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항일의 기억]민족 각성의 기억을 품은 부산광복기념관을 가다
● 차별 대우‧통보식 임금 삭감에 동맹파업 나선 노동자들
● 반찬값 아껴 나라 빚 갚고, 혼숫감으로 태극기 만들어
● “노동자·학생·여성 합심한 항일운동, 민족 각성 이끌어”
올해는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독립한 지 꼭 80년이 되는 해다.
‘신동아’는 광복 80년을 맞아 전국의 항일 관련 현충 시설을 찾아 소개하는 ‘광복 80년 : 항일의 기억’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와 함께 각 현충 시설에 대한 디지털트윈(리얼 3D VR 디지털 미디어)을 제작해 공개한다.
<편집자 주> 부산 서구에 있는 부산광복기념관은 2000년 8월 15일 광복 55주년을 맞아 문을 열었다.
홍중식 기자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부산광복기념관] 바로가기 ‘부산’이라는 지명은 옛 부산포에서 비롯됐다.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성된 군사 요충지였던 부산포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운명이 뒤바뀌었다.
조선의 첫 개항지가 되면서 일본인 거주지와 상권이 형성된 것이다.
철도·은행·학교 등 근대 시설이 속속 들어섰고 바다를 매축한 후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식민 세력의 침투와 경제적 예속이 드리워져 있었다.
경제 발전과 식민 지배의 억압이 공존한 모순적 상황 속에서 부산의 독립운동은 전개됐다.
2000년 8월 15일 광복 55주년을 맞아 문을 연 부산광복기념관은 이러한 항일의 역사를 한자리에 담은 공간이다.
부산 서구 민주공원에 자리한 이곳은 부산항 개항부터 1945년 해방까지,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지나온 도시의 기억을 품고 있다.
기념관 곳곳에는 일제강점기 부산 시민들의 삶과 저항, 자유를 향한 염원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차별 대우‧통보식 임금 삭감에 동맹파업 나선 노동자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과 함께 조선의 첫 개항지가 된 부산에는 철도·은행·학교 등 근대 시설과 공장이 속속 들어섰다.
사진은 당시 부산진 공장 일대. 홍중식 기자 부산광복기념관 2층에는 지역 항일운동의 흐름을 따라 △애국계몽운동 △3·1독립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 주제별 전시실이 구성돼 있다.
각 전시실은 당대의 사진과 유물, 보조자료 등이 시대별로 정리돼 있어 지역 독립운동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해 온 김혜진 문학박사는 “부산의 독립운동사를 알면 한국 독립운동사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전시실을 한 바퀴 둘러보면 그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달에 10원 내지 15원의 품삯으로는 가족은 고사하고 한 사람도 살 수 없다.
” 전시실 벽면에 걸린 1921년 9월 29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현장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을 잃은 조선인들은 항만과 방직·고무공장 등 부산의 산업현장으로 몰려들었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은 팍팍했다.
일본 운수업자들은 조선인의 임금을 일본인과 차별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불경기를 이유로 거듭 임금 삭감을 ‘통보’하며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결국 참다못한 5000여 명의 부두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대규모 동맹파업에 나섰다.
김 박사는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다른 지역의 파업을 촉발하는 등 전국 노동자들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며 “이들의 파업은 불합리한 식민경제 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노동 현장을 무대로 하는 독립운동의 또 다른 형태였다”고 설명했다.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은 도시 노동자가 집단으로 일어선 최초의 대규모 항일 노동운동이었다.
이는 식민지 억압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일깨운 불씨가 됐으며, 이후 부산노동동맹회 창립(1922)과 인쇄직공총파업(1925) 등으로 이어졌다.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박시연과 학생 9명은 3·1운동의 불꽃을 부산 전역으로 확산시켰다.
사진은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일제 몰래 항일운동을 준비 중인 모습을 재현한 디오라마. 홍중식 기자 “나라이 있는 뒤에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는 뒤에 나라이 있는지라. 외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우리 대한 강토 삼천리를 보존키 어려워라.…충군애국지심이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우리도 우선 살림에 절용하여 조석 반선가에 매일 삼사푼씩만 감하여도 일월지간에 신화 20전가량이나 될 것이니….” 좌천리 감선의연 부인회의 설립 취지서에 담긴 구절이다.
부산 항일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여성의 적극적 참여로, 1907년 전국적으로 펼쳐진 국채보상운동에서 두드러졌다.
부산의 경우 부산상무회의소 회원들이 동래부 국채보상일심회를 결성하며 선구적 역할을 했으나, 지역 여성의 참여 또한 절대 뒤지지 않았다.
좌천리 감선의연 부인회, 영도 국채보상부인회 등 지역 여성단체가 잇따라 조직돼 “반찬값을 아껴 국채를 갚자”는 구호 아래 모금 운동에 나선 것이다.
부녀자들은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나랏빚을 갚겠다”는 의지 아래 반찬값을 3~4푼씩 절약하며 국채보상금운동에 힘을 보탰다.
관련 기록물을 살펴보면 부인회는 물론 지역 기생들까지 적극 동참하며 조국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919년 전 국민의 가슴에 독립의 불을 지핀 3·1운동의 중심에도 부산 여성들이 있었다.
일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그 주역이다.
3월 2~3일경 서울에서 비밀리에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받은 부산의 학생대표단은 부산상업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일신여학교를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관련 움직임을 감지한 일제 당국이 3월 11일 강제 휴교령을 내려 사전에 차단하려 했지만, 결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학교라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감시가 느슨했던 틈을 이용해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박시연과 학생 9명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한 것이다.
학생들은 전날 기숙사에서 혼숫감으로 준비했던 옥양목으로 태극기 100여 장을 만들어 뒀다.
태극기를 손에 든 학생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함성은 좌천동 일대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신여학교의 만세 시위는 부산 최초의 학생 주도 시위로 기록되며, 이후 부산 전역으로 만세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부산의 3·1운동 참가 인원과 시위 횟수는 경기도와 황해도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로 많았다고 한다.
학생들의 항일 열기는 해방 직전까지 이어져, 1940년 11월 23일 이른바 ‘노다이 사건(1940년 일제강점기 부산에서 일본군 장교 노다이가 주심을 맡은 경남 학도 전력 증강 국방 대회에서 편파 판정에 항의하며 부산상고와 동래고 학생 약 1000명이 항일 학생운동을 일으킴)’으로 불리는 부산항일학생운동으로 다시 한번 타올랐다.
부산광복기념관 위패봉안소에는 순국선열(47위)과 애국지사(421위)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468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홍중식 기자 부산광복기념관 전시실을 거닐다 보면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와 해방에 이르기까지 부산이 걸어온 항일의 역정을 따라가게 된다.
그 여정의 끝에서 마주하는 공간이 바로 ‘위패봉안소’다.
이곳에는 순국선열(47위)과 애국지사(421위)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468위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매월 1일 부산지방보훈청이 주관하는 참배 행사가 열리며. 이날이 아니더라도 방문객은 현장 안내에 따라 참배할 수 있다.
부산광복기념관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으로도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다.
백기환 광복회 부산지부장은 “부산은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항구라는 이유로 침탈의 최전선이었지만, 동시에 저항정신을 키워온 요람이기도 했다”며 “노동자·학생·여성·상인이 합심한 부산의 항일운동은 한 도시의 투쟁을 넘어 민족 전체의 각성을 이끌었다”고 말했다.
이어 백 지부장은 “부산이 품어온 항일의 기억과 정신이 세대를 넘어 이어질 때 비로소 온전한 가치로 빛을 발할 것이라 믿는다”고 덧붙였다.
부산 주요 독립운동가 항일운동의 주역 박재혁. 홍중식 기자 ■ 박재혁(1895~1921) 1913년 구세단을 조직해 항일 잡지를 발간. 120년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 건국훈장 독립장. 항일운동의 주역 박차정. 홍중식 기자 ■ 박차정(1910~1944) 일신여학교 재학 시절 여러 차례 동맹휴학을 주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의 단장으로 활동. 건국훈장 독립장.
[3D] 침탈의 최전선 부산, 항일운동 요람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