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특집 | ‘존중’이 사라진 대한민국] 정신분석학으로 본 ‘존중 멸종 위기’ 한국 사회
● 한국인 ‘존중받음’ 경험 121개국 중 118위
● 情 대변되는 공동체문화, 뿌리째 흔들려
● 민주화 과정에서 ‘가부장제’ 아버지 권위 거부
● 대신 파고든 ‘정치적 올바름’이 억압 장치로 작동
● 이념 다르면 ‘나쁜 대상’ 투사하는 디지털 공간
● 나쁜 도파민에 절어버린 ‘우매한 군중’ 자극
● 욕망 조율하고 사회 규범 안내하는 ‘아버지’ 찾아야
● 상대의 욕망 인정하고 나의 욕망 제한하는 ‘공생 기술’
● 생명 본질은 불완전함과 부조리…“다시 바라보자(resp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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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여론조사 기관 갤럽이 발표한 ‘2022년 세계 감정 보고서(2022 Global Emotions Report)’에 따르면, 한국인이 하루 일상에서 ‘존중받음(Treated With Respect)’을 경험한 비율은 71%로 전체 121개국 가운데 아프리카 콩고와 함께 공동 118위를 기록했다.
121개국 중 꼴찌에서 네 번째인 것이다.
‘존중’은 주관적 감정 영역이라는 점에서 보고서의 결과를 일반화하긴 어렵지만, ‘정(情)’으로 대변되는 한국 고유의 공동체문화가 최근 들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실제로 한국은 오래전부터 노인 빈곤, 노인 고독, 노인 자살 세계 1위를 지키고 있고, 최근 들어서는 ‘사법기관의 심각한 권위 실추’ ‘군복을 벗는 초급간부들’ ‘일상이 돼버린 교권 침해’ 등 법치, 국가안보, 교육 전반에서 존중의 가치가 지위를 상실해 가는 것을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존중’ 속에 투영된 욕망의 양면성
얼마 전 여당 대표의 “대통령도 갈아치우는 마당에 대법원장이 뭐라고…”라는 발언은 이념을 달리하는 디지털 군중 사이에서 에코체임버(echo chamber)로 작용했다.
그들만의 분노와 혐오가 난무하는 리그가 존중의 가치를 집어삼키고 있다.
법적 시시비비를 떠나 이는 ‘존중의 멸종’을 앞둔 한국 사회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존중은 원초적 감정에서 인류가 진화하면서 생긴 사회적 감정이며, 존중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인간 개인과 공동체의 공생이다.
‘존중 가치’의 상실은 국민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태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존중은 ‘이상화(idealization)’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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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기에 존중은 긍정적이고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시각에서 보면, 이 감정은 단순한 미덕만이 아니다.
존중 안에는 무의식적 욕망, 두려움, 동일시, 나르시시즘이 숨어 있으며, 때로는 억압과 위계의 구조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영화 ‘기생충’의 유명한 대사 “박 사장님 리스펙!”은 기생충 가족이 숨어 살면서 박 사장의 사회적 계급에 대해 맹목적 존중을 표현하는 대사로, 존중의 표현 속에 숨겨진 욕망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존중은 대개 ‘이상화(idealization)’ 과정을 통해 생겨나며, 어떤 인물을 완벽한 존재로 이상화하고,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대상관계 이론의 창시자 멜라니 클라인은 “존중은 분열된 내적 대상을 ‘좋은 대상’으로 유지하려는 욕망과 연결돼, 존중하는 대상은 무의식 속에서 이상적 자아로 기능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존중은 언제든 혐오와 경멸로 전환될 위험을 내포한다.
존중의 양면성에 대해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존중은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는 행위’인 동시에 ‘나의 욕망을 제한한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존중은 곧 자기 억압의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주체를 사회 속에 편입시키는 매개자”
존중이 사라진 한국 사회를 논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이슈는 최근 한국 사회에 빠르게 퍼진 ‘아버지의 부재’다.
오죽하면 “아버지의 무관심이 아이들을 성공시킨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인 양 진실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니 말이다.
프로이트는 “아버지는 아들의 욕망을 억압하지만 동시에 주체를 사회 속에 편입시키는 매개자”라고 주장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아버지의 이름(Nom-du-Père)’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했고, ‘아버지의 이름’은 사회에서 곧 규범과 존중의 상징적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버지가 금지를 명할 수 있는 권위가 무너질 때, 법은 무시되거나 권위만 남은 폭력으로 전락한다.
법은 초자아와 닮아 있다.
초자아는 “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개인을 억압해 법과 규범을 강제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더 큰 욕망을 자극하기도 한다.
법이 금지하는 것이 클수록, 그 금지를 깨뜨리려는 충동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무의식의 충돌은 한국의 산업화 과정과 민주화 과정에서 극명하게 대비돼 나타난다.
산업화 과정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권위적이고 무서운 존재’ 혹은 ‘늘 집에 없는 존재’로 작동하며 무의식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애정결핍과 불안을 낳는다.
반면 민주화 과정에서는 독재정권과 가부장제 권위가 동일시되면서, 아버지의 권위는 억압과 폭력으로 비쳤다.
그 결과 아버지는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됐다.
더군다나 최근 디지털 세대는 아버지를 물리적으로 가까이서 경험할 기회조차 줄어들고 있다.
스마트폰과 미디어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고, 가정 내 대화가 확연히 줄었다.
아이들은 유튜브와 SNS에서 가치관을 배우며, 아버지의 말은 점점 더 영향력을 잃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규율과 금지를 매개할 상징적 권위가 사라진 사회는 극단적 개인주의와 무규율적 혼란을 겪거나 아버지가 상징하는 법을 대신할 ‘강력한 지도자’를 찾는 집단 심리가 강화됐다.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의 가치는 존중의 가치와 함께 ‘이방인’으로 전락하게 됐다.
정치적 올바름과 트럼피즘, 중세시대 왕의 귀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은 20세기 후반부터 미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확산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당시 한국 사회에 ‘아버지의 부재’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규범이자 존중의 담론으로 활짝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치적 올바름’은 모든 시민의 존엄을 보장한다.
다양한 집단의 권리를 평등하게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이상은 ‘존중’의 근본 가치와 어쩌면 가장 닮아 있다.
인종차별적 발언, 성차별적 농담, 혐오 표현은 사회적으로 금지되며, 이는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존중하는 규범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 올바름 또한 과거 ‘아버지의 이름’처럼 자유로운 발언을 억압하는 종류가 다른 초자아의 명령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그 반동으로 ‘트럼피즘(Trumpism·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펼친 주장에 열광하는 현상)’ 같은 정치운동이 힘을 얻었다.
이전의 아버지들이 억압하는 자로 배척받은 것처럼 정치적 올바름 또한 새로운 억압 장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지 말라”는 사회의 금지 규율은 무의식 속 공격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그 억압이 반동적 폭발을 예고한다.
트럼피즘은 ‘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원리가 사회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트럼피즘은 억압된 공격성의 사회적 배출구였다.
트럼프의 막말, 정치적 금기를 깨는 발언은 대중에게 쾌락을 안겼다.
금지된 언어를 통해 무의식적 욕망이 해방됐기 때문이다.
현재 나타나는 극우 정치의 세계적 중흥기는 이러한 정신 역동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꼰대’로 상징되는 기존의 아버지가 존중을 잃은 공간에서 더 억압적으로 군림하며 존경을 강요하는 중세시대 왕처럼 귀환하는 실정이다.
디지털 알고리즘이 뿌려대는 ‘빨간 약, 파란 약’의 함정
아버지의 이름이 사라진 공간 한편에서는 거대 자본과 결탁한 ‘디지털 알고리즘’이 쉴 새 없이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뿌려대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 있는 군중은 처음에는 두 약 중 한 가지를 자유의지로 선택해 먹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자동적으로 ‘파란 약’을 선택하게 된다.
대표적 디지털 공간인 유튜브, 페이스북, 틱톡의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하는 정보만 제공한다.
이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무의식적 욕망을 특정 방향으로 길들이는 효과를 낳는다.
더군다나 디지털 공간은 익명성과 즉각성을 특징으로 하며, 이는 무의식적 충동을 더욱 쉽게 표출하게 만든다.
또한 과거와 달리 디지털 공간은 시공간을 초월해 형성되며, 나와 이념이 다른 집단을 ‘나쁜 대상’으로 투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무대다.
가짜 뉴스 확산, 혐오 댓글, 사이버불링(cyberbullying·사이버 공간에서 특정인을 집단적으로 따돌리거나 욕설, 험담 따위로 집요하게 괴롭히는 행위)은 디지털 군중이 ‘파란 약’을 더 많이 복용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 사례다.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디지털 공간은 초자아의 통제가 약화된 무의식적 장이다.
가짜 뉴스는 끊임없이 반복 노출되면서 무의식 속에 각인된다.
한번 믿은 정보는 사실이 아님이 드러나도 쉽게 수정되지 않는다.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보다 쾌락이 동반된 무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사회는 점점 더 분열되고, 디지털 공간은 타협과 합의의 공간이 아니라 전쟁터로 변한다.
‘존중’이 더는 디지털 공간에서 생존을 보장하는 언어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디지털 군중의 무의식적 충동을 도끼처럼 찍어줄 언어들이 그 위치를 대신하게 된다.
결국 여론은 존중의 가치를 지키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에 의해 자율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파란 약의 작용으로 뇌에 분비되는 질 나쁜 도파민으로 절어버린 ‘우매한 군중(The Madness of Crowds)’을 자극하는 언어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6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코스피 5000 특별위원회에서 김병기 원내대표(당시 당대표 직무대행)이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코스피 5000 시대’와 ‘산재 사망 근절’이라는 양면성
최근 한국 사회는 검찰 권력이라는 막강한 힘을 가졌던 대통령이 탄핵을 통해 왕의 권좌에서 물러났다.
광장에서 벌어진 선혈이 낭자한 투쟁은 한국 사회에 더는 통합된 존중의 가치는 멸종하고, 유통기한이 없어져버린 반쪽짜리 존중만 각자의 집단 속에만 남아 있는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국민 주권 시대’를 표방하며 대표 정책으로 ‘코스피 5000 시대’와 ‘산재 사망 근절’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한국 경제발전의 신화는 에로스(eros·생의 본능), 즉 생명 충동의 서사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나토스(thanatos·죽음)가 존재한다.
산업재해로 인한 죽음은 발전의 그림자로 억압됐고, 사회는 이를 구조적 문제로 직면하기보다 ‘불운한 사고’로 치부했다.
억압된 죽음은 반복 강박처럼 되돌아오며, 매해 비슷한 유형의 참사를 낳는다.
정부와 기업은 매번 ‘근본적 예방’을 약속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처벌 강화와 책임 전가가 반복된다.
사회는 산업재해의 책임을 특정 개인이나 관리자에게 투사하며,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지 않는다.
이로써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안전의 부재는 계속된다.
언뜻 보면 동행할 수 없어 보이는 욕망의 표상인 ‘코스피 5000시대’ 와 ‘산재 사망 근절’ 이라는 약속을 새 정부가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하다.
이는 마치 존중의 가치를 잃고 있는 한국 사회가 당면한 해결책과도 맞닿아 있다.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나의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 것!” 즉 공생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개개인의 노력도 필요하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In every democracy, the people get the government they deserve)”라는 프랑스 정치철학가 알렉시 드 토크빌의 말처럼 반쪽 정부를 갖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통합된 존중을 위한 학습도 중요하다.
“너희들의 젊음이 너희들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늙음도 내가 잘못해서 받은 벌이 아니다.
” - 미국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
이재명 대통령이 7월 25일 경기 시흥시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열린 산업재해 근절 현장 노사간담회에서 SPC 직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뉴시스
‘다시 바라보는 것’이 존중의 시작
사라져 가는 ‘존중’의 자리는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정신분석적으로 존경받는 아버지는 폭력적 권위자가 아니라, 욕망을 조율하고 사회규범을 안내하는 상징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아버지는 억압자가 아니라 대화와 돌봄의 매개자여야 한다.
아이들의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사회규범을 내면화하도록 돕는 역할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된 문제는 아버지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첫째, 존중의 가치를 개인 차원에서 재구성해야 한다.
‘엄친아’로 대변되는 비교의 교육제도에서 주입된 ‘자기혐오’를 버리고, 자신을 ‘리스펙!’ 하는 맥락 속에서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는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
둘째, 공동체 차원에서 존중의 가치를 복원해야 한. 연대, 돌봄, 기후 그리고 안전 같은 공동의 가치는 소비로 대체될 수 없고, 존중의 가치를 되살리는 길이다.
셋째, 예술과 문화는 경험의 상품화를 넘어 존중의 가치에 내재한 심연을 탐구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술은 말할 수 없는 욕망을 표현하고, 존중이 갖는 양면성의 충돌 문제를 해소하는 데에도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영어 단어 ‘respect’ 어원은 라틴어 ‘respicere’에서 유래했다.
라틴어 ‘respicere’는 ‘re-’(다시)와 ‘specere’(보다)가 합쳐진 단어다.
repect라는 단어는 어원대로 처음에는 단순히 ‘다시 바라보다’라는 뜻이었다가 현대에는 ‘존중’이나 ‘존경’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주의 깊게 되돌아본다는 것이 존경, 존중의 단어로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게 됐다.
‘다시 바라보는 것’이 존중의 시작이다.
다시 돌아보기를 반복하면서 나의 불완전함과 나와 타자가 만드는 사회의 부조리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생명의 본질은 불완전함과 부조리이고, 존중의 가장 큰 가치는 나와 사회의 생존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지금부터 거울을 보고 ‘존중의 언어’로 말하는 연습을 시작하라! 그렇게 ‘파란 약’을 끊어보자!
아버지의 부재가 ‘존중 부재’ 대한민국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