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특집 | ‘존중’이 사라진 대한민국] 30년 전 상호 존중하던 정치인들은 어디로…
● 1950년 북한이 남침 준비할 때도 국회의장서 난투극
● 1990년대 정치지도자들, 상대를 국정 동반자로 여겨
● 배석 없이 회담 후 의견 일치 내보인 김대중-이회창
● 왜 했는지 의문이었던 윤석열-이재명 영수 회담
● ‘독설’ 여당 대표와 야당 철저히 무시한 법사위원장
● 갈등을 원한으로 끌어올려 사회로 내뿜는 韓 정치
10월 13일 국민의힘 의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추미애 법사위원장에게 조희대 대법원장 이석을 요청하며 항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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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렸다.
이미 전임 위원장 두 명을 탄핵 발의로 사퇴시킨 더불어민주당은 이진숙 후보자도 낙마시키려 했다.
회의장은 적개심으로 가득했다.
12명이나 되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의원들이 돌아가며 이 후보자의 약점을 캐려들었다.
방통위원장으로서의 능력이나 정책 검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필자는 참고인으로 소환돼 청문회 현장을 지켜봤다.
과거 취재기자로 들어갔을 때 본 국회 풍경과는 크게 달랐다.
국민의 공복(公僕)이라던 의원들이 증인을 범죄인 다루듯 대하는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공직 후보자더러 “뇌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모욕하는 발언도 들었다.
대한민국 정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는지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건국보다 먼저 시작된 갈등
정치권의 갈등과 분쟁은 대한민국이 세워지는 순간에도 있었다.
1948년 8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거의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었지만, 각계의 조각평은 악평 일색이었다.
“내각이라기보다는 이 박사 비서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김양수 국회부의장), “대통령의 독재도 좋으나 민의에 이반된 데 실망한다”(김영동 의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할바에야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김광섭 공보국장). 이 대통령이 월남한 이윤영 의원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가 국회에서 거부당했는데도, 실향민 단체 이북애련(以北愛聯)은 “내각에 이북 출신이 없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의원들은 내각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개헌으로 이승만 정권을 끌어내리고 싶어 했다.
1950년 3월 민국당 의원 28명이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했다.
투표 결과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표로 재적의원 3분의 2에 미달돼 부결됐다.
민국당 지도부가 수차례 개각으로 자신들의 이해가 반영되자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자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권이 66표나 된 데서 알 수 있듯 의원들의 반감은 상당했다.
갈등은 활극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1950년 4월 19일자 한 신문기사 제목이 ‘국회의장(國會議場)에 또 난투극(亂鬪劇), 명패(名牌)가 공중비행(空中飛行)’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김문평 (민국당) 의원이 등단하여 나는 이 문제에 말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이진수 (국민당) 의원이 공산당을 운운하니 부득이 말한다고 전제한 후 확실한 근거나 증거가 나타나기 전에 공연히 떠드는 말만 듣고 국가경제에 중대 영향을 미칠 문제를 말하다가는 이진수 의원 자신이 공산당보다 더 악질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고 화살을 도로 돌려보내자 성미 급한 이진수 의원 ‘무엇이 어째’ 하고 탁상의 명패를 두어 번 부서지라고 두들기다 드디어 단상의 김문평 의원을 향하여 던졌으나 김 의원은 맞지 않고 전기 스탄드를 넘어뜨린 명패는 바로 단상 앞에서 열심히 기록하던 속기사 이호용 군 이마에 명중되어 피를 흘리고 어쩔 줄 모르자…” 북한이 4월 10일 스탈린의 남침 허가를 받고 병력과 무기를 집결하기 시작했는데 대한민국 국회에서 의원들은 명패나 던지고 있었다.
민주주의 성숙과 상호 존중
이후 대한민국이 비약적 발전을 이뤄가는 중에도 정치권의 갈등과 대립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민주주의가 성숙해 가며 정치권에도 변화가 생겼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이 일부 나타났다.
1993년 말 이만섭 국회의장이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새해 예산안과 정당법 안기부법 통신비밀보호법 통과를 서둘러달라고 부탁했다.
오랜 야당 생활을 거친 김 대통령이었지만 취임 첫해 의욕적인 국정 운영이 야당에 발목 잡힌 게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만섭 의장은 거절했다.
옛날에는 날치기를 반대했지 않았느냐며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했다.
김 대통령은 서운했겠지만, 결국 예산안도 법안도 합의 처리됐다.
그해 12월 2일 ‘동아일보’는 국회 정치관계법심의특위 여야 의원들이 정당법과 통신비밀보호법에 합의한 뒤 오찬을 함께 하며 자축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안기부법을 놓고 본회의에서 다시 육박전을 벌인 뒤 12월 8일 이마저 합의 통과시켰다.
여야 의원들이 공식 석상에서 우호적 제스처를 취하는 일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1997년 8월 여야 3당은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개혁 협상을 시작했다.
당초 8월 5일 상견례를 겸한 국회 정치개혁특위 첫 회의를 열고 정치자금법과 통합선거법 개정 소위를 구성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민주당 의원들이 항의하며 회의장을 점거했다.
신한국당, 새정치 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 1년 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한 민주당을 제외하고 특위를 만들었던 것이다.
정치개혁특위는 계속 공전했다.
그러다 8월 26일 민주당 의원들이 전당대회 참석을 이유로 자리를 뜨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몇 번의 결렬 위기를 겪었지만 10월 29일 목요상·박상천·이정무 3당 원내총무와 김중위 특위 위원장이 두 법의 마지막 쟁점에 합의했다.
회담을 마친 뒤 네 사람은 환한 표정으로 손을 맞잡고 사진 촬영에 응했다.
1999년 3월 17일 여야 총재 회담을 위해 청와대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서로 반갑게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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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들이 서로 싸우면서도 선을 지키고 양보할 줄 알았던 것은 당시 정치지도자들의 가치관이 지금과 달랐던 이유도 있었다.
그들은 상대를 국정의 동반자로 치켜세울 줄 알았다.
또한 정중하고 진지한 협상의 대상으로 대했다.
김대중 총재의 평화민주당(평민당)은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고립되었다.
유일한 야당이 된 평민당의 반발로 정국이 경색되자 6월 17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총재의 여야 영수 회담이 개최됐다.
두 사람은 배석자 없이 2시간 반 동안 각종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때로는 고성이 오가며 얼굴을 붉혔다고 전해진다.
회담을 마치고 함께 도가니탕으로 식사한 뒤 헤어지면서 김 총재가 “빈손으로 돌아가게 돼 앞날이 걱정스럽다”고 말하자 노 대통령이 “앞으로 자주 만나 협의하자”고 답했다.
국내정치 분야는 그랬지만 외교와 대북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조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김 총재는 “이번 회담은 구체적인 성과를 얻는 것보다 정치적인 분기점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시간이 흘러 1999년 3월 17일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여야 영수 회담이 열렸다.
정권교체 이후 1년 넘게 여야의 극한 대립이 이어지던 때였다.
아침 일찍 조찬을 겸해 만난 두 사람은 3시간 동안 배석자 없이 대화했다.
회담을 마친 뒤 김 대통령은 “여야가 건전한 파트너로서 나라를 위해 바람직한 정치 풍토를 만들어나가자는 데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말했다.
이 총재도 “진솔하게 여러 의견을 나눴다”면서 “이번 대화가 정국 경색을 풀고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시 절멸의 대상으로
그런데 역사가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지는 않는다.
한국의 정치 문화 역시 그랬다.
2022년 대선이 끝난 뒤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여야 영수 회담을 요청했다.
윤 대통령은 여야 대표와 다자 회담을 하자며 사실상 이를 거절했다.
국민의힘에서는 ‘대통령이 범죄 피의자와 면담할 때가 아니다’라는 극한 표현도 사용했다.
그러다 2024년 4월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대패하고 나서야 양자 회담이 성사됐다.
회담에서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
인사말이 끝나자 이재명 대표가 A4 용지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 채 상병 특검, 이태원 참사 특별법, 김건희 여사 의혹 등 회담에서 내놓을 주장이 모두 들어 있었다.
방송사들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이 대표가 15분간 원고를 낭독하는 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서 있어야 했다.
회담은 양측에서 3명씩 배석한 가운데 2시간 10분 동안 진행됐다.
회담이 끝난 뒤 민주당 측은 “상황 인식이 안이하고, 국정 기조를 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회담 내내 윤 대통령이 거의 혼자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정국은 오히려 경색됐고 영수회담을 왜 했는지 의문스러운 지경이 됐다.
민주당은 국회 다수당의 지위를 무소불위 권력처럼 휘둘렀다.
민주당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승리하자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모두 갖겠다고 고집했다.
수십 년의 관행을 깨겠다는 것이었다.
1987년 이후 여야는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의석수에 따라 배분했다.
특히 법안 처리의 관문인 법사위원장이 중요한데, 김대중 정부 때 여당인 국민회의가 제1당 한나라당에 양보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이 야당인 한나라당에 다시 이를 양보하면서,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1, 2당이 나누는 게 확고한 관행이 됐다.
그런데 2020년 민주당은 이를 무시했고 협상이 교착되자 아예 18개 상임위원장 모두를 차지해 버렸다.
4년이 지나 22대 총선에서도 민주당이 압승하자 또 국회의장과 법사위·운영위·과방위원장을 모두 갖겠다고 주장했다.
상임위원장 독식을 경험했던 국민의힘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나누어주는 7개 자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8월 21일 추미애 의원이 이춘석 의원을 대신해 법사위원장이 됐다.
그리고 야당이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며칠 뒤 열린 법사위 회의에서 추 위원장은 안건에 대해 야당과 협의는커녕 내용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국민의힘 의원들을 법사위 소위 어디에 배치할지 추 위원장 마음대로 결정했다.
국민의힘이 나경원 의원을 법사위 간사로 내정하자 추 위원장은 간사 선임 안건을 상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표결에 부쳐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로 부결시켰다.
국정감사 때 조희대 대법원장의 서면 답변서가 오자 여권 의원들에게만 보여주고 국민의힘 의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2023년 2월 민주당은 이태원 참사 책임을 물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을 탄핵 소추했다.
장관이 탄핵 소추된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었다.
그것은 탄핵 사태의 시작이었다.
민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 최재해 감사원장,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등을 잇달아 탄핵 소추했다.
모두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기각됐지만 몇 달씩 직무가 정지됐다.
이동관·김홍일 방통위원장과 이상인 방통위 부위원장 등은 탄핵 소추가 진행되자 자진사퇴했다.
건국 이후 74년 동안 21건에 불과했던 탄핵 소추가 윤석열 정부 들어 29건이나 발의됐다.
결국 이것이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불렀다는 분석이다.
윤 대통령은 헌재 탄핵심판 최후진술에서 “거대 야당의 공직자 줄탄핵은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차원을 넘어 헌정 질서 붕괴로 치닫고 있다”고 주장했다.
갈등을 원한으로 끌어올려 사회로 내뿜는 존재
거대 야당에 의한 국정 마비 논란의 대표적 예가 이진숙 방통위원장에 대한 파상 공세였다.
민주당은 국회의 방통위 상임위원 추천을 막아 방통위를 2인 체제로 만들었다.
그나마 위원장이 공석이 되면 방통위는 ‘합의’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이진숙 위원장 인사청문회는 사흘이나 계속됐다.
매일 자정에 차수를 변경해 새벽까지 청문회를 계속했는데 의원들은 돌아가며 쉬고 오지만 후보자는 초긴장 상태로 버텨야 했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런 청문회를 거쳐 방통위원장에 취임하고 이틀 만에 탄핵 소추됐다.
탄핵 기각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법을 만들어 방통위 이름을 바꾸면서 이진숙 위원장의 직위를 빼앗았다.
그리고 다음 날 경찰이 수갑을 채워 연행했다.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도 모욕적 처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은 5월 14일 국회 법사위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선 직전 한덕수 총리 등과 만나 이재명 후보 사건 처리를 논의했다는 제보자의 녹음을 공개했다.
그런데 제보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흘 전 한 유튜브 채널에서 방송한 녹음을 전달받은 것인데, 조작 논란이 있고, 해당 유튜버도 제보자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9월 30일 조 대법원장에 대한 청문회를 강행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4명을 증인으로 소환했는데, 소환에 불응하자 강하게 압박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대통령도 갈아치우는 마당에 대법원장이 뭐라고”라는 글을 올렸다.
2024년 7월 26일 사흘째 열린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의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최민희 위원장이 이 후보자를 향해 “뇌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자 이 후보자가 불쾌해하며 손을 번쩍 들어 “사과를 원한다”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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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대 대법원장은 10월 13일 국정감사장에 나와 관례대로 인사만 하고 퇴장하려 했다.
그런데 추미애 법사위원장이 이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90분 동안 침묵하는 조 대법원장에게 민주당 의원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 파기환송 경위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대법원장 감금’이라고 반발하자 소동이 일었다.
그 와중에 최혁진 무소속 의원은 조희대 대법원장의 일부 재판이 ‘친일사법’이었다며 조 대법원장 얼굴을 합성한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림을 카메라 앞에 들어 보였다.
팻말 우상단에 조 대법원장 얼굴을 개 몸통에 붙인 그림까지 있었다.
국정감사는 곳곳에서 고성과 욕설로 얼룩졌다.
과방위 국감에서는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이 자신의 전화번호가 포함된 문자메시지를 공개한 김우영 민주당 의원에게 “한심한 XX”라고 말했다.
법사위 국감에서는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왜 반말을 하느냐는 신동욱 국민의힘 의원의 항의에 “너한테 해도 돼”라고 대답해 소란이 벌어졌다.
국회의원과 대변인뿐 아니라 당대표들까지 막말 논란을 일으킨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9월 21일 장외집회에서 “여당 대표라는 정청래는 이재명과 김어준의 똘마니를 자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윤석열 내란 수괴 똘마니 주제에 얻다 대고 입으로 오물 배설인가”라며 “냄새나니 입이나 닦아라”라고 썼다.
특히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전당대회 과정에서 ‘국민의힘 해산’을 주장했다.
지난 8월 4일 당선된 직후에는 “지금은 내란과의 전쟁 중이며, 여야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악수도 사람하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 대표는 당선 인사를 다닐 때 국민의힘 지도부와는 만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국민의힘 해산 청구를 실제로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오래전 한 국회의원이 방송에 나와 “정치인들은 왜 항상 싸우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었다.
“사회의 갈등을 국회 안으로 가져와 대신 싸우고 해법을 찾는 게 정치다.
” 그때는 그 말이 옳았지만 지금은 궤변이 된 것 같다.
지금 한국의 정치는 갈등을 원한으로 끌어올려 사회로 내뿜는 존재가 아닌가 우려된다.
‘3류 정치’가 대한민국 정신문화 뒤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