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7개월 만에 목포지방해양안전심판원(목포해심)에서 세월호 전복 이유를 결론 내렸다.
배를 기울게 한 건 부품 고장이지만, 배를 끝내 가라앉힌 건 세월호가 지키지 않은 규정들이었다.
세월호 조사에 참여했던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왼쪽)와 정준모 인하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시사IN 조남진 오랜 질문이다.
세월호는 왜 가라앉았는가. 참사가 발생한 지 10년7개월 만에 국가기관에서 공식 결론을 내렸다.
“이 전복 사건은 선사와 선원의 안전관리 소홀로 기준에 못 미치는 복원력을 가진 세월호가 과도한 양의 화물을 안전하지 못한 상태로 싣고 항해하던 중 변침 과정에서 조타기 이상 동작으로 과도하게 선회하면서 경사가 발생하고 적재와 고박이 제대로 되지 않은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며 선회와 경사가 가중되고 외판 개구부로 해수가 유입되면서 복원성을 상실하여 발생한 것이다.
” 2024년 11월26일 목포지방해양안전심판원(목포해심)이 재결서에 적은 주문의 첫 문장이다.
해심은 해양에서 발생한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관련자를 징계하는 ‘바다의 법원’이다.
지방해심은 지방법원, 즉 1심에 해당하며 재결서는 판결문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왜 세월호 승객 대부분은 구조되지 못했는가. 오래된 두 번째 질문이다.
배의 침몰이 반드시 인명 사고로 연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재결서 주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주문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이 건 사고에 의한 대규모 인명 피해는 사고 발생 후 선원이 승객에 대하여 적극적 구호 조치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 주요한 일인이다.
” 목포해심에서 ‘여객선 세월호 전복 사건’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4월17일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늦은 것도 문제지만 내용도 부실”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1기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2기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 3기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 등 세월호 진상규명 작업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전문가 대부분은 목포해심의 재결서 내용에 이견을 밝히지 않았다.
4월23일 〈시사IN〉은 선조위와 사참위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와 사참위의 자문에 응했던 정준모 인하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당시 대한조선학회 해양안전위원회 위원장)를 만나 이번 재결서(총 129쪽)의 의미를 물었다.
2017년 3월31일 인양된 세월호 선체가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시사IN 신선영 세월호 참사 조사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나? 전치형: 선조위에서 종합 보고서를 집필하는 외부 집필위원 네 명 중 한 명으로 참여했고, 세월호 참사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조사한 사참위에서도 종합 보고서 집필 팀으로 참여했다.
정준모: 사참위가 대한조선학회에 보고서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해양안전위원회 위원 30여 명이 용역 보고서를 검토하고 2023년 11월 대한조선학회 추계 학술대회에서 패널 토론도 했다.
대한조선학회 해양안전위원회는 천안함 폭침 사건 때 원인 규명에 참여했던 일부 교수들이 소송 등 고초를 겪은 일을 계기로 앞으로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개인이 아닌 학회 차원에서 자문에 응하기 위해 발족한 위원회다.
그동안 특조위, 선조위, 사조위까지 여러 번 사건을 조사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전치형: 검경이 합동수사를 하고 있었지만 불신이 깊었기 때문에 특별법을 제정하고 별도의 독립기구를 통해 조사하도록 한 게 특조위, 선조위, 사조위였다.
하지만 특조위는 선체가 인양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사를 진행해 어려움이 있었고, 당시 박근혜 정부의 방해 등 여러 이유로 아예 보고서를 내지 못했다.
선조위는 인양된 선체도 있었고 결론에 거의 도달했지만 ‘내인설’과 ‘열린 안(충돌과 같은 외력설)’으로 쪼개진 결론을 내림으로써 사실상 결론이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위원 7명 중 한 명이 불참했고, 남은 6명이 3대 3으로 갈려 둘 다 보고서를 냈다.
독립기구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를 배반한 것이다.
이번 헌법재판소 선고처럼 최대한 토론을 통해 만장일치 결론을 냈어야 했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가운데 2017년 3월29일 오후 선체조사위원들이 미수습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 팽목항을 방문해 가족들과의 면담을 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외력설은 왜 여전히 지지를 받나. 전치형: 외력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각종 데이터들의 작은 허점, 약간의 빈틈을 과도하게 주목하고 집중한다.
그러나 사고 당시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른다.
이번 목포해심도 재결서에서 그 점을 밝히고 있다.
검경 합동수사·특조위·선조위 등이 각각 계산한 화물 무게, 평형수, 연료, 복원성 수치가 다 다르기 때문에 “사고 당시의 실체에 근접한 수치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라고 밝히면서, “그런데도 공통된 세 가지 미준수 사항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한다.
우리가 완벽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지 않고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정준모: 교수 다섯 명에게 어떤 배에 대한 정보를 100% 제공하며 시뮬레이션해보라고 하면, 다섯 명이 다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모델링 과정에서 들어가는 변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뮬레이션한 사람은 실제 수조 실험 결과를 보여줄 때까지 자신의 답이 정답이라고 믿는다.
결과를 보여주면 그제야 ‘내가 뭘 빼먹었구나’ 하면서 보정을 하고, 그렇게 과학적인 결론으로 수렴해나간다.
전치형: 과학계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외력설을 설득하고 싶다면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면 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선에서 학술지에 실린 외력설 지지 논문은 없다.
제대로 된 학술지에 나왔으면 뉴스가 되었을 거다.
그런데 학회와 달리 조사위는 동료 심사나 게재 거부 같은 검증 절차가 있지 않기 때문에 내부에서 계속 외력설이 살아남았다.
이번 목포해심 판결에 대한 생각은. 정준모: 대한조선학회가 사참위에 일관되게 제시하고 조언했던 내용과 부합한다.
전치형: 물론 사참위는 전복 사건을 포함하는, 더 큰 참사에 대한 조사를 하는 위원회였고 목포해심은 전복 사건 그 자체만을 다뤘기 때문에 이것으로 참사 전체에 대한 결론을 지을 수는 없다.
다만 가장 논란이 된 침몰 원인에 대해 하나의 결론을 마무리 지어줬다는 데 의의가 있다.
‘조타기를 움직이는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이 원인이었다.
전치형: 이번 판결을 단지 부품 하나의 고장으로 축소 요약하지 않았으면 한다.
일차적으로는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맞지만 그것만으로 배가 가라앉은 건 아니다.
세월호는 이미 무리한 증개축, 과적한 데다 제대로 묶지 않은 화물, 안전수칙 미준수 등 수많은 문제가 누적된 배였다.
그래서 사회적 참사다.
만약 고작 솔레노이드 밸브 하나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유가족 입장에서도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목포해심 판결을 비판하며 “온전한 진상이 규명되기까지 포기하지도 예단하지도 않고 나아갈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전치형: 당연히 앞으로도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이 계속될 것이다.
새로운 팩트나 데이터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말하는 진상규명은 그 이상을 의미한다.
공식 절차를 통해 내려진 결론이 사회에서 공인되는 과정 말이다.
만장일치로 작성된 텍스트, 기록이 널리 퍼지고 읽혀야 우리 사회가 참사 원인을 잊지 않고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또다시 사회적 참사가 발생한다면. 정준모: 이런 참사에 대비한 상설기구가 운영되고, 그 상설기구에서 미리미리 전문가 풀을 꾸려놔야 한다.
참사 원인을 조사하는 데 이익을 바라고 참여하는 기관이나 기업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들이 정말 전문성을 갖추었을 수도 있지만, 기업은 근본적으로 영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기 힘들다.
전치형: 유가족의 강력한 의지와 행동, 수많은 시민들의 참여로 특별법을 제정해내고 새로운 기구를 출범시킨 세월호 참사 진상조사 과정은 한국 사회에 굉장히 놀라운 경험이었다.
‘우리가 이것만은 알아야겠다, 규명해내고야 말겠다’는 사회적 의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기회를 어떻게 소모했는가는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무엇을 밝힐 것인가, 데이터들이 서로 맞지 않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과학자들이야 그걸 가지고 몇 년 동안 분석할 수도 있지만 이 한시적인 기구에서는 어떻게 최대의 합의를 통해 최선의 설명을 제시할 것인가 등등. 특별법을 만들 만큼 특별한 사건에서 진상규명이란 단칼에 원인을 설명해주는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다.
거대한 사회적 합의의 ‘과정’ 그 자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년7개월 만인 2024년 11월26일, 목포지방해양안전심판원(목포해심)이 ‘여객선 세월호 전복 사건’ 원인에 대해 판결을 내렸다.
국가기관에서 내린 첫 공식 결론이다.
목포해심 재결서(판결문)를 토대로 왜 세월호가 가라앉았는지 타임라인을 재구성했다.
2014년 4월15일 이전 1994년 4월13일: 일본 시모노세키 하야시카네 조선소에서 만들어져 일본 해운회사 마루에이페리가 ‘나미노우에호’라는 이름으로 운항 시작 2012년 10월6일: 청해진해운이 중고로 수입 2012년 10월7일~2013년 2월16일: 전남 영암군 C.C.조선에서 여객·화물 공간을 증개축 2013년 1월24일: 선박의 증개축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국제선박검사기관 한국선급에서 화물 위치에 따라 배가 기울어지는 각도를 측정하는 경사 시험을 진행 2013년 2월4일: 경사 시험 결과를 토대로 복원성을 계산해 ‘차량 및 화물 고박 배치도’를 승인받음. 선장을 포함해 그 누구도 관련 정보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음. 또 승선 이후 한 번도 복원성을 계산해보지 않았음에도 경험상 복원성이 좋지 않다는 사실, 과도한 변침으로 인해 지나친 횡경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 2013년 3월15일: ‘세월호’라는 이름으로 인천-제주 항로에 투입. 비상 부서 배치표에 폭발, 충돌 및 좌초, 기관 고장 등 비상 상황에 따른 선원 개인별 임무가 적혀 있었으나 교육·훈련은 이루어지지 않음 2014년 4월15일, 참사 전날 오후 5시: 3등 항해사가 승선원 수와 화물량 정보를 빈칸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사항은 모두 양호하다고 기록한 ‘출항 전 여객선 안전점검 보고서’를 인천항 여객선 운항관리실에 제출. 담당자는 화물의 적재가 완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서류에 서명함. 세월호는 ‘차량 및 화물 고박 배치도’에 따라 승인된 공간에 승인된 고박 장치를 이용해 화물을 싣지 않고 과적함. 반면 복원성 계산서에 적힌 평형수보다 훨씬 적은 평형수만 실음 오후 9시: 인천항 출항. 한국해운조합 인천지부 운항관리실에 보고된 수치는 여객 450명, 선원 24명, 자동차 150대, 일반화물 652t. 실제로는 여객 443명·선원 33명 승선, 차량 포함 화물 2214t 적재 2014년 4월16일, 참사 당일 오전 8시48분37초: 선수 방위(뱃머리 방향) 139도. 3등 항해사가 타수 조준기에게 “아저씨 145도요”라며 145도로 변침하라고 지시. 조타기를 돌리던 타수 조준기는 선박이 예상보다 더 우측으로 돌아가자 “어, 어, 어, 안 돼, 안 돼”라며 당황함 오전 8시49분13초: 선수 방위 150도 오전 8시49분30초: 선수 방위 166도. 이후 약 20초 동안 굉음과 함께 화물이 왼쪽으로 쏠리고 차량이 이동하기 시작함 오전 8시49분37초: 선수 방위 180도 오전 8시49분48초: C 갑판 화물구역과 E 갑판 핀 안정기실로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 선원들은 평소 각 구획 사이의 수밀문과 맨홀을 열어두고 다님. 이날도 열린 상태였으나 아무도 폐쇄 조치를 취하지 않음 오전 8시49분56초: 선수 방위 229도 오전 8시50분56초: 선수 방위 270도 오전 8시51분: 선체가 50도 부근까지 급속하게 기운 뒤 선체 경사가 느리게 진행됨 오전 8시52분: 승객 중 한 명이 휴대전화로 119에 최초 신고 오전 8시56분: 선장으로부터 별다른 지시가 없자 승무원은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라’는 선내 방송을 여러 차례 실시 오전 9시25분: 진도 VTS ‘선장 판단하에 퇴선 결정하라’고 지시했으나 아무도 운항관리규정에 명시된 절차를 이행하지 않음 오전 9시45분: 선장을 비롯한 선원 10명이 해경에 구조됨. 아르바이트생 등이 아닌 선원들 모두 생존 오전 10시17분: 세월호 전복. 승선자 476명 중 304명 사망·실종
세월호는 왜 전복됐나, 10년 만의 매듭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