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 이재명 수차례 강조한 ‘높은 문화의 힘’, 원작자는 이광수
● 국한문 혼용체 주로 사용하던 김구
● 정치 도전하며 자서전 쉽게 고쳐줄 사람 필요
● 당대 최고 문필가 이광수에 백범일지 윤문 맡겨
● 이광수, ‘친일 문인’ 꼬리표 떼려면 김구 협력 절실
● 해방 이후 특정 사상 내세울 수 없던 이광수
● 백범일지에 반공산주의 담은 ‘나의 소원’ 첨부
● 진정한 문화강국되려면 과거사 객관적으로 봐야
“문화강국의 첫 입구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략) 우리 대한민국이 높은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주요 국가로 발돋움하고 있습니다.
” 10월 13일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높은 문화의 힘’이라는 구절이다.
이 대통령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앞서 10월 1일 대중문화교류위원회 출범식에서도 “백범의 꿈처럼 대한민국이 높은 문화의 힘으로 세계 평화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언급했고, 8월 15일 광복절 80주년 경축사에서도 “침략의 아픔에도 높은 문화의 힘을 염원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이 대통령은 주로 문화강국을 언급할 때마다 ‘높은 문화의 힘’이란 구절을 즐겨 인용해 오고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출처는 어디일까. 백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의 뒤에 부록으로 딸린 ‘나의 소원’이라는 산문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월 26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 김구 선생 제76주기 추모식’에서 학생들이 헌화하고 있다.
뉴스1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 ‘높은 문화의 힘’이라는 문구는 백범의 것일까. 만약 그 말이 ‘독립운동가’ 김구의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이름 없는 아무개가 아니라 흔히 ‘친일파’ 내지 ‘민족 반역자’로 여겨지는, 현대 한국어 형성의 역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의 작품이라면,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의 소원’의 저자, 이광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소원’은 춘원 이광수의 글이다.
김구가 초안을 써주고 이광수가 다듬은 것이 아니라 ‘나의 소원’의 저자는 이광수다.
‘높은 문화의 힘’이라는 아름다운 어구의 원작자는 엄밀히 말해 김구가 아니라 이광수다.
이는 필자의 독단적 주장이 아닌, 상투적 표현을 빌자면 \'학계의 정설\'이다.
국문학, 역사학, 그 외 다양한 인문학계의 연구자들이 이견 없이 합의한바,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은 백범 김구의 글이 아니라 춘원 이광수가 써서 덧붙인 내용이다.
실제로 ‘정본 백범일지’의 저자인 도진순 창원대 역사학과 교수, ‘김구 청문회’의 저자인 재야 역사학자 김상구,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 많은 이들이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 가운데 방 교수의 논문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와 이광수 윤문의 의미(춘원연구학보 제17호, 2020)’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 “어느 면에서 보면 확실히 ‘나의 소원’은 이광수가 김구의 자서전 저자명 아래 그리고 그의 승인 아래 자신의 생각을 삽입해 놓은 흔적이 역력한 텍스트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광수는 김구의 자기 생애 서술의 역작 백범일지를 ‘윤문’하는 가운데 자신의 반공산주의적 사상을 ‘알게 모르게’ 기재해 넣은 것이다.
” 일제강점기의 문인 춘원 이광수. 동아DB ‘나의 소원’이라는 문제적 산문이 백범일지의 일부로 유통되게 된 과정은 이렇다.
김구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사람이었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우리말이 아닌 한문으로 배웠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그가 스스로 써 내려갔던 자서전의 초고는 국한문 혼용체였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대표적 글이 기미독립선언문이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김구가 처음 쓴 백범일지도 이와 유사한 형태였다.
해방된 조국에서 활발히 정치 활동을 하고 있던 김구는 본인의 자서전 출간을 정치적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었다.
더 많은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자신의 글을 쉬운 문체로 바꿔야 했다.
그 작업은 김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조력자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 가장 뛰어난 문필가인 이광수가 적임자로 낙점되었다.
왜 이광수였을까.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학도병으로 참전하라고 학생들을 부추겨 오명을 뒤집어쓴 ‘친일 문인’ 이광수에게, 왜 독립운동가 김구는 본인의 자서전 윤문을 맡긴 걸까.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광수만큼 한국어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에 국한하면 전적으로 그렇고, 오늘날까지 범위를 넓혀 보더라도 이광수만 한 필력을 지닌 문인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자서전이 널리 읽히게 하고 싶다는 실용적 목적을 놓고 볼 때 이광수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이광수 자신도 백범일지 윤문 작업이 절실했다.
대부분의 조선, 한반도의 식자층, 심지어 상당수의 독립운동가와 마찬가지로 그는 일제가 순식간에 패망할 것을 예상치 못했다.
이광수는 김구의 아우라를 등에 업고 새로 독립한 나라의 국민으로부터 ‘사면 복권’을 받아야 했다.
셋째, 김구와 이광수는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이 있었다.
앞서 인용한 방 교수의 논문에는 이러한 해설이 등장한다.
“이광수가 메이지 재학 중 방학 기간에 신민회(新民會) 황해도 지부 안악면학회에서 강사로 일한 사실을 참고하면서 이광수의 오산학교행을 ‘간접적으로 신민회의 민족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본 연구가 있다.
선행 연구를 참조하면서 김구의 원본 백범일지를 검토하고 당대의 계몽운동 및 독립운동의 흐름에 대한 상상력을 밝히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김구는 당시 안창호에 의해 주도되던 신민회 운동에 접맥되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교사로서 30대 초반의 김구와 16세 학생 이광수는 양산학교 교사와 안악면학회 강사로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에 다다를 수 있다.
” 정본 백범일지. 동아DB 우리에게 친숙한 백범일지는 이광수의 윤문 작업을 통해 1947년 출간된 백사 원판 백범일지다.
그 책 전부가 이광수의 글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백범 김구의 초고와 이광수의 작업을 비교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비록 문장은 이광수의 것이고 내용 면에서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정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다.
자서전이 출간될 때 김구가 서문을 쓰고 자신의 책으로 인정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김구의 친필본을 최소한만 편집한 판본들이 출간되어 있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직접 살펴볼 만 하다.
) 패전으로 힘 잃은 일본서 유행하던 ‘문화국가론’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충격적 사실은 따로 있다.
이광수가 김구의 이름으로 설파한 ‘문화국가론’의 기원이 어디에 있느냐다.
‘문화국가론’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담론이었다.
‘문화국가(Kulturstaat)’라는 용어의 기원은 19세기 독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보다 뒤처진 상태에서 근대 국가를 건설해야 했던 독일의 엘리트들이 다양한 국가 모델을 논의하고 검토해 나가던 중 등장한 개념 중 하나다.
일본에는 메이지 시대, 즉 20세기 초반부터 문화국가 개념이 수입됐다.
국가가 국민의 복리 및 행복 증진을 위해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의 논거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벌이면서 그 맥락이 왜곡됐다.
군국주의를 위한 국민 동원의 명분으로 ‘문화국가 건설’ 같은 구호가 동원된 것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했다.
두 발의 핵폭탄을 맞고 항복한 일본은 돈과 무력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전후 일본의 정계와 지식인은 입을 모아 ‘문화국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에서 강사로 일하는 이경희 박사의 논문 ‘신국가 건설과 문화국가론의 전개(패전 후 일본, 해방 후 한국)’에서 당시 일본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은 패전 한 달 후, 교육기본법의 원칙을 제시한 ‘신일본 건설의 교육방침(1945.9.15. 공포)’에 ‘문화국가’ ‘도의국가’를 명시했다.
심의 과정에서는 여러 의원이 한두 마디씩 ‘문화국가’를 언급했다.
일본사회당 소속 모리토 다쓰오(1888~1984)는 ‘다시 한번 국제사회로 뻗어 갈 일본의 모습이 문화국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신기할 정도로 국론의 일치가 존재한다’고 했다.
” 반면 갓 독립한 대한민국의 제헌 과정에서는 문화국가론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동시대 한국과 일본이 처한 여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에서 문화국가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존중하되 공산주의는 배격하는 나라’ 정도의 의미였다.
진정한 문화강국 되려면 과거사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백범일지 끄트머리에 이광수가 ‘나의 소원’을 첨부하고, 김구도 읽고 수긍해 출간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구와 이광수 모두 해방 후 전개된 새로운 정치 지형 속에서 본인의 행로를 개척하고 국가의 미래를 제시해야 했다.
일본에서 유행한 문화국가론을 한국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여 유통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다시 한번 방 교수의 논문을 살펴보자. “해방 이후의 이광수에게 있어 김구의 백범일지 윤문 완성 작업은 자신의 일제 말기 대일협력의 ‘죄’를 심리적으로 보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해방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사상을 내걸 수 없었던 이광수는 이 작업에서 비록 김구의 추인은 받았을지언정 반공산주의 색채가 농후한 ‘나의 소원’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 이상을 제기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 2025년 현재, 우리는 해방 후 21세기 초까지의 대한민국과는 다른 문화적 영향력을 지닌 나라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춘원 이광수가 백범 김구의 입을 빌어 설파했던 ‘높은 문화의 힘’을 떨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사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기적적인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해방, 건국, 성장 과정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투명한 시선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근대화의 첫 단추를 끼웠고, 미국이 제시한 세계 질서 속에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북한과 구공산권을 적으로 삼아 체제를 유지해왔다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최혁진 무소속 의원이 10월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조희대 대법원장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합성한 사진이 그려진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스1 애석하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와 정반대다.
‘높은 문화의 힘’이 거론된 맥락을 모르거나 일부러 도외시하는 듯한 정치 세력이 헤게모니를 잡은 후로는 더욱 그렇다.
역사를 정직하고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고 건설적인 미래를 논의해도 부족할 판에, 조희대 대법원장을 조롱하기 위해 그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합성한 이미지를 국회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제시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그저 암담할 뿐이다.
단언컨대 이것은 백범 김구가 원했던 문화 강국이 아니다.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조선말로 글을 쓰며 대중을 계몽하려 했던 이광수마저도 이런 식의 비뚤어진 태도를 보인 적은 없다.
말로만 ‘높은 문화의 힘’을 운운하지 말고, 역사 앞에 정직한 품위를 먼저 갖출 일이다.
‘높은 문화의 힘’ 말하기 전에 역사 앞 품위 갖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