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진단] 이것은 ‘두뇌 유출’이 아니라 ‘과학 난민’이다
● 中, 두뇌 유출 피해국에서 수혜국으로 변모
● 韓 이공계 석학 과반, 해외 제안 받아…83%가 中
● 일관성 없고, ‘승자독식’ 구조의 연구비 정책이 문제
● 세계 최고 두뇌들이 머물고 싶은 나라 추구해야
2021년 한국은 과학 인재의 유입보다 유출이 더 많은 순유출 국가가 됐으며, 특히 AI 분야 인재의 순유출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5위였다.
AI생성 이미지 한국 사회의 지식인 담론은 여전히 20세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다.
과학기술의 지형도를 논할 때, 우리의 시선은 습관처럼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향한다.
그러나 낡은 지도에 그려진 과거의 패권을 더듬는 동안 세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했다.
중국이 여러면에서 이미 미국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다양한 지표에서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다.
하지만 과학기술 논문의 양과 질, 그리고 미래를 결정할 핵심기술 분야에서 미국은 더는 세계 1위가 아니다.
이는 먼 미래의 예측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다.
중국의 부상은 우연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친 치밀한 국가전략, 천문학적 투자, 그리고 인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강력한 정책이 맞물려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중국 과학기술의 가장 가시적인 힘은 압도적 규모의 투자와 그 결과물인 연구 생산성에서 나온다.
2024년 중국의 연구개발(R&D) 총지출은 3조6000억 위안(약 720조 원)을 넘어섰으며, 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68%에 달하는 수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시적 투자가 아니라 수십 년간 일관되게 이어진 국가적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이다.
中, 두뇌 유출 피해국에서 수혜국으로 변모 막대한 투자는 세계 연구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세계적인 학술 출판사 스프링거 네이처가 발표하는 ‘네이처 인덱스’에서 2023년 중국은 처음으로 미국을 제치고 1위에 올랐으며, 불과 1년 만인 2024년에는 미국과 격차를 무려 4배 이상으로 벌렸다.
이러한 성과는 개별 연구자의 역량을 넘어선 시스템의 승리다.
세계 10대 연구기관 순위를 보면, 이제 8~9개 기관이 중국 소속이다.
특히 중국과학원(CAS)은 2위인 미국 하버드대를 압도적 격차로 따돌리며 세계 최정상의 연구기관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이는 중국의 과학적 역량이 특정 분야나 소수 엘리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국가 전반에 걸쳐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뿌리내렸음을 의미한다.
중국의 과학기술 전략은 단순히 논문의 양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인공지능(AI), 생명공학, 양자컴퓨팅, 우주탐사 등 21세기 글로벌 경제와 안보의 패권을 결정할 ‘전략적 고지’를 체계적으로 점령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AI 혁신 생태계를 구축했다.
칭화대 등 주요 대학은 지푸AI, 바이촨AI와 같은 세계적 수준의 ‘AI 호랑이’들을 배출하는 산실이 됐으며, 이들의 거대언어모델(LLM)은 오픈AI의 GPT-5와 성능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
민간 투자 규모는 아직 미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정부 주도 펀드와 보조금이 민간이 외면하는 지역의 유망 기업까지 효과적으로 지원하며 국가 전체의 AI 역량을 끌어올리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타 분야에 비해 뒤떨어졌던 중국의 생명공학 시장은 이제 연평균 성장률(CAGR)이 20~50%를 넘나드는 폭발적 성장세를 보이며, 2030년대 초에는 수천억 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504큐비트 초전도 양자 칩 ‘톈옌(天衍)-504’를 공개하며 500큐비트의 벽을 넘어섰고, 세계 최초로 달 뒷면의 토양 샘플을 채취해 귀환하는(창어 6호) 등 누구도 가보지 못한 우주개발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중국 과학기술 정책의 화룡점정은 단연 인재 전략이다.
20세기 내내 미국으로 향했던 고급 두뇌의 흐름을 역류시키기 위해 중국 정부가 설계한 ‘천인계획(Thousand Talents Plan)’과 그 후속 프로그램은 세계 인재 지형도를 뒤흔든 거대한 공학이었다.
2002년만 해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인의 92%가 미국에 남았다.
천인계획은 바로 이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시작됐다.
2017년 중반까지 천인계획 하나만으로 7000명이 넘는 최상급 과학자가 중국으로 돌아왔거나 새롭게 유입됐다.
진정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이 중국으로 돌아온 후의 변화다.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에 발표된 연구 등에 따르면 이들의 논문 출판 생산성은 해외에 남은 동료 그룹보다 27% 높아졌다.
특히 연구 책임자(PI)임을 의미하는 마지막 저자(last-authored) 논문 수는 무려 144% 폭증했다.
이는 그들이 중국에서 단순히 다른 연구팀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라, 막대한 연구비와 자원을 지원받아 자신만의 연구를 이끄는 독립적인 리더가 됐음을 의미한다.
중국은 20세기 두뇌 유출의 최대 피해국에서 21세기 두뇌 유입의 최대 수혜국으로 완벽하게 전환했다.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은 단편적인 정책의 합이 아니라, ‘투자-인프라 구축-인재 유치-연구 성과 창출-국가적 위상 강화-재투자’로 이어지는 거대한 선순환 생태계의 결과물이다.
한번 돌기 시작한 이 거대한 톱니바퀴는 이제 누구도 쉽게 멈출 수 없는 엄청난 관성을 갖게 됐다.
韓 이공계 석학 과반 해외 제안 받아…83%가 中 중국이라는 용이 하늘로 솟구치는 동안, 한국 과학은 서서히 침몰하고 있다.
국내 최고 두뇌들의 해외 유출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 행렬이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이 문제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위기임을 시사한다.
이는 외부 유인만큼이나 내부의 병리적인 밀어내기가 심각하다는 증거다.
한국 과학의 두뇌 유출은 시스템의 붕괴가 낳은 예고된 재앙이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한림원·KAST)이 5월 3~14일 소속 정회원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응답자의 61.5%가 최근 5년간 해외 연구기관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으며, 그 제안을 한 국가 중 무려 82.9%가 중국이었다고 답한 것이다(그래프 1·2 참조). 더욱 심각한 것은 제안을 받은 이들 중 42%가 이직을 수락했거나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답했으며, 제안을 받지 않은 이들조차 83%가 만약 제안이 온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할 것이라고 응답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연구 환경에 대한 깊은 불신과 불만이 팽배해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명백한 ‘인재 수출국’으로 전락했다.
2021년 한국은 과학 인재의 유입보다 유출이 더 많은 순유출 국가가 됐으며, 특히 AI 분야 인재의 순유출 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5위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다.
과학자들이 한국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더 높은 연봉이나 최신 장비 때문일 것이라는 통념은 현실의 절반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한림원 설문조사에서 과학자들이 이직을 고려하는 가장 큰 이유로 꼽은 것은 ‘정년 이후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의 부재’(82.5%)였다(표 1 참조). 이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의 문제이자 철학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한국과 중국의 과학자를 대하는 근본적 시각 차이가 드러난다.
중국은 최고의 과학자를 ‘국가의 보물’로 여기고 이를 제도화했다.
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의 원사(院士) 제도는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다.
원사로 선정되면 사실상의 종신 학술 지위가 보장되며, 정년 후에도 국가 중대 프로젝트의 자문, 후학 양성, 정책 결정 과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회적으로도 원사는 국가의 상징으로 존경받는다.
반면 한국은 2005년 노벨상급 석학을 지원하겠다며 야심만만하게 국가석학 지원사업을 도입했지만 불과 4년 만에 슬그머니 폐지해 버렸다.
이는 한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최고의 과학자를 장기에 걸친 ‘국가 자산’이 아닌, 단기에 그치는 ‘연구비 수혜자’ 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중국이 과학자들을 국가의 보물로 ‘모시는’ 동안, 한국은 자국의 보물을 스스로 내다 버리고 있는 셈이다.
과학자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는 필연적으로 과학을 경시하는 정치로 이어진다.
2024년 한국 정부는 33년 만에 국가 R&D 예산을 과학계와 아무런 협의 없이 15% 삭감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단순한 예산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과학계 사이의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린 결정타였다.
정부는 뒤늦게 이 결정이 신진 연구자들을 위한 소액 규모의 ‘풀뿌리 연구’ 과제를 전면 폐지하고, 소수의 대형 과제에만 자원을 집중시키는 등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음을 시인하고 사과했지만, 한번 깨진 신뢰는 회복하기 어렵다.
한림원 설문조사에서도 과학자들은 ‘일관성 없는 국가 R&D 투자’(57%)를 두뇌 유출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게다가 한국의 연구비 지원 시스템은 소수의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구조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기초 연구를 저해하며 연구자들을 불안정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한국의 두뇌 유출은 이처럼 정책의 실패, 철학의 부재, 그리고 시스템의 붕괴가 빚어낸 총체적 난국이다.
세계 최고 두뇌들이 머물고 싶은 나라 추구해야 이재명 정부는 AI를 최우선에 두고 과학기술 혁신을 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삭감된 R&D 예산을 원상 복구하는 것은 찢어진 상처에 반창고 하나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이 위기는 근본 철학의 변화를 요구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 과학자들을 붙잡아 둘 수 있을까”라는 수동적 질문을 버리고, “어떻게 하면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능동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2008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을 시작한 이후 캐나다를 거쳐 중국으로 오게 된 이유는 연구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찾으려던 노력의 결과였을 뿐이다.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 연구기관에 지원했지만, 초파리 교미 시간 연구의 가능성을 알아본 나라는 중국뿐이었다.
심지어 중국의 연구소에서는 꿀벌 유전학 연구를 해보겠다는 야심 찬 포부 역시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다.
중국에서 지난 5년을 회고해 보면 오로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었다.
한국이었으면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일이다.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연구하던 시절 본, 한 한국 과학기술 고위 관료가 인재 유출에 대해 질문한 기자에게 “한국 과학자들은 연어 같아서 모두 한국으로 되돌아온다”라며 웃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러나 지금 그 연어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들은 ‘과학 난민’이 됐다.
‘인재 수출국’ 전락한 韓, ‘인재 블랙홀’ 中 배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