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특집 | ‘존중’이 사라진 대한민국] 이기동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진단
● “싸워야 살아 남는 사회구조…존중 여유가 없다”
● 수준 낮은 정치판, 상대 공격 말 한마디의 파급력
● 개인주의 확산과 세대 갈등…타인 이해 실종
● 온라인 공간과 현실 단절로 상호 신뢰 악화
● ‘위선적 존중’도 갈등 키워…본성에서 우러나는 진정성 중요
● 욕심 절제하며 인간성 회복…“근본으로 돌아가자”
이기동 교수는 “존중이 사라진 우리 사회가 극단으로 치닫고 나면 결국 변화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윤 객원기자
2025년 대한민국 곳곳에서 ‘존중의 부재’가 심화하고 있다.
교사를 향한 학생과 학부모의 불신, 노년층과 젊은 층의 세대 간 단절, 온라인상의 익명 비난, 정치권의 상호 비방 일상화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최소한의 예의조차 사라진 현상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 배경에는 급격한 사회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개인주의의 확산과 치열한 경쟁, 성과 중심적 가치관이 사회의 기본 원리로 자리 잡으며, 성장과 발전의 이면에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 경쟁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풍토가 퍼지면서, 공동체적 관계가 약화하고 인간적 유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존중의 부재’는 단순히 예의와 규범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내적 결속력을 흔드는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위기는 경제나 정치 이전에, 서로를 존중하고 공감하는 능력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싸워야 산다’는 인식 속 존중 결여
원로 학자 가운데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이가 적지 않다.
동양철학과 유학을 50여 년간 연구해 온 이기동(74)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중이 거의 다 사라졌다”고 진단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싸워야 살아남는 구조가 됐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존중을 할 여유조차 없어졌다.
무기로 싸우든, 법으로 싸우든, 말로 싸우든 결국 이기는 게 목적이 됐다”고 개탄했다.
이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유학과 동양철학을 전공하고, 일본 쓰쿠바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오랜 세월 후학을 양성하며 연구에 몰두해 온 인물이다.
대만 국립정치대,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했고, 성균관대 교수 및 학부장, 유교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한중일 삼국의 유학사와 철학에 대한 저술과 강의를 활발히 진행하며 ‘인생교과서 공자’ ‘나의 서원 나의 유학’ 등을 집필했고, 현재 성균관대 명예교수로 동양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그에게 존중 결여 시대에 이르게 된 궁극적 원인과 근본 해법에 대해 물었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사라졌다는 지적에 동의하는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라졌다고 본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분야일수록 존중이 없다.
싸워야 이기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싸우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무기로든, 법으로든, 말로든 싸워 이기는 게 목적이 된 시대다.
특히 정치판은 말 그대로 싸움판이다.
상대를 공격하는 말 한마디의 파급력이 큰데, 이는 금세 사회 전반으로 퍼진다.
정치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교육에 있다.
교실에서 서로 존중하는 인성을 함양하도록 교육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잘 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학생이 스승을 존중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스승 또한 학생 인성을 제대로 길러주지 못하고 있다.
스승을 비하하는 학생도 문제지만 스승 자신도 학생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
교육에 헌신하기보다는 ‘왜 이 일을 하려는가’ 물었을 때 ‘직업의 안정성과 보장된 연금 때문’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국민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까’ 고민하기보다는 주도권을 쥐는 게 목표일 뿐이다.
어찌 보면 모든 국민이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물론 일부를 전체의 문제로 단정할 수 없지만 과거에 비해 존중하는 문화가 사라진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
존중이 사라지거나 약화된 대표적 사례, 혹은 현장은 어디라고 보는가.
“전 분야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개인주의가 극도로 확산하면서 타인과 관계 맺기를 싫어하는 세상이 됐다.
일례로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일수록 노인에게 인사를 안 한다.
노인이 먼저 인사해야 할 지경이다.
아이에게 ‘몇 층에 사니?’ 물어봐도 ‘안 알려줘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런 게 요즘 현실이다.
이웃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텐데, 안타까움이 크다.
물론 다른 나라에 비하면 우리나라에 아직도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등 선량한 시민의식을 가지고 상대를 존중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
앞서 교수님께서 지적했듯 정치판을 존중 결여의 현장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하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치판의 수준이 낮아진 것이 원인이라고 본다.
조선시대에도 당파싸움은 있었지만 지금이 더 심하다.
욕심 많은 사람들이 정치판에 빠져드니 권력 탈취만 생각할 뿐이다.
정치를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를 바람직하게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내가 한번은 정치인을 대상으로 특강을 한 적이 있는데, 정치란 무엇인지 근본적 이야기를 하니 들을 생각이 없더라. 그런데 표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
시끄러운 공간에서 태권도 9단이 조용히 하라고 한 소리하면 말이 먹히지만, 단수가 낮은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하면 무시당한다.
이처럼 말의 힘을 가진 사람이 되려면 내공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이르려면 시간이 걸리니 대다수 정치인들은 안 하려고 한다.
본질을 논하기보다 말싸움이 더 효과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정치판에 말싸움만 난무한다.
”
개인주의 확산과 세대 갈등…타인 이해 실종
세대 간에도 갈등이 심화하면서 존중이 결여되는 양상이다.
고령화 가속화, 청년실업, 사회보장제도의 한계 등이 심화하면서 서로를 존중의 대상이라기보다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어떻게 보는가.
“세대 갈등으로 인한 존중 결여는 오랜 시간 축적된 문제다.
그 출발은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됐다.
그 이전까지는 교회 교리하에 모두가 하나님의 딸 아들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형제 자매로서 존중했다.
오해할 것 같은데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면서 개인주의가 시작됐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개인주의가 약하고, 공동체 중심적인 사회였다.
산업화 이후 개인주의가 급격히 확산하면서 오늘날에는 형제들조차 서로를 ‘유산 상속의 경쟁자’로 보기에 이르렀다.
형을 적으로 삼을 정도이니 노인이라고 존중하겠는가. 사람들이 세계관의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생각이 다르면 싸우기만 할 뿐 화합이 되지 않는다.
세대 간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마찬가지다.
”
온라인상에서 익명에 숨어 막말과 비난을 서슴지 않는 풍토도 존중 결여를 심화했다.
2000년대 전후 온라인 문화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세태가 고착화한 것 아닌가 싶은데, 동의하는가.
“한국인에게는 약간의 나르시시즘이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하늘과 내가 하나’라는 사고가 있었고, 그게 현실에서 ‘나는 특별하다’로 표현됐다.
그래서 무시당하거나 욕먹으면 상처를 심하게 받는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온라인 공간에서 ‘악플’을 많이 남긴다.
그 결과 어떻게 됐을까. 상처가 너무 커진 탓에 자살률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가운데 1위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면서 온 국민이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
해결 방법은 자기 스스로 ‘진짜 하늘’이 되는 것이다.
내면이 부처가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
안타까운 건 온 세계가 파편화하면서 남의 불행을 보며 행복을 느끼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이다.
아직 한국은 거기까지 가지 않았는데, 한국 문화의 기저에는 ‘희생’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도 주인공이 결정적 순간에 희생하지 않는가. 해외 시청자들이 거기서 감동을 받는다.
지금 한류가 전 세계에서 반향을 일으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을 깨우치면 존중은 자연히 따르기 마련이다.
”
존중 결여는 우리 사회에 갈등 해결 비용을 발생하게 하고, 사회 구성원의 결속력을 약화한다는 점에서 국가적 문제로 번질 수 있다.
이를 어떻게 보는가.
“물론이다.
지금 정치인에게도, 교육자에게도 답이 없다.
사람들이 자꾸 이런 식으로 가면 불행해진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결국 인간은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마음이 사막화될수록 사람들은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철학이 시작될 것이라고 본다.
한류 같은 문화현상도 변화의 전조라고 볼 수 있다.
위기가 극단으로 치닫고 나면 결국 세상은 변화를 맞을 것이다.
”
존중의 본질은 ‘나 자신’에 있어…나부터 변화해야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중의 본질은 무엇인가.
“존중의 본질은 자기 안에 있다.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일화를 아는가.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보며 ‘돼지처럼 보인다’고 농담하자, 무학대사가 ‘전하는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답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는 교훈처럼 상대를 무엇으로 보는지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다.
남을 존중하려면 먼저 내가 바뀌어야 한다.
존중이나 배려를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존중하라’고 강요하면 사람들은 ‘척’만 한다.
또 배려를 강요하면 ‘위선을 행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다.
존중하는 마음이 제대로 우러나려면 먼저 자기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서로가 모두를 존중하게 된다.
법치 또한 마찬가지다.
법을 지키는 이유가 이기심에서 비롯되면 안 된다.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면 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
결국 인간성이 먼저 회복돼야 법도, 존중도 제자리를 찾는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
대한민국은 지금 존중의 회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 존중의 회복은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홍익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 뜻을 잘못 알고 있다.
홍익이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홍도익중(弘道益中)’이라고 해서 ‘도를 넓혀 중생(대중)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성을 회복시키는 일, 즉 모두가 부처가 되도록 하는 게 진짜 목적이다.
부처는 가진 것 하나 없이 밥도 빌어먹어야 하는 거지 신세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진짜 행복은 돈이 아니라 ‘인간성의 회복’에서 온다.
사람(인류)뿐 아니라 만물(동물)의 병을 없애주는 일도 존중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잘 살기 위해 만든 모든 것으로 인해 자연이 오염됐고 동식물까지 병들었다.
인간으로 인해 발생한 질병과 오염을 없애고, 생태적 조화를 되살리는 게 인간의 길이다.
이런 철학이 되살아나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고, 인간성의 회복에도 도달할 것이고 본다.
”
앞으로 미래를 이끌 젊은 세대를 비롯해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한국인에게 어떻게 비전과 실천 방향을 제시하고 싶은가.
“일단 나부터 반성한다.
대학에서 서양식 교육만 하며 살았다.
정년을 마치고 학교를 나와 보니 진짜 우리 철학, 홍익인간의 정신을 가르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서 지금 ‘TV동굴학교’라는 실험을 하고 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21일간의 마늘·쑥 수행처럼, 인간성이 무너진 현대인이 다시 ‘사람이 되는 과정’을 알리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유튜브를 통해 강의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다.
이런 교육이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
“존중의 본질은 ‘나 자신’에 있어…나부터 변화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