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8년 만에 ‘조 단위’ 인수합병
● 15억 유로에 플랙트그룹 인수…글로벌 공조 시장 본격 진출
● 높은 성장성에 결심…“미래성장동력으로 육성”
● 이재용 ‘경영 시계’ 멈추자 빅딜도 멈춰
● 의지만으로는 반도체 인수 어렵다지만…연내 성과 자신
삼성전자는 5월 14일 100년 역사의 글로벌 공조 기업 독일 플랙트그룹을 인수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뉴스1 “인공지능(AI) 시대에 좋은 선택이다.
근데 반도체는?” 삼성전자가 15억 유로를 투자해 유럽 공조 기업을 인수한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모처럼 들려온 삼성의 대규모 인수합병(M&A) 소식에 반가워하면서도, 기대하던 반도체 M&A가 아니란 사실에 대한 아쉬움이 담겼다.
해당 댓글에 수십 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로봇부터 AI까지, 되살아난 삼성의 M&A 본능 삼성의 M&A 본능이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해부터 잇달아 글로벌 기업 인수에 나서며 미래 경쟁력 강화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분야도 다양하다.
로봇(레인보우로보틱스)부터 인공지능(AI·옥스퍼드 시멘틱 테크놀로지스), 메드텍(소니오), 오디오·전장(룬, 마시모 오디오 사업부)까지…. 삼성이 ‘픽’한 이들 기업은 ‘미래 성장산업’과 관련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유독 조용한 분야도 있다.
삼성전자의 대표 사업이자 미래를 책임질 반도체다.
그간 삼성전자는 영국의 반도체 설계 기업 ARM과 독일, 네덜란드의 차량용 반도체 기업 인피니언, NXP 등을 두루 살핀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실을 보진 못했다.
뒤늦게 인수 검토 사실이 시장에 알려지며 씁쓸한 뒷맛을 남겼을 뿐이다.
반도체는 AI 시대를 이끌 핵심 산업으로 꼽힌다.
좁게는 삼성, 넓게는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미래 먹거리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
삼성전자가 “유의미한 M&A를 추진하겠다”라고 할 때마다 시장 관계자들의 눈이 크고 작은 반도체 기업으로 향한 배경이다.
‘반도체 빅딜’은 삼성 위기론을 촉발한 반도체 실기 만회에 가장 효과적 방법이기도 하다.
이번 조 단위 인수 발표로 반도체 기업 인수에 대한 기대도 다시금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5월 14일 100년 역사의 글로벌 공조 기업 독일 플랙트그룹을 인수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15억 유로를 들여 영국계 사모펀드 트라이튼이 보유한 플랙트 지분 100%를 품는 거래다.
삼성전자가 ‘조 단위’ M&A에 나선 건 2017년 미국의 전장·오디오 전문 기업 하만 인수 이후 8년 만이다.
삼성전자는 이번 M&A를 통해 고성장이 예상되는 글로벌 공조 시장에 본격 진출한다고 밝혔다.
플랙트는 1918년 설립돼 100년 이상 차곡차곡 기술력을 축적해 온 유럽 최대 공조 기기 업체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깨끗하고 쾌적한 공기의 질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플랙트그룹의 액체 냉각 솔루션의 일환인 신형 냉각수 분배 장치. 플랙트그룹 오랜 역사만큼 포트폴리오도 화려하다.
고객별 니즈에 맞춘 제품·솔루션을 공급할 수 있는 라인업과 설계 역량을 보유했다.
그동안 △안정적 냉방이 필수인 대형 데이터센터 △온·습도에 민감한 고서와 유물을 관리하는 박물관·도서관 △유동 인구가 많은 공항·터미널 △실내 환경 관리가 중요한 대형 병원 등에 고품질, 고효율의 공조 설비를 공급해 왔다.
특히 글로벌 대형 데이터센터 공조 시장에서 활약이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뛰어난 제품 성능과 차별화된 기술력, 신뢰도 있는 서비스 지원 등이 바탕이 됐다.
지난 1964년 처음 컴퓨터룸 공조기(CRAC)를 출시한 이후 60년 넘게 정보기술(IT) 냉각 솔루션 사업을 이어오며 노하우를 쌓아온 결과다.
플랙트의 솔루션은 에너지 절감을 통한 저탄소·친환경 목표 달성이 중요한 데이터센터 고객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지난해 데이터센터 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DCS 어워즈 2024’에서 혁신상을 수상하며 저력을 입증했다.
데이터센터 외에도 글로벌 제약사와 헬스케어, 식음료, 플랜트 등 60개 이상의 대기업이 플랙트의 고객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연 매출은 지난해 기준 약 7억3000만 유로다.
높은 성장성에 인수 결심…“미래성장동력으로 육성” 삼성전자는 왜 거금을 들여 플랙트 인수에 나선 걸까. 답은 ‘성장성’이다.
냉난방 공조는 AI와 로봇, 자율주행, 확장 현실(XR) 등이 뉴노멀이 된 시대의 도래로,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산업이다.
아직 시장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글로벌 기업들이 경쟁하듯 뛰어드는 이유다.
AI 시대를 맞아 데이터센터 수요가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열을 효과적으로 식히는 게 중요한 과제가 됐다.
데이터센터 안에는 최신 고성능 컴퓨팅 기술이 집약돼 있어 각종 설비에서 발생하는 열 관리가 필수다.
삼성전자는 데이터센터 관련 공조 시장이 지난해 168억 달러에서 2030년 441억 달러 규모로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예상치긴 하지만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18%에 달한다.
같은 기간 공항과 쇼핑몰, 공장 등 대형 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중앙공조 시장은 연평균 8% 성장을 예상한다.
지난해 610억 달러이던 시장이 6년 뒤 990억 달러 규모로 1.5배 커진다는 뜻이다.
지구온난화와 친환경 에너지 규제 등 환경 변화도 공조 수요 확대를 이끌고 있다.
공조는 가정과 상업, 산업 시설에 최적의 공기를 공급하고 온·습도를 제어하는 역할을 해 인류의 삶과 직결된다는 특징이 있다.
삼성전자가 신(新)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플랙트 인수를 결심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가전업계 라이벌인 LG전자가 일찌감치 뛰어들어 시장을 선점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는 3월 주주총회에서 “현재 10조 원 규모인 공조 사업을 2030년 20조 원 규모로 성장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장은 아니다.
풍부한 글로벌 공급 경험은 물론 최적의 설계와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해 진입장벽이 높기로 소문났다.
삼성전자가 시장 진입 방식으로 M&A를 택한 이유다.
M&A는 기업이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동안 삼성전자가 공조 사업을 아예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가정·상업용 시스템에어컨 시장을 중심으로 ‘덕트리스’라고 불리는 개별 공조 사업을 진행해 왔다.
북미 시장 공략 강화를 위해 지난해 5월 미국 공조 업체 레녹스와 합작법인도 설립했다.
이를 고려할 때 이번 플랙트 인수는 사실상 공조 사업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예컨대 기존의 빌딩 통합 제어솔루션(b.IoT·스마트싱스)에 플랙트의 공조 제어 솔루션을 결합해 서비스의 수익성을 제고하고 안정성도 높이는 식이다.
노태문 삼성전자 DX부문장 직무대행은 5월 14일 “AI, 데이터센터 등에 수요가 큰 중앙공조 전문업체 플랙트를 인수하며 글로벌 종합공조 업체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며 “고성장이 예상되는 공조 사업을 미래성장동력으로 지속 육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플랙트 인수 발표에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무엇보다 2017년 하만(80억 달러·당시 기준 약 9조 원) 이후 8년 만에 나온 조 단위 빅딜이라는 점에 이목이 쏠렸다.
그동안 삼성전자는 “수년째 대형 M&A가 없다”는 지적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빅딜이 하루빨리 끝마쳐야 하는 일종의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대형 딜의 부재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사법 리스크에 따른 리더십 부재와 연관 지어져 해석되는 것도 부담이었다.
실제로 이 회장의 경영 시계가 사실상 멈춰 있었던 지난 7~8년 동안 삼성은 이렇다 할 M&A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는 시장에 삼성의 성장이 정체돼 있다는 시그널을 줬다.
분위기를 바꾸고 건재함을 증명하려면 결과물이 필요했다.
삼성전자 경영진은 기자간담회를 포함해 수시로 M&A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형태는 질문이었지만 뼈 있는 지적, 혹은 은근한 압박이기도 했다.
질문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삼성이 한 뼘 더 도약하기 위해선 적극적으로 빅딜에 나서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재계에서는 M&A가 기업이 가장 빠르게 몸집을 키우고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안으로 통용된다.
삼성이 지난해 ‘반도체 겨울’을 맞으며 이 같은 분위기가 더욱 짙어졌다.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선 M&A로 기술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회사 안팎에서 나왔다.
경영진의 답변은 늘 똑같았다.
“적극 검토하고 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기대해도 좋다.
” 하지만 빈손으로 연말을 맞이하기 일쑤였다.
모처럼 소식이 들려와도 시장의 기대에 부합하는 사이즈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M&A 성공 사례를 이야기할 땐 늘 2017년 하만이 소환됐다.
고(故) 한종희 전 부회장은 3월 19일 주총에서 “미래 성장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지속적으로 M&A를 추진했다”면서도 “대형 M&A 성과를 내지 못한 것도 사실”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를 두고 “이재용 회장이 각종 사법 리스크로 법원을 오간 탓에 온전히 회사 경영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회사의 미래를 위해 수조 원대 자금을 투자하는 의사결정이 최고 경영진의 오케이 사인 없이는 성사되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거시경제 악화 등은 부수적 요인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이 회장은 2016년 국정농단 사태 이후 10년 동안 한시도 사법적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나마 올해 초 부당 합병·회계 부정 혐의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숨통이 좀 트였다.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글로벌 경영활동의 빈도와 보폭을 확대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같은 맥락에서 삼성전자의 플랙트 인수는 사업적 측면을 넘어 이 회장의 완전한 경영 정상화가 임박했단 사실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반도체, 의지만으로 인수 어려워…그러나 연내 성과 자신 빅딜에 대한 반가움과 별개로 물음표도 하나 따라붙었다.
왜 주력 사업인 반도체 M&A는 감감무소식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이 늘어갔다.
삼성전자는 플랙트 인수 발표 일주일 전인 5월 7일 미국 자회사 하만을 통해 미국 헬스케어 기업 마시모의 오디오 사업부(사운드유나이티드)를 3억5000만 달러에 인수한다고 밝혔다.
일주일 간격으로 이뤄진 두 건의 M&A가 모두 가전과 관련된 셈이다.
앞서 품은 레인보우로보틱스(로봇)와 옥스퍼드 시멘틱 테크놀로지스(AI), 소니오(메디텍)도 미래 성장산업 카테고리에 들어가지만, 반도체와의 연관성은 떨어진다.
삼성전자에 지금 당장 시급한 건 반도체 경쟁력 회복인데, 이를 제외한 주변 산업군에서만 M&A 성과가 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전 부회장은 “반도체는 주요 국가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고 인수 승인 과정에서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대형 M&A가 쉽지 않다”고 설명한 바 있다.
민감도가 높은 전략산업 특성상 삼성전자의 인수 의지만으로 완주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는 취지다.
  특히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갈수록 격화하면서 양쪽 눈치를 모두 봐야 하는 삼성으로선 적극적으로 인수 대상을 물색하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산업 특성상 성장잠재력이 큰 기업이 매물로 나올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M&A를 통한 기술경쟁력 회복이 어불성설이라는 지적도 있다.
동시에 ‘낙관론’도 들린다.
삼성전자의 M&A 의지가 어느 때보다 확고한 만큼, 시간적 여유를 갖고 기다려볼 만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전 부회장은 3월 주총에서 “글로벌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는 환경에서 새로운 기술과 역량 확보는 지속적 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이라며 “올해 반도체 분야에서 반드시 성과를 이뤄내겠다”고 빅딜 가능성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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