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특집 | ‘존중’이 사라진 대한민국] 청춘을 닮고 싶은 어른, 어른을 잃은 청춘
● 긍정적 단어 ‘영포티’, 조롱의 밈이 되다
● 젊음 집착하는 사회, 어른의 미덕은 실종
● 불투명한 부동산·일자리·연금…청년 불안↑
● ‘불완전함’과 ‘책임’ 함께 수용해야 어른
● 기성세대 책임 자각하고 청년들에게 길이 돼줘야
최근 청년세대와 40대를 중심으로 이른바 ‘영포티(young forty)’ 논란이 심화하고 있다.
‘마블 로고가 들어간 모자를 쓰고 나이키 신발을 신은 40대’가 영포티의 전형적 이미지다.
AI 생성 이미지
몇 달 사이 ‘영포티(young forty)’라는 단어가 매섭게 소비되고 있다.
영포티는 원래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자기 관리와 소비에 적극적인 40대를 지칭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조롱과 혐오,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젊음을 과시하려는 중년의 모습이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형상으로 읽히며, 온라인에서는 밈이 된 것이다.
애초에 이 용어는 2010년대 중반 마케팅업계에서 만들어낸 개념이었다.
당시의 영포티는 새로운 중년의 전형이었다.
회사에서는 능숙하게 일하고, 자기계발에도 열정적이며, 패션과 여가를 즐기면서도 디지털 환경에도 뒤처지지 않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단순히 나이만 많은 기성세대가 아니라, 여전히 활력이 넘치고 세련된 소비자로 그려졌던 것이다.
‘젊게 사는 40대’라는 표현은 오히려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이미지였다.
긍정적 단어 영포티, 조롱의 밈이 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흐름이 달라졌다.
청년세대는 자신들의 한참 선배이자 직장 상사 격 되는 영포티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표시하며, 그들이 청년을 ‘흉내’ 낸다는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만들어내는 각종 패션 트렌드를 왜 중년이 흉내 내느냐는 것이다.
나아가 최근 이 밈이 폭발적으로 유행하게 된 계기에는, 20대 신입 사원에게 고백하는 40대 상사의 사연 같은 것들이 있었다.
각종 직장인 커뮤니티 등에 이러한 사연들이 퍼지면서, 청년들의 세계에 대한 일종의 ‘침범’이 이뤄진 것에 대한 거부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40대는 그들대로 반응해 양상은 세대 갈등으로 번졌다.
40대 입장에서는 나이키, 아디다스, 마블 같은 브랜드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누리던 것이지, 청년들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는 항변이 이어졌다.
나아가 이는 청년들이 젊어 보이는 중년들에게 경계심과 시기심,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청년 남성들이 40대를 일종의 경쟁 상대로 인식하면서 노골적으로 혐오를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40대가 청년들을 정말 흉내 내는지 그렇다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 반대로 청년들이 40대에 대해 어떤 경계심이나 시기심을 느끼는 것인지 딱 잘라 규정하긴 쉽지 않다.
단순히 영포티 밈 하나만 두고 이야기하기엔 그 이면에 너무 다양한 40대와 20대가 있다.
실제로 20대와 연애하려고 하는 40대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냥 자연스럽게 과거부터 가졌던 스타일을 유지하는 40대도 있을 것이다.
40대를 경쟁 상대로 인식하는 20대도 있겠지만, 그냥 혐오를 즐기는 20대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밈을 둘러싼 다양한 마음을 무리하게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이 현상을 둘러싼 조금 더 큰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단순히 ‘마블 로고가 들어간 모자를 쓰고 나이키 신발을 신은 40대’를 향한 공격성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훨씬 큰 흐름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어른’에 대해서다.
영포티 논란은 표면적으로 패션이나 혐오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그 밑바닥에는 ‘어른의 멸종’이라는 더 근본적 문제가 깔려 있다.
청년들에게 비치는 중년의 모습을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자. 그들은 2018년 방영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주인공이나, 과거의 여러 작품에서 형상화된 ‘어른들’의 모습과는 어딘지 달라 보인다.
물론 묵묵히 삶에 대한 책임감과 지혜를 가지고 성숙해 가는 어른들도 없진 않겠지만, 더 쉽게 눈에 띄는 건 어딘지 ‘청춘’에 집착하는 모습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나이 든 얼굴을 미워하며 사진 한 장을 찍어도 모두 필터를 씌우고 최대한 어려 보이는 얼굴만을 계정에 올린다.
나이를 불문하고 성형과 시술, 보정 애플리케이션, 필터 사진으로 나이를 지워버린 채 한 살이라도 더 어린 이미지만을 자랑한다.
“누가 엄마이고 딸인지 아시겠나요”라는 타이틀로 유행하는 각종 쇼츠와 릴스는 우리 시대의 ‘정신’을 보여준다.
나이 들고 싶지 않다는 것,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외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어린아이 같음’이 선호된다.
중년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청년이나 아이들이 누리는 문화를 함께 누린다.
닌텐도, 웹툰, 애니메이션, 모바일 게임 등은 누구나 거부감 없이 청년들과 섞여 누리는 것이 됐다.
과거에 어른들이 “그런 건 아이들이나 하는 거지”라고 하는 바로 그런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왜 어른이 된다고 정신까지 늙어야 하나? 재밌는 건 다 같이 즐길 수도 있는 거지”라는 게 당연시됐다.
아이(kid)와 어른(adult)의 합성어인 ‘키덜트(kidult)’라는 말은 더는 수치도 예외도 아니다.
어른과 청년 간의 구별 짓기,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 아파트 등 주요 자산의 대부분을 기성세대가 보유하면서 청년들의 서울 진입 기회가 줄었고, 이는 청년세대 전반의 불안감을 키웠다.
사진은 10월 16일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아파트 단지 광경. 뉴스1
불투명한 부동산·일자리·연금…청년 불안↑
청년들은 자신보다 10~20년 앞선 사람들을 보며 때론 존경하고, 롤 모델로 삼고, 그들처럼 성숙하며 지혜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눈앞의 앞선 세대는, 자신들과 같은 모습으로, 더 나아가 자기들처럼 되고자 기꺼이 ‘퇴행’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청년세대 입장에서 이는 하나의 ‘결핍’이 된다.
따라가야 할 존재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결핍, 즉 어른의 부재다.
한발 더 나아가면, 이들 앞선 세대는 청년들에게 생존을 건 경쟁 상대이기도 하다.
서울 아파트 등 주요 자산의 대부분을 기성세대가 보유하면서, 청년들의 서울 진입 기회가 메말랐다.
기존 자산은 끊임없이 가치가 오르고, 청년들은 역시 그와 함께 오르는 월세 등 주거비로 월급을 소모한다.
인공지능(AI)으로 일자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대체되면서, 청년들이 있어야 할 신입 사원 자리도 줄어들고 있다.
‘쉬었음’ 청년 50만 명 시대는 이런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성세대가 정규직으로 법적 보호를 받는 반면, 청년들이 진입해야 할 새로운 자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고갈돼 가는 국민연금 역시 향후 청년들을 더욱 착취하게 되는 형태가 되리라는 불안도 팽배하다.
이런 현상들은 기성세대가 청년세대를 이끌고 중요한 책임을 지며 모범이 되던 시대가 저물고,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고 대립하는 시대가 왔다는 걸 상징하고 있다.
청년들은 가장 불안한 시대에, 의지하고 따를 존재도 없이, 가장 자원이 없고 힘도 없는 상황에서 앞선 세대 전체와 경쟁한다.
청년세대가 느끼는 불편함은 단순히 패션 감각의 차이나 소비 행태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어른의 부재’다.
이는 곧 가야 할 길의 상실이고, 지도의 멸실이다.
결국 봐야 할 것은 단순히 우습게 만들어낸 ‘밈 이미지’를 갖고 조롱하고 혐오하는 현상 이상의 사회 현실이다.
왜 청년들이 굳이 그들을 조롱하는 자리까지 나오게 됐는지, 그 이면의 현실과 불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혐오와 조롱에 취한 청년세대를 질타하기 이전에, 과연 우리 사회에 부재한 어른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게 먼저일 수 있는 것이다.
영포티 논란과 어른의 부재를 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최근의 현상이 하나 있다.
바로 저출생 문제다.
청년들은 더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다.
흔히 집값, 일자리, 교육비 같은 구조적 문제를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정서적 이유가 숨어 있을 수 있다.
바로 ‘부모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정서다.
결혼과 출산은 ‘앞서 살아온 세대의 삶’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선택이다.
그러나 청년들이 부모 세대에서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라” “아빠처럼 살지 마라”다.
올해 초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도 이 대사가 등장한다.
애순이가 딸 금명이에게 “그래, 엄마처럼 살지 마”라고 말하는 장면이 울림 있게 사람들 마음에 남았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청년들은 평생 들어왔던 그 말을 실천하고 있다.
닮고 싶은 어른이 없다는 것, 따를 만한 어른의 모습이 없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와도 결이 닿아 있다.
청년들이 중년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도 언젠가 되고 싶은 모습이 아니라 조롱부터 하고 싶은 형상이 된 것은 이처럼 ‘어른의 자리에 들어선 공백’을 봐야 할 문제다.
누구도 어른이 되고자 하지 않고, 어른이 되지 말라고 권유하는 시대에, 어른의 자리에 있는 존재는 조롱의 ‘밈’이 된다.
‘불완전함’과 ‘책임’ 함께 수용해야 어른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른이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청년들에게 ‘저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어른, 불완전하지만 책임을 지고, 자신보다 뒤따라오는 세대를 지켜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아이의 웃음소리 없는 대한민국이 황야처럼 자리 잡을 것이고, 세대 간의 갈등도 심화하며,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될 것이다.
한때 큰 화제를 모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가 있다.
김장하 선생은 평생 진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많은 이들을 도우면서도 자기를 위해서는 옷 한 벌 쉽게 사지 않는 모습으로 감동을 주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어른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직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외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 살이라도 더 어려지기만을 갈망하며, 그로 인해 청년들의 세계까지 침범하는 그런 어른이 되지 않을 수는 있다.
청년들에게 길을 열어주며, 빼앗기보다는 도와주고, 그들을 존중하며 함께 갈 사회를 만드는 길을 택할 수는 있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어른으로 가는 길’이라는 글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과는 다르다.
나이를 먹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어른이란, 자신이 여전히 미숙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떠안는 사람”이라고 썼다.
누구도 완벽한 어른일 수는 없다.
저마다의 내면에는 어린아이가 있고, 유치하거나 이기적인 면모도 가득하다.
그럼에도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그러한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성세대로서 어떤 책임을 자각하고 떠안는 일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청년들에게도 하나의 길이 돼, 그들이 잃은 지도에 흐릿한 표지판이나마 세워주는 일일 것이다.
이번 논란이 단순히 세대 갈등이나 혐오 생산이라는 관점을 넘어, 이와 같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영포티’ 조롱 이면엔 ‘어른 없는 사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