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연 작가는 최근 장편 스릴러 〈매듭의 끝〉을 출간했다.
7월에는 그의 소설 〈유괴의 날〉 리메이크 드라마가 일본에서 방영된다.
2012년 등단 이래 꾸준히 작품을 써온 그를 만났다.
정해연 작가의 작품 <홍학의 자리>는 ‘반전’ 미스터리·스릴러 소설로 17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시사IN 이명익
‘정해연 작가’라는 이름이 낯설 수 있어도, 그의 작품은 한 번쯤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2023년 방영된 드라마 〈유괴의 날〉의 원작이 바로 그의 소설이다.
〈유괴의 날〉은 영국·중화권 드라마 리메이크 판권이 팔렸고, 일본판 드라마는 오는 7월에 방송된다.
30쇄, 17만 부 이상 판매된 〈홍학의 자리〉를 비롯해 〈선택의 날〉 〈봉명아파트 꽃미남 수사일지〉 등도 드라마화 계약이 체결됐다.
〈더블〉은 중국·타이에서, 〈지금 죽으러 갑니다〉는 프랑스·타이에서 각각 번역·출간되었다.
작가는 번역·드라마·영화 판권 내역을 일일이 적어두지 않는다.
“팔렸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긴다.
정해연 작가(44)의 미스터리·스릴러 소설은 잘 읽힌다.
장르소설 마니아들이 보기에 내용이 흥미롭고, 문장도 안정적이다.
작품의 질이 ‘고르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시나리오 스쿨을 잠시 다닌 것 말고는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다.
작가 이력이 독특하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김치 공장·택배회사 경리로 일했고, 이후 12년 동안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근무했다.
2000년대 초반,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을 읽고서 로맨스 소설 작가로 4~5년 활동했다.
“회사 생활이 정말 맞지 않았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회사 생활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글쓰기가 회사 생활을 피할 수 있는 구멍 같아 보였다.
‘뭘 써볼까’ 하다가 발견한 게 로맨스 소설 사이트였다.
”
낮에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고, 퇴근 후엔 어머니가 혼자 운영하는 식당 일을 도왔다.
집에 돌아가 밤 12시에서 1시까지 글을 썼다.
로맨스 소설을 주로 썼는데, 어느 날 오빠가 말했다.
“너 ‘홈즈’ 같은 수사물을 좋아하잖아. 좋아하는 걸 써보는 게 어때?” 그 말에 자극받아 쓰기 시작한 작품이 〈더블〉이다.
그 소설 출간 이후에 미스터리·스릴러 장르로 방향을 틀었다.
7~8년 전, 그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 죽으러 갑니다〉(2018년 출간)를 집필하던 시기였다.
24시간 오롯이 소설 쓰는 일에 매진해보고 싶었다.
1년치 생활비를 모은 뒤 퇴사해 글쓰기에 전념했다.
다작의 비결은 ‘루틴의 노예’
2012년 ‘청춘물’ 〈백일청춘〉으로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 우수상을 수상한 이후, 출간한 장편소설만 스무 권이 넘는다.
중·단편은 제외한 숫자다.
다작의 비결을 묻자 정 작가는 자신을 ‘루틴의 노예’라고 표현했다.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작업실을 마련한 지는 4~5년쯤 됐다.
아침 9시 작업실에 출근해 오전에 글을 쓴다.
도시락을 먹은 뒤 오후에는 독서, 자료 조사, 퇴고 작업 등을 한다.
직장인처럼 주말과 국경일은 쉰다.
오후 5시 퇴근해 집에 가서는 저녁 7시부터 TV 채널 11번, 7번, 9번 순으로 ‘막장 드라마’를 연달아 시청한다.
밤 9시에 잠들어 다음 날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여행을 가도 밤 9시면 잠자리에 든다.
“글을 꾸준히 쓴다.
직장을 다니며 밤에만 글 쓸 때나 지금이나 하루에 A4 용지 4~5장 분량을 쓴다.
회사 다닐 때는 나 혼자만의 시간이 밤 시간밖에 없었기 때문에, 글 쓰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고 행복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누군가의 볼트 나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
독자들은 미스터리·스릴러 소설의 반전을 즐긴다.
정해연 작가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소설의 초반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게 만든다.
많은 작가들이 시놉시스를 미리 작성한 뒤 글을 쓰는 데 비해, 정 작가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최근 출간한 장편 스릴러 〈매듭의 끝〉(현대문학 펴냄)은 ‘나쁜 자식이 엄마를 속이는 이야기’라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첫 장면은 ‘엄마, 나 사람을 죽였어’로 시작해보자.” 그렇게 첫 장면과 반전, 결말 정도만 설정한 뒤 집필을 시작한다.
글을 써가며 ‘이 부분은 어떻게 하면 재미있을까’ 고민하면서 이야기를 덧붙여나간다.
이야기를 부풀리고, 사건을 만들고, 그걸 어떻게 수습할지 또 궁리한다.
이 과정을 오전의 작업실에서 반복한다.
혹여 등장인물 이름이 틀릴까 봐, 따로 메모해둔다.
이렇게 장편소설 한 편을 쓰는 게 한두 달에 끝나기도 하고, 잘 안 풀리면 3~4개월 더 걸리기도 한다.
“시놉시스 없이 처음부터 써지는 대로 쓴다.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 땐 정말 괴롭다.
작업실에서 데굴데굴 굴러본 적도 있다.
한번은 선배 작가인 정명섭씨에게 전화해 ‘이야기가 안 풀려, 지금 나 너무 괴롭고 죽을 거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직 안 죽었잖아’ 하더라(웃음). ‘그래. 내가 죽을 때까지 생각하진 않았어’ 싶었다.
이야기가 안 풀리면, 작업실에 앉아 죽도록 생각한다.
”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면, 작업실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말을 실감한다.
하루 목표 분량을 채우지 못하면, 그날은 퇴근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퇴근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정해연 작가는 ‘글이 흥미롭게 술술 읽힌다’ 해서 ‘페이지 터너(page turner)’로 불린다.
그는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좋아한다.
정 작가는 “누군가 재미있다고 해서 읽었는데, 정말 막힘없이 읽혔다.
글의 리듬을 잘 살리는 작가라 느꼈고, ‘이렇게 쓰자’고 결심했다.
퇴고할 때는 읽다가 걸리는 문장을 빼거나 고친다.
가독성을 높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라고 말했다.
〈매듭의 끝〉 띠지에는 “극한까지 처절한 모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소설을 쓸 자신이 없습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작가의 말’을 그 문구로 대신했다.
그는 “누군가는 홍보 문구라고 여길 수 있지만, 내 진심이었다.
나를 탈탈 털고, 우물의 바닥까지 긁어내듯이 쓴 작품”이라고 말했다.
공들인 만큼 독자 반응도 좋다.
초판 5000부를 찍었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재쇄에 들어갔다.
어떤 작가들은 동시에 여러 작품을 쓰는데, 정해연 작가는 한 번에 한 작품만 쓴다.
한 작품을 완성한 뒤 그 소설과 어울리는 출판사에 ‘완고’를 보여주고 출간 계약을 한다.
〈매듭의 끝〉 작업이 고됐기 때문에 올해는 더 이상 새 작품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작가로서 휴식기를 갖겠다면서도 ‘루틴’은 계속된다.
9시에 출근해 오전에 ‘자고’, 도시락 먹고, 오후에 운동하고 독서하고 퇴근한다.
그는 “쉬어도 이렇게 루틴을 지켜야 또다시 뭔가를 쓰기 시작할 때 수월하게 작업으로 돌아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정해연 작가에게 ‘혹시 (한국에는 흔하지 않은) 정치 스릴러는 쓸 계획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치 스릴러는, 현 상태의 정치보다 더 재미있게 쓸 자신이 없다(웃음)”라고 말했다.
상투적 표현이지만, 그의 차기작이 무엇일지 기다려진다.
그의 ‘인생 반전’만큼이나 ‘정해연표 소설의 반전’이 흥미로우니까.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탄생한 ‘정해연표 소설의 반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