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특집 | ‘존중’이 사라진 대한민국] 염치없는 사람들의 세상, 한국 사회가 위태롭다
● ‘부끄러움’은 사회 지탱하는 현대적 안전장치
● 이명박 ‘탐욕’, 문재인 ‘위선’, 윤석열 ‘수치심 부정’
● 李 위한 배임죄 폐지는 수치심 상실한 극단적 형태
● 염치없는 행위 보상받는 순간 사회는 균형 잃어
● 진영 논리, 성공 지상주의, 나르시즘이 수치심 갉아먹어
9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중 추미애 위원장의 회의 진행에 항의해 국민의힘 나경원·곽규택 의원 등이 퇴장하고 있다.
뉴시스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그것이 발각되면 구차한 변명으로 모면하려 하는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다.
최근의 한미 관세협정이 단적인 예다.
협상이 끝났을 때는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타결”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전혀 다른 결과가 드러났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사과하지 않았고,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실보다 변명, 진실보다 가짜 뉴스가 앞서는 풍경, 이것이 바로 수치심을 잃은 정치의 민낯이다.
이 현상은 정치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법조계는 힘 있는 자에게는 관대하고, 힘없는 자에게는 가혹하다.
같은 범죄도 피고인의 지위와 배경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현실은 정의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염치를 허문다.
경제 영역에서는 횡령과 배임 사건이 터져도 “기업활동 위축”을 핑계로 책임소재를 흐리려 하고, 심지어 배임죄 자체를 없애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일상에서도 불법 주차를 하고도 떳떳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도 당당하다.
온라인에서는 막말과 혐오 발언이 흔한 풍경이 됐다.
그 속에 흐르는 공통된 정서는 “창피할 게 뭐가 있냐”다.
수치심의 사회적 기능
부끄러움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 장치이자 공동체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은 진화 과정에서 형성된 장치다.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해 누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제동을 거는 힘. 그것이 바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인 염치(廉恥)다.
수치심이 있어야 사람은 거짓말을 멈추고 약속을 지키며 탐욕을 절제한다.
그러나 이 감정이 사라지면 책임 대신 변명, 성찰 대신 공격이 자리 잡는다.
결국 뻔뻔함이 능력처럼 포장되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 취급을 받는다.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균형추를 잃고 신뢰는 빠르게 무너진다.
법과 제도가 외부의 울타리라면 수치심은 내부에서 작동하는 마지막 감시자다.
결국 공동체를 유지하는 실제의 힘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거는 제동인 염치인 셈이다.
염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공동체를 버티게 하는 기둥이다.
따라서 염치없는 사회는 법으로도 제도로도 버틸 수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위태로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수치심은 어떻게 사라졌을까
우리 사회에서 수치심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 번의 침묵, 한 번의 외면, 한 번의 자기합리화가 쌓이고 쌓여 감각 자체가 마비되면서 사라져 갔다.
뜨거운 물속의 개구리처럼 수치심을 서서히 잃어갔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상실 자체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 사회의 수치심은 세 정권을 거치면서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이명박 정권은 수치심을 ‘비효율’로 간주했고, 문재인 정권은 도덕을 내세우면서도 ‘자기모순적’ 행태를 반복했다.
윤석열 정권에 이르러서는 아예 수치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총체적 ‘도덕 붕괴’의 국면에 진입하게 된다.
세 정권을 거치며 우리는 수치심이라는 감각이 어떻게 공적 삶에서 무너져 내리는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뻔뻔한 탐욕이, 문재인 정권에서는 기만에 찬 위선이, 윤석열 정권에서는 수치심의 완벽한 부정이 이어졌다.
권력은 잘못을 감추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데 익숙해졌고, 국민은 분노하거나 체념하다가 점차 무감각해졌다.
수치심이 사라진 사회는 뻔뻔함을 무한정 허용하는 사회다.
부정과 불의가 반복돼도 그것이 뉴스가 되지 않는 사회,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설명되지 않는 사회, 결국 진실은 조롱당하고 도덕은 구시대의 유물이 된다.
수치심을 갉아먹는 첫 번째 요인, 진영 논리
우리 사회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가 된 첫 번째 이유로는 갈 데까지 간 진영 논리를 들 수 있다.
이 진영 논리 때문에 자기 진영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해도 전혀 비난하지 않는다.
비난하기는커녕 오히려 보호하기에 바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사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잘못했다고 욕하기는커녕 세상에 없는 일을 한 것처럼 칭찬해 주고, 모든 게 상대 진영의 음모와 조작일 뿐이라는데 부끄러워할 게 뭐가 있겠는가. 지지자들이 잡범을 민주투사처럼 떠받들어 주고 모든 것이 검찰의 조작이라고 떠들다 보면, 설사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주눅이 들었던 당사자들조차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시 나오는 경우를 우리는 이미 누차 봐왔다.
수치심은 개인이 잘못을 인정하게 만들고 사회적 규범을 지키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안전장치다.
누군가 실수했을 때 변명 대신 사과가 나오는 것은 이 안전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문제는 이 안전장치가 이미 느슨해졌다는 점이다.
그 결과, 잘못을 저질러도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맞서며 진영의 방패 뒤에 숨으면 모든 것이 용인되는 풍토가 이미 자리 잡고 말았다.
진영 논리는 수치심을 마비시킨다.
잘못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우리 편을 지켰다’는 명분으로 칭찬받는다.
염치없는 행위가 보상받는 순간 사회는 정상적 균형을 잃는다.
두 번째 요인, 물질주의와 성공 지상주의
물질주의가 팽배하면 수단과 방법은 점차 중요하지 않게 된다.
“돈이 말을 하면 진실이 침묵한다”는 영국 속담은 이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이병주 작가가 소설 ‘황백의 문’에서 말했듯 “돈이 발언하면 사람은 침묵한다”. 돈 앞에서 양심이 침묵하고 윤리가 퇴장하며 수치심은 설 자리를 잃는다.
오늘날처럼 물질이 인간의 가치를 재단하는 사회에서 수치심은 사치처럼 여겨진다.
물질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성과만 남으면 된다며 부끄러움조차 불필요한 감정으로 취급한다.
이때 수치심은 공동체적 가치가 아니라 경쟁에서 불리해지는 감정으로 치부된다.
결국 ‘뻔뻔해야 살아남는다’는 교훈이 세대를 가로질러 전수된다.
이와 함께 성공 지상주의는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를 결과 중심으로 고정한다.
“결과로 말해” “성공한 불의가 실패한 정의보다 낫다” 이런 말들이 정당화되면서 정직함과 책임감, 겸손 같은 미덕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의 변명’처럼 취급된다.
수치심은 이제 실패자의 감정으로 여겨지고,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현실적인 사람’으로 칭송받는다.
많은 이들이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수치심을 차단하기 위한 심리적 방어술이다.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점점 더 교묘하게 스스로를 속이는 법을 익힌다.
세 번째 요인, 나르시시스트의 증가
갑질하는 인간들 입에서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튀어나오는 말이 있다.
“내가 누군지 아냐. XXX이다”라는 말이다.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니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게 취급해 달라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데도 상대가 신통치 않게 나오면 욕설을 퍼붓거나 물건을 내동댕이치는 식으로 공격적으로 나가는 것이 나르시시스트들의 전형적인 행동 방식이다.
이처럼 자기애가 너무 강해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고 특별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을 우리는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라고 한다.
시쳇말로 ‘관종(관심 종자)’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나르시시스트라고 보아도 좋다.
우리 사회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로 넘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로는 이러한 나르시시스트가 대폭 증가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SNS 시대에 자기과시와 이미지 관리가 일상이 되면서 자기애적 성향이 강화된 결과다.
타인의 시선은 부끄러움의 기준이 아니라 ‘좋아요’와 ‘팔로어’를 늘리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사과를 모욕으로 여긴다.
이들은 잘못을 고치기보다 책임을 전가하거나 자기 이미지를 방어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이런 까닭에 이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임상·사회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이 강한 사람일수록 죄책감과 수치심 반응이 약하다.
그 대신 자기합리화와 공격적 태도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결국 최근 지도층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뻔뻔한 태도와 책임 회피는 우리 사회가 배출한 나르시시스트라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보아도 좋다.
되찾아야 할 존중과 염치
“염치없는 사람들의 세상”이란 말은 결코 추상적인 수사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 뉴스를 통해 보는 현실이며 내일을 경고하는 신호다.
배임죄 폐지 논란은 대표적 장면이다.
기업과 공직자의 권한 남용을 처벌하는 형법상의 배임죄를 폐지하면 현재 진행 중인 재판 상당수가 ‘면소’ 판결로 끝난다.
대통령 관련 재판만 해도 네 건이나 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면소는 재판 중 소송 조건이 없어지면서 판결을 내리지 않고 소송을 종결하는 제도다.
이는 법리를 법정에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입법권을 동원해 재판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다.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책임을 지는 대신 아예 죄목 자체를 없애버리려는 행태야말로 수치심 상실의 극단적 형태다.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집권층의 사법부에 대한 집요한 공격은 단순한 사법부 흔들기가 아니다.
12개의 혐의로 다섯 건의 재판을 받고 있던 인물이 대통령이 된 현실에서 비롯된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압박이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어야 마땅할 인물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 이 같은 사태는 충분히 예견됐고, 지금은 그 예견대로 한 사람을 위해 사법 체계를 난도질하는 후안무치한 광경을 우리는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여권이 결국 법이라는 제동장치마저 풀어버리려는 상황까지 오고 만 것이다.
이대로라면 법치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가 흔들리고 삼권분립 자체가 위태해진다.
오늘의 상황은 수치심을 잃은 사회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끔찍한 장면이다.
수치심은 사적 감정이지만 공적 공간을 지키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수치심이야말로 법과 제도보다 먼저 작동해 규칙이 닿지 않는 영역을 스스로 통제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 감정이 사라질 때 법은 남지만 정의는 무너지고 규칙은 작동하지만 신뢰는 사라진다.
역사는 언제나 부끄러움을 잃은 집단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제도와 규범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을 떠받치는 ‘최소한의 염치’가 사라지면 그 집단은 신뢰를 잃고 와해의 길로 들어선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나 구호가 아니다.
부끄러움을 회복하는 일이다.
부끄러움은 과거의 미덕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현대적인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지도층이 먼저 본보기를 보여줄 때 국민도 서로의 시선을 의식하며 작은 염치나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