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EC 이후 한반도’ 논의한 제11회 KWO 나지포럼
● 자유주의 규범, 자유무역 질서 위한 APEC
● 美中 갈등 관리의 장으로 변모
● 불발된 北美 정상회담, 재개 가능성 높지만
● 北의 한반도 비핵화 포기 요구 수용 불가능
● 김정은-트럼프 만나더라도 ‘하노이 노딜’ 재현 가능성↑
●‘핵추진잠수함 건조 승인’이라는 성과 얻었으나
●추후 협상 실패하면 호주처럼 핵추진잠수함 못 받을수도
전쟁기념사업회(KWO)가 10월 31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개최한 ‘제11회 KWO 나지포럼’에서 주제 발표를 맡은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통일학연구원장)가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홍태식 객원기자
“1년간의 휴전.”
전쟁기념사업회(KWO)가 10월 31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개최한 ‘제11회 KWO 나지포럼’에서 주제 발표를 맡은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통일학연구원장)는 발표 하루 전 열린 미중 정상회담의 결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나지포럼이란 ‘나라를 지키는 포럼’의 약칭으로 국가안보의 중요성과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이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2024년부터 개최돼 온 공론의 장이다.
지난달 경주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는 역대 어느 회의보다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미중 무역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 이후 처음으로 양국 정상의 공식 대면 자리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미중 정상회담은 10월 30일 김해국제공항 의전실 나래마루에서 치러졌다.
회담 결과 중국은 희토류 수출 제한을 1년간 유예하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대중국 관세를 57%에서 47%로 인하하기로 했다.
급한 불은 껐지만 박 교수의 분석처럼 1년간의 휴전이 끝나면 양국 간 무역 갈등은 재발할 우려가 크다.
이번 포럼에서 좌장을 맡은 백승주 전쟁사업기념회 회장은 “공교롭게도 포럼 전날 미중 정상회담이 치러진 만큼 이번 포럼에서는 미중 정상회담의 결과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에 대해 논의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포럼에는 박 교수를 비롯해 김원수 전 유엔사무차장, 이철재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장, 신석호 화정평화재단 연구위원이 토론자로 나섰다.
美中, 자유무역 질서 회복에 무관심
포럼의 주제 발표를 맡은 박 교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번째 집권기에 불거진 미중 갈등으로 양국은 서로 유의미한 경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태였다”며 시대 상황을 진단하고,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이 10월 26일 미중 양국 무역 대표단 실무회담 후 양국이 ‘성공적 프레임워크’를 만들었다고 자평했는데,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경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프레임’을 확보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다만 미중 간 첨예하게 다투던 문제인 대만이나 한반도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었기에 양국 간 갈등이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주제 발표를 맡은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홍태식 객원기자
한편 박 교수는 “APEC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이번 회담 결과는 아쉽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APEC은 미중 갈등으로 무너진 자유주의 규범과 훼손된 자유무역 질서를 고칠 기회였다.
하지만 미국은 자유무역 질서 수호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관세를 높여가며 보호무역으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이어받아 자유무역의 원칙을 강조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한국 콘텐츠 수출 제한 조치인 ‘한한령’ 등의 예시만 봐도 중국이 자유무역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전히 APEC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상징하는 행사지만 양대 강국이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그 영향력이 다소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
이어 김 전 처장은 “APEC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APEC은 다자외교의 중요한 장”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APEC의 궁극적 목표는 2040년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자유무역에 기반한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것인데 미국과 중국의 패권 갈등이 커지며 이 목표와는 점차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그럼에도 APEC의 외교적 중요성은 증대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김 전 처장은 “애초의 비전과는 멀어졌지만, 아시아 태평양의 주요 국가들이 대부분 참석하는 만큼, 미국과 중국도 원하는 국가와 교섭을 벌일 수 있다”라며 “미중 갈등을 관리하는 일에도 APEC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그는 “미국과 중국 양대 강국은 앞으로도 여러 차례 회담을 벌여야 할 텐데 장소가 마땅치 않다.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인 만큼 미국이나 중국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제3국을 회담 장소로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미중 양국은 앞으로도 정례 행사인 APEC에서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도 이번 APEC의 주목도를 높였다.
APEC 개최를 앞두고 양국 정상 모두 회담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9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나는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10월 27일 트럼프 대통령 역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면 나는 기꺼이 만날 것”이라며 북미 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10월 30일 한국을 떠나며 북미 정상회담은 이뤄지진 않았다.
나지포럼 토론에 참여한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박 교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미 정상회담 조건으로 한반도 비핵화 포기 및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내걸었으나 이는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10월 25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을 ‘일종의 핵보유국’이라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제11회 나지포럼 토론자로 참석한 김원수 전 유엔사무차장. 홍태식 객원기자
김 전 처장은 “미국이 마음대로 한반도 비핵화를 포기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비핵화를 포기한다는 것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데 이는 동북아시아 유일한 핵보유국인 중국을 자극하게 된다”며 “한국과 일본은 물론 중국도 한반도 비핵화를 원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 없으니 북미 회담이 이뤄질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신석호 화정평화재단 연구원은 “북한은 미국과 대화하기 전에 항상 핵실험이나 신형 미사일 공개 등 대형 공세를 펴는 습성이 있다”며 “이번에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도착한 10월 29일 서해상에 전략미사일을 발사했으나, 기존 공세보다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아 양국이 만날 가능성 역시 낮았다”라고 분석했다.
세 사람은 전부 “북한과 미국 정상이 만날 수는 있겠으나 유의미한 합의를 하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교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자신의 대내외적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라도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려 할 것이고, 트럼프 대통령도 ‘세계 분쟁 해결’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담판을 짓고 싶어 할 것”이라며 “다만 북한이 원하는 비핵화 포기 및 대북 경제 제재 전면 해제가 쉽지 않은 만큼 회담의 실효성은 높지 않다”라고 예측했다.
김 전 처장은 “어려운 문제는 뒤로 미루고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작은 과제부터 풀어나가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방식”이라며 “근본적 문제 해결이 어려우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이란-이스라엘처럼 한반도 문제 역시 구체적 성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평가했다.
신 연구원도 “두 사람이 이미 2019년에 만나 서로의 생각 차이만 확인한 역사가 있으니, 이견을 좁히지 못한다면 북미정상회담의 성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에서 핵잠수함 만들면 한국에 못 들여올지도
북한 및 한반도 안보에 관한 대화는 자연스레 핵추진잠수함으로 흘렀다.
핵추진잠수함은 농축우라늄으로 동력을 얻는 잠수함으로 잠항 시간이 사실상 무제한이라 발각 위험이 낮다.
10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을 통해 “한국에 핵추진잠수함을 건조하도록 승인했다”고 알렸다.
핵추진잠수함 추후 협상의 과제에 대해 설명하는 이철재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장. 홍태식 객원기자
이철재 소장은 이를 두고 “이재명 대통령이 현명하게 협상한 것으로 보인다”라며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과 중국의 잠수함 추적에 핵추진잠수함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이야기가 미국에는 중국을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데 한국이 동참한다는 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동시에 핵추진잠수함에는 재래식 무기만을 싣겠다고 밝혀 미국이 안심할 수 있게 했다”고 평가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추진잠수함을 미국 필리조선소에서 만들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핵추진잠수함 전력화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필리조선소는 핵추진잠수함을 건조할 시설이 없어 이를 개발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며 “미국에서 핵추진잠수함을 생산한다면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핵추진잠수함을 사들이는 방식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미 의회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만약 의회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거액을 들여 미국에서 핵추진잠수함을 만들고도 한국에 들여오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 소장은 호주가 영국, 미국과 손을 잡아 핵추진잠수함 개발에 나섰던 사례를 들었다.
호주는 2021년 6월 AUKUS(미국, 영국, 호주 3개국이 결성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보 동맹) 합의를 통해 영국과 미국의 핵추진잠수함 설계 기술을 도입할 예정이었다.
이후 핵추진잠수함 조기 확보를 위해 미국과 영국의 중고 핵추진잠수함을 호주에 넘겨주는 방식으로 합의 내용이 바뀌었다.
하지만 결국 미국 의회의 반대로 핵추진잠수함 도입에 차질이 생겼다.
이 소장은 “향후 협상 과정에서 호주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고 경고했다.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이 ‘제11회 KWO 나지포럼’ 개회사를 하고 있다.
홍태식 객원기자
이날 포럼에는 토론자들 외에도 10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해 질의응답을 갖는 등 활발한 토론을 이어갔다.
질문자 중에는 정광재 동연정치연구소장(전 국민의힘 대변인)도 있었다.
정 소장은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면 사실상 북한이 핵보유국에 준하는 위치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한국은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한 발표자들의 답은 대동소이했다.
박 교수는 “자체 핵무장은 바람직하지 않고 미국과 손잡아 핵 확장억제 전력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짚었다.
김 전 차장은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교적 방법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며 “미국은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어떤 국가도 북한의 핵보유국 인정을 원하지 않는 만큼 어렵지만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외교적 협상도 계속 병행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지상중계]“美中 정상, 앞으로도 매년 APEC에서 만날 가능성 높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