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 60주년┃인터뷰] 한글과 K-팝 전문가 노마 히데키
● ‘한글에서 K-팝까지’ 지(知)의 혁명과 코리아네스크
● 한국어, 소수 언어에서 문화 자산으로
● ‘지적 세계’ 판도 완전히 바꾼 한글
● “빼앗긴 언어” 되찾고 ‘한글의 탄생’ 쓰다
● 기적의 책 ‘훈민정음’ 15세기에 출간했다니…
● K-팝은 21세기의 ‘지구형 공유 오페라’
● 다민족·다문화·다원주의 품은 종합예술
한글을 독학으로 배우며 일본 내 최고 한국어 전문가가 된 노마 히데키 선생은 한글과 K-팝을 지적 자산의 결실로 끌어올렸다.
도쿄=허문명 기자 1965년, 한국과 일본은 오랜 단절을 넘어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로부터 60년. 한일 관계는 갈등과 협력을 오가며, 동아시아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지나왔다.
국교가 수립된 당시, 한국은 이름조차 낯선 나라였다.
그러나 반세기를 지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고, 이제는 문화·기술·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이 있다.
한국이 국제사회는 물론 일본 사회에서 ‘무명의 나라’로 인식되던 시절, 한국어를 독학하면서 한국 사회를 탐구하며, 지금은 한국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전문가로 자리매김한 일본인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일 관계의 또 다른 지층과 밀도를 보여준다.
이웃 국가로서의 이해와 오해, 문화의 교류와 단절, 그리고 다시 이어지려는 노력의 기록이 그 속에 있다.
올해의 끝을 향해가는 시점에서 ‘신동아’는 동북아역사재단 기획 공모 사업의 일환으로 이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오랜 기간 한국과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연구해 온 일본인들의 시선을 통해, 한일 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묻고자 한다.
이 기록은 60년 역사에 대한 성찰이자, 다음 60년을 향한 대화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주인공은 한글과 K-팝 전문가 노마 히데키 전 도쿄외국어대 교수다.
<편집자 주> 2010년 11월 5일 일본 언어학계에 작은 파문을 던지는 행사가 하나 열렸다.
일본 내에서 가장 깊이 있는 한국어 연구자로 통하는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선생이 ‘한글의 탄생’이란 책으로 마이니치신문사와 아시아조사회가 수여하는 아시아태평양상을 수상한 것. 현장에 있었던 김진아 메이지가쿠인대 교수는 ‘한글의 탄생’ 서문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한국어, 소수 언어에서 문화 자산으로 시상식은 재일교포를 비롯해 유학생, 일본에서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놀라움, 감탄을 주는 행사였다.
행사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와 드라마 ‘겨울 연가’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도, 집을 구하기 위해 들어간 부동산에서도 무시와 멸시를 받았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 들어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 사람이 늘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소수 언어였다.
그런데 ‘한글’에 대해 쓰여진 책이 아시아태평양상을 받은 것이었다.
이 책은 소수 언어였던 한국어를 일본 사회에 우뚝 서게 했으며 재일(在日) 한국인과 교포들에게 감동과 자랑스러움을 주었다.
한글이 단지 우수한 문자라는 민족 우월주의 담론으로 빠지지 않고 지적인 차원에서의 성취로 설명하고 심화시킨 점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문화적 차원이나 지적 차원에서 한국과 한국어의 위상을 바꿔놓은 저작으로 평가받은 ‘한글의 탄생’은 학술서였음에도 일본 대형 서점 신서(新書) 시리즈 주간 판매 4위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 책장에 진열됐고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3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노마 선생의 저서 ‘한글의 탄생’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3만 부 이상 판매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돌베개 넥타이를 맨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난 노마 선생은 편안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인상적이었다.
오전부터 흩뿌리던 가느다란 실비가 그친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청량했다.
우리는 도쿄 도심 이이다바시 전철역 근처 카페에 마주 앉았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한국어를 구사했다.
그가 쓴 ‘한글의 탄생’ 책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글 창제가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데 선생은 ‘지(知)의 혁명’으로 한 단계 더 확장시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한글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 파와 그들을 대하는 세종의 태도였습니다.
“최만리 상소문은 한자와 한문을 목숨처럼 여긴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절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세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한자는 삶 자체였습니다.
사대부 양반들 자제는 태어나면서부터 한자로 이름을 얻었고, 세상을 배우고 한자로 대화하며 시를 읊고 국사(國事)를 논했습니다.
임금에게서 죽음을 명령받을 때도 한자였고, 죽고 난 후에 기려지는 것도 한자에 의해서였죠. 지식인들의 모든 ‘지(知)와 앎’이 한자와 한문으로 만들어지고 조직돼 움직였다는 거죠. 한글 창제의 총사령부였던 집현전은 당대 수재들이 모인 최강의 두뇌 집단이었습니다.
정인지만 해도 15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8세에 장원급제를 했으니까요. 나중에 영의정까지 되잖아요.” 최만리도 마찬가지였지요. “그가 맡았던 집현전 정3품 부제학 자리는 리더 그룹에 속해 있었죠. 한글 창제 당시 세종이 46세였는데 동년배였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 대목에서 세종실록에 적힌 최만리 상소문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어요.” 그가 책을 펴더니 해당 페이지를 찾았다.
우리 왕조는 선조부터 지금까지 모든 성의를 다해 위대한 존재, 즉 대 중국을 섬기며 오직 중화의 제도를 따라왔습니다.
지금 (중국과) 글을 같이하고 문물제도를 함께하여야 할 바로 이때에 언문을 제작하면 그것을 보고 듣고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적 세계’ 판도 완전히 바꾼 한글 그가 다시 기자를 보며 말했다.
“조선의 왕은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는 군주였잖아요.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존재가 중국 황제였는데,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이 중국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거 아닐까요. 최만리는 이 사실이 행여 중국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걱정합니다.
최만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문명에 폐를 끼치는 소행’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조선은 한자 한문이라는 참된 문자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문명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음(한글)’이 나오면 학자나 관료들이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것이니 지(知)가 무너진다고 한탄하는 것이죠.” 오늘날 시점에서 그의 생각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은 당신의 책 ‘개정 정음학’에서 최만리라는 이름을 인용하는 것조차 망설여진다고 했습니다.
식민지 시대 말과 글을 잃었던 경험을 한 선생 입장에서는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최만리를 단지 구체제의 대변자, 사대주의자로만 몰아붙이면 당시 상황이 좀 더 입체적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선생이 책에서 언급한 세종이 최만리파(派)를 다룬 방식을 주목했던 것도 그 연장선상으로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종은 최만리를 포함해 함께 상소를 올린 학자 일곱 명 모두를 4개월 후 다 복직시킵니다.
이건 세종이 최만리의 행동을 ‘상대를 무너뜨릴 것인가, 내가 무너질 것인가’ 하는 권력투쟁의 관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가치관을 바꾸는 ‘지’의 투쟁이었던 거죠.” 책에는 한글의 여러 가지 의미가 분석적으로 나오는데요. 의성어 의태어 부분을 해석한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한글이 지적 세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문자라는 것은 의성어 의태어가 풍부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은 소리의 세계에만 있던 언어를 문자로 표기할 수 있게 했는데, 이건 모든 걸 ‘지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멍멍’이나 ‘뒤죽박죽’처럼 한자와 한문으로는 도저히 기록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언어를 구성하는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거지요. 문자로 기록되지 못하는 것은 앎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한글은 형태 음운론 측면에서 소리의 변화가 심한데 그것을 문자로 나타내는 시스템이 아주 절묘합니다.
한글이 한국 사람들의 지식 세계를 얼마나 넓고 깊게 했는지를 더 고찰해 봐야 합니다.
” “빼앗긴 언어” 되찾고 ‘한글의 탄생’ 쓰다 그는 어떻게 한글학자가 됐을까. 노마 선생은 자신의 삶에서 한글은 “빼앗긴 언어였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됐는데 입학원서를 작성해야 하잖아요. 부모님이 호적등본을 보여주며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처음으로 이야기해 줬습니다.
함경도 사람이었는데 광복 전에 일본으로 건너왔던 겁니다.
저는 그때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보다 부모님이 평생 감췄다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어요. 재일 교포 차별이 심해서 자식에게까지 숨긴 거지요. 부모님은 제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당초 그의 전공은 미술이었다.
“도쿄교육대 예술학과에 입학해서 추상미술,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사진 등을 배웠지만 대학 시절 내내 ‘어머니도, 나도 한국어를 빼앗겼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국어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 그는 한국어와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그야말로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싶었다고 했다.
“1970년대엔 한국어 교재가 많지 않았어요. 일본 언어학자가 내놓은 교재 중에 한국 기독교방송 아나운서들이 녹음해서 만든 테이프가 있었는데 많이 들으면 테이프가 늘어져 버려 여러 개 복사해서 몇 시간씩 듣고 따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교재는 물론 주변에 아무도 배우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대단한 집념이네요. “가장 힘들었던 건 발음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었어요. 예를 들어 ‘ㅈ’과 ‘ㅊ’ ‘ㅉ’ 발음을 모어(母語) 화자(話者)들은 도대체 어떻게 구별해서 발음하는지 궁금했고, 정말로 이렇게 미세한 걸 구별하고 있다니, 충격이었습니다.
일본어에선 또 모음 ‘오’와 ‘어’, ‘으’와 ‘우’ 구별이 없어서 이것도 어려웠지요. 독학으로, 그리고 존댓말로만 한국어를 배워서 훗날 한국에 처음 갔을 때 ‘반말’을 듣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 그는 대학을 나온 후 전위미술가로 활동하면서 수상도 하고 개인전도 여덟 번이나 열었다.
긴자의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에는 나중에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작가가 되는 이우환 화백이 찾아와 격려해 줄 정도였었다고 했다.
전위예술가의 삶을 살던 그는 돌연 30세 나이에 도쿄외국어대 조선어학과에 입학하면서 인생 행로를 바꾼다.
학부생 때부터 주목을 받아 지도교수와 함께 한일사전 공동 편저자로 참여했고, 38세에 도쿄외국어대 전임강사가 되면서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알리고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책 ‘한글의 탄생’을 내기 전부터 다양한 한글 교재를 만들어 각광받았다.
‘생활의 단어집 한국어’(1999)는 10만 부 가까이 팔렸고, 권당 800여 쪽에 달하는 ‘한국어 교육론 강좌’를 4권이나 펴냈다.
한국어로도 펴낸 ‘한국어 어휘와 문법의 상관 구조’(2002)는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됐으며 2012년에는 한글학회가 주는 ‘주시경 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제자 10여 명이 일본에서 전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는 대학을 퇴직하고 현재는 집필과 강연에 몰두하고 있다.
언어학자로서 교재를 죽 내다 ‘한글의 탄생’을 펴낸 계기가 있을까요. “안타까움에서 비롯됐다고 할까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글에 대해 언어학자들도 제대로 된 인식이 없었고, 일종의 ‘깔보기’까지 했습니다.
한국 학자들의 연구는 학문적으로 깊지만 제가 생각한 문제 제기를 하는 학자는 별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게 안타까웠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해서 연구하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 기적의 책 ‘훈민정음’ 15세기에 출간했다니… 이어 언어학적 관점에서 한글을 보는 그의 통찰이 이어졌다.
“흔히 한글을 15세기 조선 말을 표기하는 도구라고 생각하는데 그걸로 끝나면 본질을 놓칩니다.
한글이라는 문자는 ‘문자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하면 더 재미있고 깊은 자리매김이 가능합니다.
여러 문자, 즉 일본의 가나, 중국의 한자, 라틴어, 영어의 로마자하고 한글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대조 언어학적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지금 한글의 위상은 제가 책을 낼 때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하나의 언어가 이런 방식으로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문자 역사상 유례없는 일입니다.
” 그건 왜 그런가요. “영어나 서반아어(스페인어)가 퍼진 것은 제국주의 영향 때문이잖아요. 한자도 고대 중국 제국에서 출발한 것이고요. 하지만 한글은 문화의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권의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공유하며 확산됐습니다.
이런 언어는 처음입니다.
” 그는 그러면서 훈민정음을 “기적과 같은 책”이라고도 했다.
“그동안 문자는 돌이나 점토판, 뼈 등에 새겨진 형태로 드러냈는데 한글은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형태로 등장했습니다.
‘훈민정음’은 ‘나는 이런 언어다’라는 걸 책 스스로가 설명하고 있지요. 15세기에 이런 책이 나왔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훈민정음은 현대 언어학에서 주목받은 ‘음소(音素·의미를 구별하는 음의 최소 단위)’ 개념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이미 현대 언어학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ㄱ(기역)과 ㅋ(키읔)은 발음하는 (구강 구조) 기관의 형태는 같지만 내뱉을 때 숨이 거세게 나오느냐 아니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문자 형태에 반영한 거죠. 이건 음소보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간 20세기 언어학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는 이어 “서체도 동양의 문명사를 바꿀 만한 일”이라고 했다.
“훈민정음 서체는 한자와 달리 붓·종이·벼루·먹으로 상징되는 문방사우나 ‘쓰기’를 단련하는 수련 과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붓조차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나뭇가지로 땅에 끄적일 수 있게 만드는 문자였지요. 이걸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보면 동양을 지배하던 서예의 본질과 정신성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한글은 수천 년 동양 문자사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당당히 주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글이 보여주는 지적 세계는 언어권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풍요로운 세계입니다.
” 필자는 그의 한글 이야기를 통해 우리 내부로만 존재했던 한글의 평가가 확장돼 글로벌적 지적 담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근 펴낸 ‘K-POP 원론’(연립서가)을 통해서도 K-컬처를 글로벌 자산으로 끌어올렸다.
한글 이야기에 이어 K-팝 이야기로 넘어갔다.
7월 6일 서울시 마포구 홍익대 인근의 한 서점에서 노마 선생이 ‘K-POP 원론’ 북토크를 하고 있다.
연립서가, 허문명 기자 K-팝을 “21세기의 지구형 공유 오페라”라고 표현하셨는데 처음엔 좀 과장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았어요. “K-팝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아트입니다.
존재 양식도, 표현 양식도 다르고 콘텐츠를 공유하고 소유하는 방식도 완전히 바꿨습니다.
K-팝을 단지 음악의 연장선상 정도로 보면서 곡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데 이제는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 K-팝은 21세기의 ‘지구형 공유 오페라’ 그의 식견은 언어학, 신체학, 미학 등을 넘나들며 전방위로 뻗어나간다.
그가 우선 짚은 미덕은 다양성과 다원주의 그리고 저항성이다.
“태국 출신의 ‘블랙핑크’ 멤버 리사 씨야말로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오늘날 K-아트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K-팝은 또 이 시대 글로벌 저항 문화이기도 합니다.
과거 포크와 록을 즐기던 세대가 저항의 상징으로 이 음악을 활용한 것처럼 말이지요. 단적인 예가 소녀시대 데뷔곡이자 대표곡 ‘다시 만난 세계’라고 생각해요. 2016년 이화여대 시위 현장에서 울려 퍼지면서 대중문화를 넘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만들었지요.” K-팝 이야기가 나오자 그가 더 활기를 띠며 말했다.
“K-팝은 태생부터 소수 문화였습니다.
작품성이 없는 음악이라는 취급을 받았고, 해외에서 처음 주목받았을 때에도 소수 마니아들이 즐겼죠. 그러다 다양한 민족이 뭉친 팬덤의 연대 게릴라들을 통해 퍼져나간 거 잖아요. 이것이 바로 다원주의의 실천이고 승리입니다.
‘전쟁? 차별? 웃기지 말라’는 거죠. 이 분열과 갈등의 시대에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돌리는 배타적인 시대에 이런 걸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 귀합니다.
한국은 그런 점에서 ‘창조의 땅’ 입니다.
” 그는 K-팝의 다원주의를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복수 언어성(plurilingualism)’ 이라는 개념으로 확장시켰다.
언어학자다운 분석이었다.
“복수 언어성은 한마디로 천하무적 전략입니다.
뛰어난 K-팝 작품에 나오는 영어와 한국어에는 주종관계가 없습니다.
양쪽이 존재하고 양쪽 다 살아 있는 거죠. K-팝이 단순히 영어 일색이었다면 그냥 히트 친 팝스(Pops)의 한 곡으로만 남았을 겁니다.
” 그는 로제의 ‘아파트’를 예로 들었다.
“한국에서 외래어가 할 수 있는 ‘아파트’라는 단어는 한국어를 모어(母語)로 하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발음도 신기하고 의미를 작은 수수께끼로 남긴 채로 즐길 수 있는데, 저는 이것이야말로 복수 언어주의 그 자체라고 봅니다.
K-팝에서는 ‘변화’라는 요인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로제 님과 브루노 마스 님(그는 꼭 ‘님’ 자를 붙여 써달라고 했다)의 만남이라는 변화, 각자가 걸어온 길에서의 변화, 둘이 벌이는 시각적인 장난 같은 동작의 변화, 경쾌하고 즐거운 ‘아파트’라는 단어의 기계적인 반복에서 애수를 띠고 아름다운 선율로 전환되는 곡 내부에서의 변화, 이런 다층적인 변화가 결정적입니다.
” 저는 사실 정체불명의 ‘외계어’로 한글을 훼손시킨다고 생각했었는데요. “걸 그룹 케플러가 ‘Up!’에서 ‘I do, I do 오늘도 내일도’를 ‘아이 두 아이 두 오늘두 내일두’로 각운을 맞춘다거나, 걸 그룹 시크릿넘버가 ‘독사’에서 ‘bad bad’와 ‘빼빼 좀 빼지’를 대비시킨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무 뜻도 없이 늘어놓는 것 같은 ‘언어 놀이’가 작품을 풍요롭게 만드는 거죠.” 노마 선생은 BTS의 ‘피 땀 눈물’ 뮤직비디오(뮤비)를 ‘한 편의 단편영화’로 평가하며 “영상 속에서 가사와 음악, 소리와 빛이 혼연일체로 변용해 나가는 K-팝 뮤비가 이뤄낸 하나의 금자탑”이라고 평가했다.
유튜브 채널 HYBE LABELS 캡처 다민족·다문화·다원주의 품은 종합예술 K-팝의 ‘신체성’과 ‘색채성’에 대해서도 주목했는데요. “신체야말로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출발점이자 마지막이 되는 근거지라고 할 수 있잖아요. K-팝의 ‘신체성’은 공적 공간의 ‘댄스(dance)’와 그걸 사적 공간에서 지탱하는 ‘앤틱스(antics·장난, 희롱, 유머러스한 동작, 몸짓 등) 두 가지를 공유하는 방식입니다.
개인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각적 미학의 대표작으로 아이브의 ‘해야(HEYA)’ 뮤직비디오(뮤비)를 듭니다.
‘21세기 고구려 벽화’라고 말할 정도로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엑스지(XG)의 ‘IYKYK’ 뮤비도 인공지능(AI)까지 구사한 놀라운 미학적 작품이죠. 몇몇 장면만 뽑아내서 사진전을 열어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내게 200장면을 뽑으라고 한다면 압도적인 사진전을 꾸밀 자신이 있습니다.
” 그는 BTS의 ‘피 땀 눈물’ 뮤비는 한 편의 단편영화라고 했다.
“영상 속에서 가사와 음악, 소리와 빛이 혼연일체로 변용해 나가는 K-팝 뮤비가 이뤄낸 하나의 금자탑”이라고까지 했다.
오로지 읽고 쓰고 가끔 재즈기타를 즐긴다는 그의 언어는 구어체보다는 문어체에 가까웠다.
이제 슬슬 긴 인터뷰가 끝날 때가 됐다.
꼭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물었다.
“저는 지식 사회가 아직 K-팝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고, 자리매김조차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멋있다, 예쁘다만으로 끝날 게 아니라 K-팝을 통해 우리 사상과 감성을 단련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코리아네스크’로 표현합니다.
” 그게 뭔가요. “새로운 아트가 등장하면 기존의 사상과 감성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매도하는 말로 명칭을 붙였어요. 로마네스크, 인상파라는 용어도 그렇게 시작한 겁니다.
하지만 둘다 떳떳한 아트의 한 양식이 됐잖아요. ‘코리아네스크’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뽕’ 같은 ‘한국적’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감싸안아 받아들여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다민족·다문화·다원주의의 새로운 코리아네스크, 아트의 사적 소유 형태까지 바꿔버려 온 세계가 함께하는, 말과 소리와 빛과 신체성이 어우러진 종합예술. 이것이야말로 한국어권이 온 세계와 함께 하고 마음속에서부터 깊이 자랑할 수 있는 아트가 아닐까요.”
“제국주의 언어 아님에도 지구적 확산, 한글이 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