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특집 | 93년 전 여성의 삶] 1932년 ‘여기자 좌담회’를 다시 읽다
● 1932년 4월에 모인 여성 기자 8명
● 직업 차별, 남성 중심 사회를 향한 경종
● “男은 무정조, 女에 정조 강요하는 횡포”
● “전차에서 담배 피우는 것은 참으로 밉습니다”
● “남자더러 집안일, 기자 노릇하라면 할 사람 있나?”
● 모순과 불평등의 일상, 사회 변혁 꿈꾸는 역사적 기록
1932년 ‘신동아’ 5월호에 실린 ‘여기자 좌담회’ 사진과 기사. 신동아
최의순:
“모(某)씨를 방문 갔었는데 마침 미리 전화를 걸지 못하고 찾아갔더니 방금 외출하여야겠다고 못 만나겠다고 딱 잡아뗐어요. 그러나 기자로서 그렇다고 그냥 돌아온대서야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문밖에 서서 기다렸지요. 조금 있더니 모씨가 나오시는 고로 전차 정류장까지 동행해 오면서 간단히 내가 물으려던 말을 다 물어보았지요. 그때 어찌나 땀을 뺐는지 영 잊히지 않아요.”
허영숙:
“남자더러 집안일도 돌아보고 또 기자 노릇도 해보라고 해보시오. 할 사람이 있나? 그러나 여자 기자는 그렇게 하지요. 그러니까 도리어 여자가 나은 셈이지요. 여자는 너무 눌리니까….”
김일엽:
“남자는 무정조 하면서 여성에게 정조를 강요하는 것이지요. 남자는 무상 출입하면서 여성은 집에 구겨 박아두는 것이 모두 그들의 횡포이지요.”
조현경:
“전차 안에서 옆에 앉거나 마주 앉아서 담배 피우는 것은 참으로 밉습니다.
싫어하는 기색을 보면 더 피우지요.”
박은혜:
“술 많이 먹고 사실 취해서 그런다면 좀 낫지요. 그냥 건성으로 술은 취하지 않고 취한 체하며 못되게 구는 것은 참으로 눈꼴 틀려요.”
권유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일부러 놀라게 하거나 또는 공연히 종을 울리는 것도….”
1932년 4월 2일 토요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본사 회의실에는 전·현직 여성 기자 8명이 모여 다양한 주제로 좌담을 이어갔다.
그들은 직업 차별, 연애와 정조, 독신과 이혼, 의복과 오락, 그리고 남성 사회에 대한 비판 등 당시 사회가 금기시하던 불문율까지 거침없이 논하며 시대의 틀을 흔들었다.
허영숙은 “여성은 집안일과 사회활동을 동시에 해낸다”고 강조하며 이중 노동의 현실을 부각했고, 김일엽은 “남성은 무정조일 수 있으면서도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비판했다.
이날 좌담회에 참석한 기자는 윤성상(전 조선일보사 기자), 허영숙(전 동아일보사 기자), 김일엽(전 불교잡지사 기자), 박은혜(아이생활사 기자), 조성경(여론사 기자), 권유순(부인공론 기자), 최정희(삼천리사 기자), 최의순(동아일보사 기자). 좌담은 설의식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신동아’ 제작 총괄)가 사회를 맡았고, 주요섭 주간과 김자혜 기자가 좌담 내용을 정리했다.
이름만 들어도 그 무게감이 전해진다.
당시 기자라는 직업도 드물었지만 여성 기자는 더욱 그랬다.
기자의 길에 들어서려면 상당한 학력과 가정 배경, 남다른 열정이 필요했다.
그들에게 기자라는 직업은 새로운 지적 여정의 출발점이자 낯선 언론계에서 더 나은 교육과 성취를 꿈꾸며 열정을 불사르는 현장이었다.
“구여성은 어떻게든 답변 받는데 신여성은…”
기자가 된 동기를 묻는 질문에는 서로 다른 사연이 이어졌다.
허영숙과 최정희는 각각 의학과 교육을 전공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했다.
허영숙은 자신이 쓴 글을 다른 이들이 읽는다는 자부심과 호기심 때문에 기자가 됐고, 최정희는 많은 문인과 교류하며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가 기자의 길을 걷는 동력이었다.
반면 윤성상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직업이라 택했을 뿐”이라며 직업 선택에 특별한 목적은 없었다고 했다.
취재 경험을 묻는 대목에서는 공통적으로 대면(對面) 취재가 가장 어렵다고 꼽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 기자 모두가 여성보다는 남성을 상대하는 일이 훨씬 수월하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여성은 사적으로는 친해지기 쉽지만, 공식 자리에서는 말을 아껴 질문을 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끌어내기 쉽지 않다고 했다.
‘구여성’은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답변을 유도할 수 있지만 ‘신여성’은 대답을 유도하기에 무척 까다롭다는 대목에선 당시 취재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이날 좌담은 1932년 ‘신동아’ 5월호에 실리며 당시 여성들의 일상이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구조와 맞닿아 있음을 공적으로 증언했다.
90여 년 전 여성의 일상은 현실의 모순과 불평등을 드러내는 현장이었고, 이 좌담은 각자의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사회변혁을 모색한 중요한 역사 기록으로 평가된다.
그들은 사적 대화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의 목소리를 공적 공간에 또렷하게 새겼다.
좌담은 직업 문제부터 가정 제도, 남성 사회 비판까지 다양했다.
김일엽은 ‘남성은 무정조일 수 있으나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비판하며 숨겨진 저항 의식을 드러냈다.
‘신동아’가 이 좌담을 지면에 실은 것은 1930년대 식민지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도 공론이 될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이었다.
엄격한 검열 속에서 직접적인 정치 비판은 불가능했으나, 여성 좌담은 당시 사회구조의 모순을 이해하고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오늘날 이 좌담을 다시 읽는 것은 그 질문들이 시대를 넘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왜 여성은 눌려야 하는가?’ ‘제도는 왜 여성을 배제하는가?’ ‘여성은 어떻게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 물음은 지금도 우리 앞에 반복해서 다가오고 있다.
일상에 드리운 제도의 그림자
윤성상:
“(여성은) 사회제도가 나빠서 눌리는 거예요.”
최정희
:
“지금은 여자의 권한이 떨어지지만 미래에는….”
허영숙:
“경성 안에서 단발한 이가 10여 명만 있대도 나는 모자를 벗고 다니겠어요. 나는 깎았지마는 머리 깎는 것을 찬성할 수는 없어요. 거리에 나다니기도 창피하고 어디 가나 무슨 배우나 그런 사람으로 보니까요.”
좌담 논의는 ‘일상에 드리운 제도의 그림자’라는 관점으로 확장할 수 있다.
남녀 차별, 정조, 독신, 의복, 오락 등은 겉으로는 개인적이고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제도와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제도의 벽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잘 드러냈다.
이러한 대화는 여성 심리, 감정 노동, 도덕규범에 관한 집단적 인식으로까지 확장됐다.
당시 단발머리와 서구식 의복은 단순한 외형적 변화가 아니라, 몸을 통한 사회적 감시와 규율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통해 사회 규율과 감시를 체감하며, 이를 의식적으로 흔들고자 했다.
여성의 오락 공간 요구와 독신·이혼 논쟁도 사생활 문제를 넘었다.
이는 자기결정권과 사회적 규범이 충돌하는 실질적 갈등 현장이었다.
좌담회에서 윤성상이 “불행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자녀에게 해롭다”고 말한 것은 가정 질서의 절대성을 흔들며 여성 주체권 행사가 사회에 미치는 파장을 보여준다.
좌담 마지막에 나온 남성 비판과 풍자는 사회와 젠더 질서를 해체하려는 ‘전략적 풍자’였다.
남성 일탈은 용인되지만 여성의 작은 일탈조차 엄격히 심판받던 현실을 유머로 꼬집은 것이다.
이 좌담회는 여성들의 일상 속에서 제도의 실체를 끌어내려는 시도이자, 자신들의 선택을 사회 변화와 연결하려는 실험이었다.
공론은 곧 변화를 예고했다.
‘신동아’가 이 기록을 지면에 남겼다는 사실은 여성들이 만든 작은 파문이 공적 공간에 새겨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당시 ‘신여성’이라는 이름은 단순 유행어가 아니라 시대 변화를 예고하는 문화 상징이자, 여성들이 자기결정권으로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는 선언이었다.
여성 기자들이 던진 질문은 오늘날 사유와 토론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공론장을 열어젖히는 힘이 된다.
‘신동아’의 역사는 이렇게 기록된 발언과 질문이 생명을 얻는 과정이다.
이 목소리는 현재를 향해 말을 걸며, 그 물음에 응답하는 일은 독자 개인의 책임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로 자리한다.
사회구조 증언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좌담은 여성들의 일상 경험을 사회구조에 대한 증언으로 기록한 현장이기도 했다.
가정, 도덕, 법률의 경계를 넘어 여성의 자기결정과 사회적 주체로서 성장함을 드러냈다.
잡지는 이 기록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 역시 공적 공간에서 지속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앞서 살펴본 사례들이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
글을 맺으며 남은 과제는 독자의 응답이다.
1932년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 대답은 지금 우리의 몫이다.
한편으로는 좌담회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를 살아가던 ‘신여성’들의 집합체였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쉽게 지워지던 목소리가 공론장 속으로 진입한 결정적 전환점이자 여성 삶과 사회구조 변화가 만나는 교차로였다.
“여성이 눌리는 건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윤성상).”
이 한 문장은 좌담자들의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그들의 발언은 단순 불평이 아니라 집안일과 직업의 이중노동, 가정 내 종속, 법과 제도가 부과한 장벽, 그리고 노골적 남녀차별 등 모두 여성의 일상에 스며든 구조적 모순이었다.
여성의 몸은 가장 집요한 규율 대상이었다.
‘단정함’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옷차림과 태도는 사실상 사회적 감시였다.
“단발머리를 하고도 모자를 눌러써야 했던 경험”(허영숙), “단정하지 않으면 게으르다는 시선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김일엽)은 여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사회적 시선에 노출됐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현실에서도 여성들은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테니스나 탁구 같은 서구식 스포츠를 남녀가 함께 즐겼으면 하는 열망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오락 공간 요구(허영숙)는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갈증이었다.
독신과 이혼 문제는 더욱 도발적이다.
당시 독신 여성은 비정상, 이혼은 파탄으로 낙인찍혔다.
그러나 좌담에 참석한 기자들은 불행한 결혼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아이를 왜 어머니가 길러야 하느냐. 부모 모두 책임이 있다”는 윤성상의 발언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선언이었다.
“전차에서 불 꺼지면 슬며시 손목을 잡는 남자”
좌담 마지막 질문은 “남성에게 불만이 무엇인가?”였다.
농담 같지만 대담의 정점이었다.
여성 기자들은 남성 게으름, 무책임, 술과 유흥, 여성 멸시, 정조에 대한 이중 잣대를 거침없이 지적했다.
언뜻 웃자고 한 말 같지만, 그 안에는 날카로운 풍자가 숨어 있었다.
남성의 일탈은 사회적으로 용인받는 반면, 여성의 작은 일탈은 곧 낙인과 심판 대상이었다.
그 불평등을 유머로 비틀어 기록한 것이다.
“전차에서 불이 꺼지면 슬며시 손목을 잡는 남자도 있다”는 허영숙의 발언에 “그때는 죽도록 꼬집어줘라”(윤성상)는 대목에선 웃음꽃이 핀다.
윤성상은 “일본에 비하면 그래도 조선은 군자국(君子國)이다.
일본에서 학교 갈 때 기차를 타고 가면 여러 곳에서 손이 들어온다”며 한국 남성이 그나마 났다고 결론 짓는다.
여성들은 가정, 사회, 일상, 제도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합의점을 모색했다.
그들의 발언은 단순 회고담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질문이며, 여성의 자기결정과 사회 주체로서의 성장은 잡지의 기록을 통해 계속 되살아난다.
‘신여성’이라는 이름은 단지 패션이나 연애 취향을 넘다.
이는 문화를 넘어 자신을 바꾸고 동시에 사회를 흔들려는 의지였다.
좌담회는 그 의지의 집단적 표현이었다.
개인의 작은 선택이 제도를 뒤흔들었고, 작은 대화가 사회적 변화를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우리가 지금 이 기록을 다시 읽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 목소리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들의 용기 있는 발언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위한 지속적인 대화와 실천의 시작점이었다.
1932년 당시 정치적 목소리를 내면서도 검열을 피하려면 교양, 문학, 예술, 역사 같은 우회 담론이 필요했다.
‘신동아’는 직접 현실 비판과 민족적 자각을 드러내지 않고도 문화지라는 명목아래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잡지 실험’은 폐간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이 좌담회는 그 단절 속에 남은 강렬한 기록이었다.
잡지 역사를 되짚는 일은 단순히 연표를 늘어놓는 작업이 아니다.
남긴 말과 끝내 하지 못한 말을 함께 살피며, 그사이 침묵에 담긴 의미를 더듬는 일이다.
‘신동아’에 실린 문장 하나, 사진 한 장, 사소해 보이는 기획 기사 하나까지 모두 당대 사고방식과 사회 분위기를 비춘다.
검열의 시대, 기록의 우회로
1936년 ‘신동아’ 9월호에 실린 손기정(아래), 남승룡 선수 사진. ‘신동아’는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거나 보이지 않게 편집해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신동아
‘신동아’는 1931년 일제강점기 엄격한 검열 속에서 탄생했다.
총독부의 감시와 검열은 날카로웠고, 언론은 작은 ‘일탈’에도 바로 제재를 받았다.
그럼에도 지식인들이 자아를 탐색하고 새로운 목소리를 내는 장이었다.
‘신동아’가 창간 당시 내건 슬로건은 ‘문화주의(文化主義)’와 ‘망라주의(網羅主義)’. 이는 교양지라는 외피 아래 검열을 피해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추는 공간임을 뜻했다.
하지만 이런 긴장과 실험은 1936년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강제 폐간되면서 한순간에 끊겼다.
‘신동아’는 1936년 9월호에 베를린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손기정·남승룡 선수의 소식을 전하며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우거나 보이지 않게 편집한 뒤 보도해 당시 일제 권력의 분노를 촉발한 것이다.
작은 그림 하나가 시대를 흔들 만큼 당시 언론은 언제나 칼날 위에 서 있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맞는 ‘신동아’ 창간 94주년은 단순한 역사 기념이 아니다.
단절된 흐름과 억눌린 목소리를 꿰매어 복원하는 시간이며, 그 단절의 틈새에서 더욱 또렷하게 남은 기록이다.
사회제도가 만든 일상의 차별, 그 벽을 넘는 개척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