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한 시니어 의사가 전북 정읍시 고부보건지소로 찾아왔다.
의사는 옥탑방에 살면서 마을 주민을 진료하고 있다.
응급의료계 거목이라 불리던 임경수 전 정읍아산병원장의 이야기다.
4월21일 오후 고부보건지소를 이끄는 임경수 고부보건지소장(왼쪽부터)과 김승혁 한의학 공보의, 이향선 간호사, 임민지 행정직원이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보건지소 앞에 서 있다.
©시사IN 이명익
전북 정읍시 고부보건지소의 시간은 마을버스 배차표에 맞춰 흐른다.
보건소의 공식 개원 시간은 오전 9시. 하지만 보건소 문은 마을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는 오전 7시40분께에 열린다.
긴 배차간격을 고려한 보건소의 작은 배려다.
4월22일에도 보건소의 하루는 어김없이 일찍 시작됐다.
문은 보건소 안에서 열렸다.
보건소 안에서 잠긴 문을 연 사람은 고부보건지소 임경수 소장(68). 그는 현재 보건지소 건물 2층 옥탑방에서 살고 있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왕복 2차선 도로에서 샛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300년 넘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우뚝 서 있다.
그 옆에 자리 잡은 2층짜리 벽돌 건물이 바로 고부면 보건지소다.
4월22일 오전 8시25분, 굵은 빗줄기를 뚫고 첫 손님이 도착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손님도 들어왔다.
“어깨가 아파가지고. 여기 의사 선생님이 용하다 해서 한번 와봤네.” “정읍 시내에 있는 병원에 가려면 시내버스 맞춰서 가야 하니까. 여기서 딱 한 번 치료받았더니 바로 나았죠.”
지난해 11월 명의가 보건소에 새로 부임했다는 소식이 마을에 돌았다.
소문은 고부면 인근 마을까지 퍼졌다.
일주일에 두세 명, 많아도 다섯 명 정도가 찾던 고부보건지소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4월22일에도 오전 9시가 되자 실내용 슬리퍼가 부족할 만큼 많은 인원이 대기 공간을 채웠다.
용하다고 소문난 그 의사는 응급의료계의 거목이라 불리던 임경수 소장이다.
임 소장은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과 서울아산병원 응급의학과에서 33년간 근무하면서 응급의료 체계를 구축한 베테랑 의사다.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대한외상학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22년에 아산의료원 산하 병원 중 하나인 정읍아산병원 병원장을 맡으면서 처음 정읍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정읍아산병원
병원장으로 있을 때 뇌경색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돌보는 남자가 당뇨를 앓게 되어 아파도 집을 떠나지 못한다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의료 취약 지역에 더 머물기로 마음을 먹었다.
“봉사 한번 해볼까 하는 건방진 생각에 왔죠.” 임 소장은 임기제 공무원으로 정읍시와 계약을 맺어 이곳 고부보건지소로 왔다.
임 소장의 경우는 시니어 의사가 시와 계약을 맺어 보건소 의사로 일하게 된 최초 사례다.
보건지소 업무 시작 시간 전인 오전 8시30분께, 전날 정류장에서 만나 버스표를 대신 끊어준 임경수 고부보건지소장(오른쪽)에게 주민이 답례로 빵을 선물했다.
검은 비닐에 담긴 빵을 든 임 소장이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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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가 되자 진료를 보러온 주민들로 고부보건지소의 대기 공간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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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소장의 진료는 진료실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청력이 안 좋은 환자를 위해 진료실 밖으로 나와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 “지난번 약은 잘 드셨어요?” “담배는 잘 참았죠?” 환자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안부를 묻는다.
이런 임 소장의 친절함이 만병통치약 노릇을 했는지, 보건소 덕분에 병이 다 나았다고 환자들이 말한다.
그렇다고 하기에 임 소장이 사용하는 건 고작 고동색 청진기 하나뿐이다.
“손 한번 잡아드리고, 스트레스 받으신 화풀이도 들어드리고 있어요.” 환자가 하고 싶은 말을 느긋하게 들어주는 것도 치료라는 듯 임 소장이 말했다.
시골 생활은 임 소장의 일상도 바꿨다.
검소하게 사는 삶이 몸에 배기 시작했다.
임 소장의 숙소는 보건지소 2층에 마련된 5평 남짓 옥탑방이다.
정읍아산병원에서 사용하던 ㄱ자 책상을 방 중앙에 가져다놓으니, 다른 것을 둘 공간이 부족했다.
침대 없이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잔다.
지난해 엄동설한을 이 옥탑방에서 보냈다.
지붕에 고드름이 맺히고, 낡은 창문 틈으로 바람이 술술 불어 들어왔다.
임 소장은 “희생정신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말했다.
서울로 돌아갈까 고민해본 적도 있다.
그랬던 임 소장의 마음을 붙잡은 건 이곳 사람들의 ‘잔정’이다.
4월22일 오전, 한 할머니가 검은 봉투를 손에 쥐고 보건소를 찾아왔다.
봉투에 낱개로 포장된 작은 팥빵이 들어 있었다.
전날 임 소장이 할머니 대신 내준 버스비 1000원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지난 6개월간 마을 사람들과 이런 잔정을 셀 수 없이 주고 또 받았다.
옥탑방에 들어오던 날, 임 소장과 정읍에서 알게 된 전정기씨(60)는 등유를 실어왔다.
또 다른 지인인 이재연씨(57)는 온수 매트를 들고 왔다.
또 누군가는 갓 뜯은 머위를, 쪽파를, 두릅을 가져다줬다.
임 소장은 언제 무엇을 받았는지 휴대전화 메모장에 기록해두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다.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꺼내 봅니다.
”
진료를 마친 주민과 인사를 나누는 임경수 고부보건지소장(왼쪽). ©시사IN 이명익
이향선 간호사가 환자에게 처방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보건소에 ‘시니어 의사’ 필요한 이유
보건소는 지역사회의 건강을 보장하는 1차 의료기관이다.
초진과 예방접종을 제공하고 건강 교육을 진행한다.
시골에서는 버스를 타고 시내의 큰 병원으로 이동하기 어려워 잔병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작은 병이 큰 병으로 번지는 위험을 막아주는 1차 ‘의료 댐’ 구실을 보건소가 맡고 있다.
그런데 최근 전국적으로 공중보건의 수가 급감하면서 보건소의 의료 공백이 가중되고 있다.
임 소장 같은 ‘시니어 의사’가 보건소로 와주는 일이 절실한 이유다.
시니어 의사의 장점은 노련함과 친숙함이다.
임 소장은 자진해서 주민들의 주치의 역할도 맡고 있다.
주민들이 건강검진 결과지나 처방전을 들고 오면 무료로 해석을 해준다.
자주 오는 환자에게는 잔소리처럼 금연과 금주도 권한다.
‘흰머리 의사’가 젊은 의사보다 더 편하다고 말하는 환자들도 있다.
4월21일 오전 보건소로 진료를 보러 온 60대 주민 이승권씨는 “나이가 비슷하니 소통도 잘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업무 시간 전인 오전 8시40분경 임경수 고부보건지소장이 진료실에서 컴퓨터로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임경수 소장이 고부보건지소 옥탑방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임 소장의 고부보건지소는 정읍시의 유연한 행정, 임 소장 개인의 결단, 그리고 지역의 공동체의식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사례다.
그러나 이는 임 소장 개인의 결단과 꾸준한 희생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도 안고 있다.
“주변에 오겠다는 의사가 많지만 그들을 당장 초대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게 임 소장의 생각이다.
임 소장은 “퇴직한 의사가 농촌에 정착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사학연금”이라고 설명한다.
“33년 동안 대학병원 의사로 일해서 한 달에 약 450만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보건지소장(임기제 공무원)으로 오니 연금이 끊겼습니다.
” 지금 공무원으로서 받고 있는 월급은 약 300만원. 서울과 정읍의 두 집 살림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고 임 소장은 말했다.
열악한 주거시설도 시니어 의사의 시골 정착을 가로막는 요인 중 하나다.
“고령 의사의 경우 척추나 다리가 안 좋은 경우가 있는데, 주거시설이 너무 열악하죠.” 정년을 넘긴 고령 의사에게 옥탑방 생활이 유인책이 될 수 없다.
지역에서 적절한 빈집을 활용한다면, 보건소가 귀촌 생활을 꿈꾸는 시니어 의사에게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임 소장은 제안했다.
임경수 소장이 고부보건지소에 온 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남은 임기는 약 1년 반. 이 이야기를 들은 환자들은 벌써부터 “임기를 연장해달라”고 임 소장에게 부탁하곤 한다.
사학연금 문제를 해결해주면 남아 있을 거라던 임 소장도 마음이 약해진 지 오래다.
정에 기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정에 빠져버렸다.
“정읍을 떠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더불어 산다는 말이 유치하게 들렸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전북 정읍시 고부면 고부보건지소에서 진료를 마친 한 동네 주민이 오토바이를 타기 전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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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수 고부보건지소장이 진료 중인 가운데 보건소를 찾은 주민들이 키를 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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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지인들을 만나려고 버스로 이동 중인 임경수 고부보건지소장. ©시사IN 이명익
시골 보건소 지키는 ‘낭만닥터 임사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