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어.” 우리가 자주 하고 듣는 말. 네, 그런 법은 많습니다.
변호사들이 민형사 사건 등 법 세계를 통해 우리 사회 자화상을 담아냅니다.
2023년 8월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역에서 박경석 전장연 상임대표가 출근길 시위 400일을 맞아 발언하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부모가 되어 유아차를 끌어보면 길이 참으로 모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갈 수 있는 길은 제한적이다.
유아차가 탈 수 있는 교통수단도 제한적인데, 심지어 타고 내릴 때마다 불편한 시선 속에 주눅이 든다.
가림막 없는 길은 사방에 열려 있지만, 유아차가 돌돌거리면서 갈 수 있는 길은 자동차가 갈 수 있는 도로보다 더 좁고 적은 느낌이다.
유아차가 갈 수 없는 길 앞에서 아이를 한 손으로 안거나 업고 유아차를 접어 다른 한 손에 든다.
손목과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안 나오고 말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물며 타고 있는 사람이 잠시 일어날 수도 없는 휠체어는 어떨까. 4월17일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등록장애인 수는 263만1000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5.1%이다.
이 가운데 지체장애 비율이 43%로 장애 유형 중 가장 높다.
2024년 말 기준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20%를 차지한다.
지체장애인과 노령으로 인한 이동 제한 연령대를 합하면 본인 의사와 의지로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한 인구 비중은 전체 인구의 3%를 넘지 않을까 싶다.
그 많은 사람들이 왜 밖으로 못 나올까 그런데 주변에서 휠체어 등의 이동 보조장치를 이용하는 사람을 볼 일은 많지 않다.
사람 많은 서울 강남역 일대를 활보하고 다녀도 휠체어 이용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경험상으로는 일주일에 1회 이상 보기도 어렵다.
유아차 밀고 다니는 엄마 경험에서 반추해보자면, 이동 보조 수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길 자체가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내 이동 그 자체가 다른 평범한 직립보행자들에게 불편한 장애물이 될 거라는 우려도 있다.
그래서 ‘안 나오고 말지’라는 생각 속에 마음도 몸도 고립된 건 아닐까. 불편한 길과 불편한 교통수단은 단순히 ‘불편하다’에서 그칠 문제는 아니다.
인간은 자유롭고 안전한 이동을 할 자유와 권리가 있고 이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적절한 치료, 적절한 교육, 적절한 근로의 제공, 적절한 인적 교류 등은 모두 자유롭고 안전한 이동이 가능할 때 시작할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이동권’은 개인이 감수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국가가 보장해야 할 권리의 내용이다.
국민의 자유롭고 안전한 이동을 의미하는 이동권은 우리 헌법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진 않지만, 행복을 추구할 권리(제10조), 평등권(제11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제34조 제1항), 거주·이전의 자유(제14조) 등의 내용을 통해 헌법적 권리성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독일·캐나다·핀란드 등 많은 나라는 헌법에서 이동의 자유 혹은 권리에 대해 명시적 규정을 두고 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또한 장애인이 선택한 방식과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명백한 차별 행위다.
‘전장연 방지법’을 발의한 국민의힘 김재섭 의원. ©시사IN 박미소 지난 4월 국민의힘 김재섭 의원은 장애인 이동권 시위 가중처벌 법안인, 이른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방지법’을 발의했다.
정당한 사유 없이 통근시간대에 집회나 시위로 다수 시민의 통행을 현저히 방해하는 행위를 가중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한 철도안전법 개정안이다.
물론 1분 1초가 시급한 출근 시각 전장연의 단체행동은 지하철 이용객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행위다.
그러나 그 불편함 때문에 이들을 형사처벌 하는 것이 법적 타당성을 갖는지는 의문이다.
이동권은 중대한 헌법적 권리이고, 이를 보장하는 것은 사회의 책무이다.
이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법과 제도의 흠결이다.
입법부와 행정부는 이동권 보장이 미비한 것에 우선 사과를 한 뒤 이를 어떻게 보완 및 시정할 것인지 밝히고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국회의원의 ‘전장연 방지법’이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약자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편 가르는 정치만 성행하고 모든 국민에게 보장되어야 할 이동권에 대해 진지한 반성과 검토, 의견 수렴은 제 갈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잔인하게도 물리적으로 고립된 자가 겪는 고충은 그의 신체와 같이 고립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문제에 대해 둔감할 수밖에 없고, 고립된 자들의 고충까지는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지난 5월 더불어민주당의 서미화 의원이 혜화역을 방문했고 전장연 시위는 일단 중단되었다.
해결되어서 중단된 것은 아니다.
고립된 일부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외부의 노력을 믿어보기로 한, 임시적인 반응일 것이다.
혹여 다시 시위가 시작되면 불편해하기보다는, 여전히 이동권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공감해주면 어떨까. 우리 모두는 자유롭고 안전한 이동을 할 헌법상의 권리가 있다.
이동권은 ‘편의’가 아니라 ‘권리’다 [세상에 이런 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