패를 두려워하면 할 수 없다.
용기를 갖고 시도하라’고도 하셨다.
”
이 회장의 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대표였던 그에게 “실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로 들렸다고 한다.
“디자인이라고 해봐야 외국 제품을 모방하거나 라이선스 도입에도 급급하던 시기에 세계 최고 브랜드에 도전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실패가 뻔히 예상되는 일을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제일모직이 세계적 브랜드 ‘파멜라 데니스’를 인수하고 패션 회사로 거듭나고 있는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당시 패션 사업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하고 업의 본질을 파악해서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격려해 주던 이 회장의 경영자적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991년에는 제일모직이 진출해야 할 새로운 사업에 대해 거론하면서 사출 성형 기술을 개발하는 말씀도 하셨다.
합성수지는 사출 성형과 컬러 기술이 매우 중요한데 전자제품의 경우 외장 대부분이 합성수지로 되어 있어 사출 성형, 금형, 설계 기술이 품질 및 생산성 향상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니 이 부분을 강화하라고 20년 동안이나 삼성전자에 얘기했는데 변한 게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턴 제일모직에서 사출 성형 기술을 개발해서 삼성전자의 품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전자제품이라고 하면 누구나 전자 분야의 고유 기술에만 집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회장은 삼성전자의 실무 책임자보다도 더 정확하게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일모직 자체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모직물의 품질은 염색과 가공이 중요한데 염색과 가공은 축적된 기술과 오랜 경험으로 좌우되므로 염색 가공 수준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선진 기술을 배우고 전문가를 키우는 것이 핵심이라는 거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바로 이 분야 전문가들이라면서 필요하다면 사장 이상의 대우를 해줘야만 비전을 갖고 기술을 축적해 나갈 것이라며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회장의 말은 지금도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
두 번째로 소개할 사람은 당시 제일모직 숙녀복사업부에서 일하던 이병호 이사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 마인드의 변화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제일모직은 패션을 업으로 하는 회사다.
그러나 회사의 이미지가 패션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 이미지로서는 미흡했고, 디자이너들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창조적인 업무에 전력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세계적 디자이너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디자인 마인드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
나는 주변에서 끊임없는 자기 노력을 통해 디자인의 세계를 경험하고 즐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어느 날 화학 소재 사업을 하지만 시간을 내서 패션 공부를 하고 디자인을 연구하던 분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옷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전문가 이상으로 색상의 조화와 원단 소재의 감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화학 소재 사업을 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디자인 분야는 화학이란 분야와는 2차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니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크게 자극을 받았다.
사업의 성패는 디자인이 결정한다
그 후 부지런히 백화점을 다니면서 훌륭한 디자인에 대한 평가도 해보고, 점원과 얘기도 해보고 디자이너들을 찾아 물어보기도 했다.
넥타이도 자주 바꿔보고 각종 생활용품도 디자인을 고려해서 산다.
각종 전람회, 전시장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미술품을 감상하는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디자인 개념 없이는 사업을 할 수 없다고 한 이 회장의 말씀을 실제로 패션 소재 사업부 책임을 맡은 이후 절감하고 있다.
디자인이 훌륭한 제품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지만 디자인이 잘못된 제품은 제값을 받기는커녕 처분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재고를 팔면서 실감했다.
사업의 성패는 디자인이 결정하는데 경영층이 스스로 마인드가 돼 있지 못하면 조직은 영원히 창조적인 인력을 육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애써 뽑아놓은 전문 인력조차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 것이다.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지고 디자인 마인드로 변화시켜 한 차원 높은 생활 감각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때밀이 타월만 해도 예전에는 모양이 한 가지였지만 지금은 색깔과 디자인이 제각각인 것들을 동네 슈퍼마켓에만 가도 몇 개씩 발견할 수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의 질이 높은 디자인 마인드를 가진 소비자로서, 하드적 사고에서 벗어나 ‘비(非)하드적’인 디자인 분야에 핵심 역량을 키워 사업을 재구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
“석굴암의 유저 마인드를 배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