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대선이 시작되면서 기후환경 단체들이 정책 제안을 발표하고 나섰다.
윤석열 시대의 역주행을 되돌리고, 기후 의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이다.
기후경제부 신설 등이 눈에 띈다.
기후위기비상행동과 기후정치바람이 4월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후 단일 의제 대선 TV 토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잃어버린 시간이었고, 역주행의 시간이었다.
허송세월이었고 복지부동이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윤석열 정부 아래서 특히 기후환경 분야 정책은 심각하게 퇴행했다.
플라스틱 빨대 사용 금지 정책의 갑작스러운 보류, 석유 부국을 만들 수 있다며 팡파르를 울렸지만 결국 ‘경제성 없음’으로 결론 나고 만 동해 석유시추 사업(대왕고래 프로젝트), 세계적으로 ‘좌초 산업’으로 여겨지는 원전 산업 생태계의 부활 추진 등 온 나라를 요란하게 만든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전 정부의 4대강 재자연화 계획을 없던 일로 되돌리고, 기후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오히려 신규 댐을 건설하겠다고 했다.
일부 태양광 사업 부실 사례를 이유로 대대적인 감사를 벌이고 재생에너지 산업 전반에 대한 지원을 축소한 결과 우리나라의 재생에너지 비중은 10.5%(2024년 기준)에 머무르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제1차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에 따르면 자신의 정부에서는 국가 온실가스를 ‘찔끔’ 감축하고 차기 정부에서 ‘대폭’ 감축하게끔 설계했다.
피해는 경제활동 주체들에게 돌아갔다.
종이 빨대 생산업자, 재생에너지 사업자 등은 정부 정책으로 인한 피해자가 되어 직격탄을 맞았고,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유럽과 미국의 무역규제 정책에 발을 맞추며 탄소감축 이행 계획을 준비하던 산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3월31일 탄소중립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우리의 생활을 하던 대로 유지할 것인지, 혹은 한 번도 못해본 에너지 독립을 향해 세상을 바꿀 것인지 딜레마에 빠져 있다.
탄소중립을 논하려면 이를 정치와 법제에 반영할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탄핵 직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마이웨이’였다.
탄핵 한 달 전인 2024년 11월14일 환경부는 시민사회로부터 커다란 비판을 받은 제1차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 수립을 윤석열 정부 2년 반의 성과로 자화자찬하며 환경규제에 대해서도 “획일적 규제가 아닌 맞춤형 규제를 확대하겠다”라고 발표했다.
파면이 되지 않았더라면 윤석열 정부의 기후환경 정책 역주행은 가속도가 붙었을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의 쿠데타와 국회의 탄핵 의결 이후 기후환경 단체는 일제히 윤석열 정부의 반기후·반환경 정책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녹색연합은 올해 1월 ‘윤석열과 함께 탄핵되어야 할 정책’을 발표했다.
차기 정부에 온실가스 감축 책임을 떠넘긴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신규 원전 건설 추진과 노후 원전 수명 연장, 설악산 케이블카 등 보호지역 훼손, 신공항과 댐 건설, 4대강 재자연화 중단, 플라스틱 및 일회용품 규제 포기 등이었다.
4월4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 결정으로 조기 대선이 6월3일로 확정되면서 ‘미래’를 이야기할 공간이 열렸다.
기후환경 단체들은 긴급히 관련 토론회를 개최하고, 차기 정부가 이행해야 할 정책 과제를 속속 발표하고 있다.
녹색전환연구소, 녹색에너지전략연구소, 플랜 1.5 등 국내 민간 기후 싱크탱크들은 지난 2월 ‘10대 기후정책 제안서’를 공개한 데 이어 4월10일 ‘다음 정부에 제안하는 30대 기후정책’을 공동발표했다.
30대 기후정책 제안에서 주목할 대목은 ‘민주주의 분야’를 맨 앞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먼저 기후정책을 헌법에 명시할 것을 주장했다.
탄소중립과 생태적 전환을 새로운 시대의 헌법적 가치로 채택하고, 생태국가로의 전환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수단으로 ‘기후시민의회’의 제도화, 관료와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됐던 대통령직속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탄중위)를 미래세대·노동자·농민 등 이해관계자 중심으로 전면 개편, 기후경제부 신설 등이 제시됐다.
“산업부와 환경부 업무 통합하자” 4월22일 ‘H-ESG 포럼’에서 기후에너지 싱크탱크 관계자들이 정책 제안을 발표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특히 기후경제부 신설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산업부)에 환경부의 기후탄소실 업무를 통합해 기후·에너지·산업 정책을 총괄하는 부처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그간 환경부는 온실가스 감축목표 설정 등 기후정책 추진 과정에서 산업부 주장에 밀려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독일의 ‘경제기후보호부’처럼 산업과 기후위기 행정을 일원화해야 부처 간 칸막이를 넘어 일관된 정책 추진이 가능하다는 게 제안자들의 생각이다.
또한 예산 편성권을 가진 기획재정부의 협조 없이는 정책 추진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탄중위가 기후예산 편성 및 협의 권한을 가지게끔 했다.
민간 싱크탱크만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2022년 대선과 2024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규모와 기능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후에너지부’ 설치를 공약했고, 지난해 국민의힘도 환경부를 ‘기후환경부’로 바꾸자는 법안을 만들었다.
허성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후에너지부를 신설하는 ‘정부조직법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고, 박정 민주당 의원은 환경부 명칭을 ‘기후환경부’로 바꾸고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지난해 기후환경부 설치를 제안했던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 역시 기후환경부 장관을 부총리로 격상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30대 기후정책에서는 인공지능 시대를 겨냥한 ‘그린 AI’ 전략이 눈에 띈다.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AI 개발·활용 전 과정의 에너지 소비를 통제하고, 데이터센터 신설 시 재생에너지 조달을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OECD 최하위인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까지 30%(OECD 평균 수준)로 끌어올리자는 재생에너지 ‘중진국’ 도약 방안도 제시했다.
기업이 정부가 정한 양 이상으로 탄소를 배출했을 때 배출권을 구매해서 이를 상쇄하는 제도인 탄소배출권 거래제도 손보자고 제안한다.
전체 90% 기업에 정부가 배출권을 공짜로 나눠주면서(무상 할당) 현행 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030년까지 발전 업종에 대한 유상 할당 비율을 현행 10%에서 100%로 점진적으로 끌어올려 최대 13조원 정도 추가 재원을 확보하자는 구상이다.
대도시와 농촌 간 전력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지역별·시간대별 전력요금 차등제를 도입해서 장기적으로 전력 수요를 분산시키자는 제안도 나왔다.
지역별 차등요금제의 경우 분산에너지 특별법에 따라 법적 토대는 마련됐으나 시행령 미비, 산업부의 이견 표시 등으로 제도 시행이 늦춰진 상태다.
시민의 일상 속 기후 실천을 촉진하기 위해 건물 난방의 탈탄소 지원, 녹색교통 이용 정산제 등을 제안했다.
농어촌공사가 관리하는 공공비축 농지에 태양광시설을 설치해 소득을 창출하는 ‘햇빛복지마을’ ‘태양광 히트펌프 목욕탕 3000개 설치’ 등 지역을 위한 기후 대응 정책도 마련됐다.
산림·갯벌·습지 등을 관리하는 지자체에 온실가스 흡수량에 상응하는 생태보호지원금을 도입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환경운동연합도 4월22일 ‘차기 정부에 제안하는 30대 환경정책 과제’를 제안했다.
앞서 기후 싱크탱크의 정책 제안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탈원전 문제를 강조했다.
노후 원전의 수명연장 금지와 안전한 폐로 로드맵 수립을 맨 앞에 내세웠다.
반복되는 원전 사고에 대한 규제 강화 필요성을 강조하고, 방사능 노출 피해 주민의 이주 및 보상제도 정비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연기관차 판매를 금지하고, 유류세 개편 및 재원 재설계를 통해 연료 소비를 줄이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4월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4대강 자연성 회복과 국민 건강을 위한 요구사항을 담은 대통령 선거 환경 공약 제안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4대강 등 하천 생태계 복원을 위해 불필요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철거하는 한편 정부가 추진하는 신규 기후대응댐 사업을 전면 백지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낙동강을 중심으로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녹조 독소 대응체계를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주·새만금·흑산도·가덕도 등 생태적으로 민감한 지역에서 추진 중인 신공항 건설 계획을 철회할 것도 요구했다.
날로 심각해지는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라스틱 사용량 감축 로드맵 수립과 모든 플라스틱 포장재에 재생 원료를 최소 30% 이상 의무 사용하도록 하는 방안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제주특별자치도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1회용 컵 보증금제의 전국 시행, 재활용이 어려운 포장재 사용 제한 정책 등을 제시했다.
지역이 몸살을 앓고 있는 산업폐기물 문제에 대한 정책도 눈에 띈다.
산업폐기물의 ‘발생지 책임 원칙’을 법적으로 명문화하고, 타 권역 폐기물의 반입을 제한하는 등 공공관리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폐기물 처리시설에 대한 주민감시권·정보접근권·건강조사권 보장을 위한 제도 개선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 유권자’ 중도층에 많아 기후환경 단체의 정책 제안이 발표되는 가운데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가 기후정책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고 나섰다.
이재명 후보는 4월22일 지구의날을 맞아 SNS에 “2040년까지 석탄발전을 폐쇄하고 전기차 보급 확대로 미세먼지를 획기적으로 줄이겠다”라고 밝혔다.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 2028년 제33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33) 유치 등도 약속했다.
이 후보는 “(포장재 없이) 알맹이만 팔아서 쓰레기를 줄이는 ‘알맹상점’처럼 자발적으로 만드는 순환경제 인프라를 지원하겠다”라며 국가 차원의 탈플라스틱 로드맵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4월23~24일에도 제주와 호남을 각각 탄소중립 선도 도시, 재생에너지 산업 중심지로 만들겠다며 지역 및 기후정책을 잇따라 발표했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기후 정치를 의제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사회 연합체 ‘기후정치바람’은 1만7000명 대규모 여론조사를 통해 기후위기 대응 정치인에게 투표할 의향이 있는 ‘기후 유권자’가 전체의 약 33%에 달한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정치 성향별로 봤을 때 기후 유권자가 가장 많은 층이 중도층이었다는 점이다.
이념 양극화 시대에 중도층의 선택이 선거 당락을 가른다는 점에서 기후 유권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당시 기후정치바람은 분석했다.
물론 평상시의 이런 ‘의향’이 실제 투표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막상 선거 레이스에 돌입하면 경제·일자리 문제 등 전통적 이슈에 밀려 기후정책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기후위기 대응이 산업전환과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경제 이슈임을 기후환경 진영은 계속 강조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기후위기비상행동과 기후정치바람 등 시민사회 단체는 새로운 방식의 대선후보 토론회를 제안했다.
후보들이 기후위기를 단일 의제로 놓고 TV 토론회를 열자는 것이다.
이들 단체는 “대선후보들이 탄소중립 목표와 에너지와 산업 전환, 기후 불평등 해소 등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밝혀야 한다.
선거방송토론위원회와 언론사 역시 기후 단일 의제 토론회가 열릴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요구했다.
별안간에 치르게 된 이번 대선에서 기후 의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이들의 분투가 시작됐다.
기후정책이 이번 조기 대선에서 중요한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