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박준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펴냈다.
두 번째 시집 이후 7년 만이다.
문단의 호평과 대중적 호응을 두루 얻은 박준 시인(사진)을 만났다.
박준 시인(42)이 돌아왔다.
최근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창비)를 펴냈다.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2018년에 낸 후 7년 만이다.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년)와 두 번째 시집은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신동엽문학상, 박재삼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서정시에 대한 발문·해설에서 신형철·송종원 등 문학평론가들은 김소월, 백석, 허수경, 김종삼 등 앞선 시인들의 흔적을 떠올렸다.
두 시집에 대한 대중적 호응도 컸다.
첫 시집은 64쇄를 찍었고, 두 번째 시집은 20쇄를 넘겼다.
첫 시집과 첫 산문집(〈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합쳐 50만 부 가까이 팔렸다.
일정만 맞으면 아무리 작은 학교라도 강연 요청을 거절하지 않는데, 도착해 보면 현수막에 ‘문단계의 아이돌’이라고 적혀 있곤 했다.
4월14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창비서교빌딩에서 박준 시인을 만났다.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펴낸 박준 시인. ©시사IN 박미소
7년 만에 시집을 냈다.
꽤 오랜만이다.
퇴고 시간이 길어졌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으니까 ‘이거 보면 속이 안 좋아지는데’ 할 때까지 원고를 봤다.
꼭 시가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언어를 낭비하지 않는다’는 게 낱말을 부리는 사람의 전통적 모습이다.
가장 최소한의 언어로 써야 한다는 생각에 퇴고 시간이 길어졌다.
넣는 것보다 빼는 게 더 힘들다.
2022년 무렵부터 어떻게 보면 시를 쓸 수 없는 상황 혹은 시를 쓸 수 없는 마음, 그런 경험이나 슬픔 이런 것들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누구라고 굳이 이야기하지 못하겠는데, 주변에서 너무 많이 죽었다.
직계가족의 죽음도 있었고. 내가 아끼고, 나를 아끼던 사람들이 하나둘 죽음을 맞이했다.
기쁨이나 삶의 동력 같은 것과 슬픔이나 삶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엇비슷하게 일어나고 다들 그걸 견디면서 사는데 ‘왜 이렇게 가혹한가’ 싶을 정도로 부정의 비율이 넘쳤다.
어떤 예고도 없이 혹은 인간다움의 시간도 주지 않고, 마중 나갈 시간이나 배웅할 수 있는 마음의 대비도 주지 않고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 죽음의 비율이 넘쳐났을 때 내가 약간 무력해지더라.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풍파가 왔을 때, 텍스트를 읽지 못하고 음악도 듣지 못하고 당연히 쓰지도 못하는데, 그런 시기를 겪느라 시집 출간이 늦어졌다.
이번 시집과 전작과의 차이는?
첫 시집 때는 허수경 시인이 그걸 잘 눌러줬는데, 잘난 체를 하고 싶었다.
‘잘 써야지’ ‘이게 한국어로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형태야’ ‘어떤 정서를 나답게 혹은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썼다.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에서 도망치기 위해 노력했다.
첫 시집이 많이 팔렸기에 첫 시집에서 도망치려 했는데, 내가 누군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 한다면 여전히 그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거잖나. 두 번째 시집에는 묘하게 첫 시집에 수록되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편들이 많다.
이번 시집에서는 ‘기획자로서의 나’가 사라졌다.
시집도 기획을 한다.
음식 만들 때 소금·설탕·간장 비율이 있듯 서늘한 혹은 더 차가운 정서를 넣거나 빼려 하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떤 것을 이야기하기 적합한 화자를 내세워서 더 풍요롭게 표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시인 자신, 개인으로서 읊조리듯이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처참 앞에 놓였을 때는 그냥 비명밖에 안 나오는데, 비명은 화자의 언어가 아니니까.
전작에 비해 시가 짧아진 느낌이 든다.
과거에는 어떤 사건이 정지되거나 끝난 상황에서 그것을 아름답게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계절과 아름다운 사건들이 가득했던 어떤 순간을 더 아름답게 꾸며내려 했고, 그러다 보니 시의 길이도 길어졌다.
이번 시집에서는 감정의 과잉이 아닐까 싶어 더 많이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대상과 사건과 거리 조절이 되지 않으니까. 최대한 메마르게 앙상하게 만드는 것.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가장 앙상한 상태까지 만드는 게 이번 시집이었다.
아무 수 없이, 어쩔 도리 없이 무엇을 직면하거나 그 앞에 놓일 때가 있다.
내 앞에 있는 참혹과 슬픔을 그냥 멍하니 지켜보는 게 무기력해 보이지만 사실 존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묵묵히 그 시간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어떤 사건이 끝난 상태의 공터를 계속 보고 있는 것처럼. 누가 보면 ‘바보처럼 왜 거기에서 그러고 있어’라고 할 텐데, 지금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전하고 싶었다.
이번 시집 제목을 바꾸었다고 들었다.
최초 제목은 ‘미음’이었다.
담백한데, 대가 흉내를 내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전작의 긴 제목에 익숙해할 독자들을 생각해서 ‘해가 지면 책도 그늘이 됩니다’ 같은 문장을 제목으로 삼으려고도 했다.
비문 같기도 한데 시인이 부릴 수 있는 낭만 같은 문장의 제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그러다가 막판에 틀었다.
시집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지금 제목으로 정했다.
박준 시인. ©시사IN 박미소
20대에 시만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했는데, 시를 써봐야겠다는 마음을 들게 한 시인이 있나?
김광규 시인. 시라고 하면 고어처럼 느껴지는 비일상적 언어가 시의 언어라고 생각했는데, 결례가 될 수 있는 말이지만, 김광규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의 언어, 문학의 언어가 따로 있지 않구나’ 느꼈다.
문턱이 낮아 보이는데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김광규 시인이 평탄하고도 아름다운 언덕을 만들어주었다.
박준 시인의 시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시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창비에서 시집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어서 투고 원고들을 계속 읽는다.
그럴 때는 시를 공부한 사람으로서의 독법으로 그물을 촘촘히 짠다.
저도 독자로서 시를 읽을 때가 있는데, 주말에 카페에서 시집을 읽을 때는 그물을 성기게 짠다.
이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섭렵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내 SNS에 옮겨 적고 싶은 한 문장을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읽는 것도 좋다.
문장 단위의 독서가 시에서는 나쁜 게 아니다.
이렇게 접근할 때 오히려 의미 있는 것들이 온다.
지금 준비 중인 책이 있나.
올해가 한국 시 100년이다.
〈동아일보〉가 1925년에 신춘문예를 시작했고,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도 같은 해에 나왔다.
김소월 시인부터 시작해 한국 시 100년의 좋은 시를 소개하는 책을 내볼까 한다.
시를 좋아하지 않아도 한국 사회에서 통하던 시의 문장들이 있었는데, 점점 우리가 공유하는 문장이 없어지는 것 같다.
공통의 미감이 더 늘어나면 좋겠다.
여전히 유효한 시를 소개하고 싶은데, 시 입문서가 될 수 있고 혹은 시 역사가 될 수도 있겠다.
박준이 돌아왔다, 7년 만에 새 시집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