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특집 | ‘존중’이 사라진 대한민국] ‘틀딱’ ‘꼰대’ ‘할매미’ 이어 ‘영포티’ 비하까지…
● 군대 군을 깔보는 사회적 시선에 전역 장교 증가
● 학교 교사 존중 않는 학생·학부모, 교실 무너져
● 사법부 여당 대표 “대법원장이 뭐라고”, 법관 권위 흔들
● 존중은 건강한 공동체와 민주주의 조성의 필수 조건
조희대 대법원장이 10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 출석해 여야 의원간 고성과 욕설이 오가자 눈을 감고 있다.
뉴스1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대, 직업,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 흔히 목격되는 사회가 됐다.
몇 해 전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노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일상용어처럼 확산하고 있다.
‘틀딱(틀니 딱딱거리는 노인)’, ‘꼰대(권위적인 어른)’, ‘할매미(시끄럽게 떠드는 할머니를 매미에 빗댄 표현)’ 등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농담처럼 사용되면서 노인 혐오 문화를 강화한다.
2021년 4월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 ‘연령주의 관점에서의 노인인권과 노인 혐오의 실태와 문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노인에 대한 사회구조적 차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5개국 중 2위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사회에 만연한 어른 비하, 군인 깔보는 시선
비하의 대상은 노인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젊은 마인드로 살아가는 40대’를 지칭했던 ‘영포티’라는 신조어조차 온라인에서 ‘철없이 20대를 따라 하는 나잇값 못하는 꼰대’라는 조롱과 비하의 의미로 굳어졌다.
2~3년 전까지 이 단어는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오픈 마인드로 살아가는 중장년’을 긍정적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세대 간 갈등과 경제적 양극화가 겹치면서 어느샌가 젊은 층 사이에 부정적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군인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일반 시민이 군인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표현하며 비행기 일등석을 양보하거나, 레스토랑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에게 식사비를 대신 내주는 등의 예우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군인을 ‘군바리’ ‘군무새(군대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떠드는 것을 비하)’ 등이라 부르며 멸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이로 인해 군 내에서도 이상 신호가 뚜렷하게 감지된다.
국민의힘 유용원 의원이 지난 7월 공개한 ‘최근 5년 매해 전반기 군 간부 희망 전역 현황자료’에 따르면 정년이 남았음에도 전역을 신청한 군 간부의 숫자는 2025년 상반기 기준 2869명으로, 2021년 상반기 1351명에 비해 약 2.1배 증가했다.
특히 육군 부사관 전역 희망자는 5년 새 2.5배, 위관장교는 3배 이상, 해병대 장교는 4배 가까이 급증했다.
유 의원은 “이들의 군 이탈 가속화 현상은 우리 안보의 중추인 군 조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우려했다.
이탈자가 급증한 이유는 낮은 보상과 과도한 업무, 군 조직문화에 대한 불만 등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위상 저하에 따른 사기 저하다.
사실 과거에도 군 간부에 대한 보상은 높은 수준은 아니었고, 근무지를 전국적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등의 고충은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청년이 군 간부를 꿈꿨던 건 사회적으로 존중받는다는, ‘명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국방부와 국회는 군 간부의 복지와 사회적 인식 회복을 위한 정책적 대응을 촉구하는 상황이다.
존중받지 못해 떠나는 교사, 명예 실추된 법관
초·중·고교 교사의 권위 붕괴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학생의 폭언·폭행, 학부모의 과도한 요구 등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 교사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10월 7일 OECD가 발표한 ‘교원·교직 환경 국제 비교 조사(TALIS) 2024’에 따르면, 한국 교사 중 35%만이 사회에서 존중받는 직업이라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교사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세계 최고 수준인데, ‘학생의 위협과 언어폭력’이 스트레스 요인이라는 응답은 30.7%로 OECD 평균(17.6%)의 약 1.7배에 달했다.
또한 ‘학부모 민원 대응’을 주요 스트레스 요인으로 꼽은 비율은 56.9%였다.
교사 10명 중 2명(21%)은 ‘교사가 된 것을 후회한다’고 답했다.
직업적 만족도가 떨어진 교사가 교편을 내려놓고 학교를 떠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김대식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7월 발표한 ‘최근 5년간 시도별 중도 퇴직 교원 현황’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24년 전체 중도 퇴직 교사 수는 7988명으로 2020년 6704명에 비해 19% 증가했다.
김 의원은 “교사의 권위를 회복하고 제도적 지원을 마련해 교직의 사명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의 막말 공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대상을 가리지 않고 행해지던 무례한 언사가 사법부의 수장에게 향했을 때 법관의 권위는 심각하게 실추됐다.
9월 말 더불어민주당 3대(내란·김건희·채 상병) 특검 특별위원회가 추진하던 ‘내란전담재판부 설치 법안’에 대해 법원이 사실상 반대 의견을 제시하자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통령도 갈아치우는 마당에 대법원장이 뭐라고?’라는 글을 올려 조희대 대법원장의 탄핵을 시사했다.
이는 사법부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발언으로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도 볼 수 있다.
이후로도 민주당의 대법원장에 대한 공격은 계속됐다.
10월 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여당 주도로 수차례 소환 요구 끝에 조희대 대법원장을 국정감사에 출석시켰다.
조 대법원장은 증인 채택에 불응하면서도 참고인 신분으로 참석해 인사말을 한 뒤 이석하려 했으나, 추미애 위원장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질의를 강행했다.
이후 여당 의원들은 조 대법원장을 자리에 붙잡아 두고 집중적인 정치 공세와 조롱, 욕설성 발언을 이어가면서 크게 모욕을 줬다.
조 대법원장은 헌법상 삼권분립과 법관 독립성 원칙을 근거로 재판 내용에 관해 증언을 거부하며 침묵했고, 여야 간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혼란 속에 90분간 국감이 진행됐다.
이를 지켜보는 일선 법관들은 참담함을 드러냈다.
지방법원에서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대통령에 대한 대법원 재판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법원장에게 막말을 서슴지 않고, 국회 국정감사에까지 불러 수모를 줘버리면 앞으로 어떤 국민이 일선 판사들의 판결을 존중하겠는가”라며 “단순히 대법원장 한 사람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 전체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존중받아 마땅할 일선 법관들의 명예까지 실추시키는 행태”라고 우려를 표했다.
대한민국에서 존중의 실종은 사회 각층에서 깊은 상처와 분열을 낳고 있다.
개인이 서로를 존중하지 못할 때 공동체는 붕괴 위험에 직면하며, 이는 심각한 사회적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고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하는데, 결국 인정의 결핍이 분노와 정치적 양극화를 낳는다”고 분석했다.
존중이 상실된 사회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 그는 “각 개인이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체계(시민교육·공공서비스·토론문화·법치주의 확립)를 마련해야 하며,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만드는 것, 그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정치 문화가 필수”라고 제시했다.
결국 존중이란 단순히 예의범절의 문제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공동체 조성과 민주주의 확립의 필수 조건으로 인식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우리 국민 모두가 상호 존중과 포용의 문화를 진지하게 모색해 나가야 더 나은 대한민국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분노와 정치적 양극화 낳는 인정 결핍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