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시 자이언 국제학교에 다니는 학생 대부분은 대학에 진학한다.
반면 공립학교에 다니는 고려인 아이들의 대학 진학률은 낮다.
‘다문화’와 ‘상호문화’의 차이에 그 이유가 있다.
6월17일 오후 자이언 국제학교 러시아권 교실에서 아이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교실 문을 열자 아이들이 벌떡 일어섰다.
“사디찻스, 사디찻스.” 최혁수 이주민시민연대 사회적협동조합(이하 이주민시민연대) 이사장이 두 손을 저으며 앉으라고 말했다.
“러시아어권 학교에서는 교실에 어른이 들어오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요. 발표하려고 손을 들 때도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받치고요. 한국하고는 좀 다르죠?”
이주민시민연대에서 운영하는 자이언 국제 상호문화 대안학교(이하 자이언 국제학교)를 소개하려면 이곳의 위치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국내에서 가장 많은 고려인이 사는 동네다.
선부동 땟골마을에는 고려인 약 3000명이 모여 사는 걸로 추정된다.
2016년부터 협동조합을 시작한 이주민시민연대는 러시아어로도 자녀를 가르치고 싶다는 조합원들의 소망에 따라 2018년부터 초등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대안학교 문을 열었다.
고려인이 자녀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치려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개정된 재외동포법 덕분에 2006년부터 재외동포 비자를 발급받은 고려인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영주권을 얻은 사람은 많지 않다.
소득기준 등 까다로운 요건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자녀도 한국에서 정착할 수 있기를 원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기에 혹시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경우를 대비해 러시아어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어 중심으로 가르치는 공립학교에서는 당연히 받기 어려운 교육이다.
자이언 국제학교를 운영하는 최혁수 이주민시민연대 시민협동조합 이사장. ©시사IN 신선영
초등학교 1~3학년 과정으로 시작했던 자이언 국제학교는 해마다 학년을 늘려 현재 8학년, 중학교 2학년 과정까지 가르친다.
러시아권 학급과 영어권 학급이 나뉘어 있고, 오전에는 학년과 상관없이 수준에 따라 한국어 교육을 한다.
이 시간에 공립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도 꽤 있다.
러시아어나 영어로 각 과목을 가르치는 건 오후부터다.
올해부터는 이곳에 들어오려는 아이들을 위한 입학 예비반도 운영한다.
특수학생반도 따로 있다.
벌써 학생이 190여 명에 달한다.
선생님은 스무 명이다.
본국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는 선생님만 뽑는다.
한 반에 한 선생님만 있는 게 공립학교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이주 배경 청소년 비율이 높은 공립학교에서는 수학이나 사회 같은 어려운 수업을 할 때 이중언어 선생님이 들어간다.
선생님이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면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등을 쓰는 이중언어 선생님들이 교실을 돌아다니며 각 언어권 아이들의 이해를 돕는 식이다.
반면 자이언 국제학교에서는 이중언어 선생님 혼자 수업을 진행한다.
통역을 거치지 않아도 되니 아이들이 산만해지지 않고 집중력이 높다.
언어도 언어지만 문화 차이도 크다.
자이언 국제학교는 학교 이름처럼 ‘다문화’ 대신 ‘상호문화’를 지향한다.
“다문화는 ‘우리나라에 왔으니 우리나라에 따르라’는 거예요. 다문화센터라고 해놓고는 한국 문화만 가르치죠. 상호문화는 ‘너희 문화와 합쳐서 더 좋은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거고요. 아이들은 어린 나이부터 다른 문화를 경험해봤기 때문에 리터러시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요. 환경만 갖춰진다면 자유롭게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인재로 자랄 수 있어요.” 최혁수 이사장의 설명이다.
자이언 국제학교에서는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이 될 때까지 한 선생님이 계속 담임을 맡는다.
러시아어권 학교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변화가 많은 환경 속에서 아이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일하는 김아리나 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교편을 잡았던 선생님이다.
“한국 학교는 어떨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혼을 내요. 공부를 안 하면 다음 학년으로 올려주지 않아요. 부모님은 일하러 새벽 6시에 나가서 밤 8시, 9시에 돌아오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어요. 아이는 선생님이 만들어줘야 해요.” 자이언 국제학교에서는 특히 한국 법에 대해 자주, 엄격하게 가르친다.
재활용 규칙부터 속기 쉬운 보이스피싱이나 딥페이크 범죄 등 최신 범죄 교육까지 아우른다.
학교는 아침 7시부터 밤 8시까지 열려 있다.
일찍 나가고 늦게 퇴근하는 부모를 위해 아이들을 하루 종일 돌보는 셈이다.
러시아어를 가르치고 싶어서 아이를 이곳에 보내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곳이기 때문에 믿고 보내는 부모도 많다.
자이언 국제학교 교직원들은 부모 대신 병원이든 학교 상담이든 어디든 아이와 함께 가준다.
부모의 행정 서비스도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
인근 공립학교에서도, 경찰서에서도 고려인 아이와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최혁수 이사장 휴대전화가 울린다.
방학에도 교실은 똑같이 운영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도 40%나 되지만 각종 후원금과 기부금으로 버티고 있다.
자이언 국제학교 매점에 러시아어와 영어로 된 메뉴판이 붙어 있다.
©시사IN 신선영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학교를 유지시키는 동력은 아이들의 대학 합격 소식이다.
자이언 국제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러시아에서 학력을 인정받기 때문에 외국인 특별전형 등으로 국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한국 공립학교에 다니는 경우 통상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힘든 현실을 감안하면, 90%가 넘는 자이언 국제학교의 대학 진학률은 놀라운 수치다.
스마트 교실은 되는데 상호문화 교실은?
고려인 아이들이 고등교육을 받기 어려운 건 언어 문제도 있지만 애초에 초등학교부터 입학 자체가 교장의 결정에 달려 있는 탓도 있다.
외국인등록증만 있으면 입학을 허가해주는 곳이 있는 반면 예방접종증명서부터 재학증명서까지 각종 서류를 본국에서 발급받아 제출해야 할 정도로 조건이 까다로운 곳도 있다.
아무래도 입학하기 쉬운 곳에 이주 배경 청소년이 몰릴 수밖에 없다.
자이언 국제학교에서 불과 약 2㎞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안산원곡초등학교는 전교생 474명 중 404명이 이주 배경 아동이다.
85.2%,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다.
6월17일 안산원곡초는 그린스마트 미래학교(이하 미래학교)로 새롭게 출발했다.
미래학교는 2020년 7월 교육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 10대 핵심 과제 중 하나”다.
지어진 지 40년이 넘는 낡은 학교를 “미래형 교수·학습이 가능한 첨단 ICT 기반의 스마트 교실”로 리모델링하는 사업이다.
안산원곡초등학교 관계자는 “전자칠판을 통해 선생님이 하는 말이 다양한 언어로 바로 번역돼 아이들이 수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중언어 선생님이 많이 계시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어려우니 디지털 기기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디지털 도구가 아이에게 문화적 맥락을 설명해주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일까지 해줄 수는 없기 때문에 보조기구로만 머물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자이언 국제학교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 한국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의 책들이 놓여 있다.
©시사IN 신선영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학비를 낼 형편도 되지 않는 가난한 조합원들이 모인 조합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는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내는데, 왜 모든 아이에게 태블릿을 사줄 수 있는 공립학교에서는 오히려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힘든 걸까? 김성천 한국교원대학교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공교육이 전제하고 있는 동화주의적 관점을 원인으로 꼽았다.
“미국 사회에 자리 잡은 한인 커뮤니티를 보면 영어를 못해도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 안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
더 이상 이주 배경 아이에게 원래 정체성과 문화 감각, 언어까지 다 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시대인데 여전히 한국 공교육은 경직돼 있다.
”
김성천 교수는 이주 배경 가정의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다양한 교육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공립학교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하지 말고 다양한 이주 배경 문화를 이해하는 주체들에게 자유롭게 학교 운영을 맡기는 적극적인 모델도 고려할 수 있다.
” 현재 이주 배경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로는 자이언 국제학교뿐만 아니라 가수 인순이씨가 설립한 강원 홍천군의 해밀학교, 충북 제천시의 한국폴리텍다솜고등학교, 서울 구로구의 지구촌학교 등 몇 곳이 더 있다.
하지만 이주 배경 청소년 19만3814명(2024년 교육부 통계 기준)을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다문화’ 대신 ‘상호문화’, 공교육에서 왜 힘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