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서울보다 큽니다.
전국 곳곳에서 뉴스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지역 언론인들이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소식을 들려드립니다.
‘전국 인사이드’에서 대한민국의 가장 생생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2002년 11월 연설을 하던 노무현 대선후보가 달걀을 맞고 입을 감싸고 있다.
©연합뉴스 2000년 4월, 부산 강서구 명지시장 앞 공터. 제16대 총선에서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마이크를 잡았다.
청중은 물론 취재진조차 없는, 텅 빈 공터를 바라보며 노무현 후보가 던진 첫마디. “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할 말을 잊어버렸는데···.” 달변가인 노무현 후보조차 청중 없는 유세장 바닥에서 쉽게 입을 떼지 못하는 모습은 지역주의의 공고한 벽을 보여주는 우리 정치사의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당시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 불리던 서울 종로의 현역 국회의원이던 노무현 의원은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에 내려왔다.
동서 화합, 지역주의 타파를 이뤄보겠다며 선택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선거 결과 득표율 35%대에 그치며 낙선했지만 ‘공터 연설’로 상징된 노무현의 바보 같은 도전은 시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년 뒤 ‘바보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후 부산을 찾는 정치인들은 종종 명지시장 앞 공터에서 마이크를 잡는다.
자신이 ‘노무현의 꿈’을 실현시키겠다, 그 꿈을 함께 실현시켜달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한다.
지역감정의 산을 넘고, 권위주의와 기득권에 맞서 소신을 지키는 일. 그들이 말하는 ‘꿈’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꿈도 있다.
자신의 정치적 고향에서 만년 낙선하던 정치인이 단숨에 대통령 자리까지 오르는 꿈, 이른바 ‘언더독의 반란’일 것이다.
그런 정치인이 이번 대선에도 있었다.
청년 정치를 내세운 그 후보는 부산 첫 방문지로 명지시장을 택했다.
‘텅 빈 공터에서 연설한 느낌을 그대로 오마주해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밝혔지만 그러기엔 유세장에 수많은 언론사 카메라가 진을 치고 있어서 조금도 비슷한 느낌이 나지 않았다.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연단에 서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곳에 섰을 때의 외로움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 비슷한 것을 겪어봤다”라며 ‘성상납 의혹 사건’으로 공격받던 국민의힘 당대표 시절 일을 빗대는 무리수를 뒀다.
그러면서 “꿈이 이뤄지는 날, 다시 명지시장에서 찾아뵙겠다”라며 공터 연설을 마쳤다.
부산에서 유일하게 이재명이 김문수 누른 강서구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명지시장이 위치한 강서구 주민의 평균연령은 40.8세로 부산에서 가장 젊은 지역이다.
하지만 청년을 대변한다던 그 후보의 득표율은 전국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강서구는 부산에서 유일하게 이재명 후보가 김문수 후보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하며 꿈틀거리는 낙동강 벨트 민심의 변화를 보여줬다.
부산 민주당은 지역주의 타파라는 ‘노무현의 꿈’이 노무현이 출마했던 마지막 지역구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강서구의 승리에 더 큰 의미를 두기도 했다.
2002년 겨울 대선, 노무현 후보는 ‘쌀 개방’에 항의하는 농민으로부터 계란을 맞았다.
노 후보는 얼굴에 계란을 묻힌 채 끝까지 연설을 이어가며 “일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계란을 맞겠다”라고 말했다.
늘 노동자와 약자 편에 섰던 고졸 출신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이 언더독의 서사가 정치인들에게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 걸까. 이번 대선에서도 이념과 정당을 벗어나 수많은 정치인이 노무현을 소환하고 자신이 그 정신을 잇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건, 너무나도 다른 행보 탓이다.
노무현의 길을 걷고 싶다던 그 후보는 지난달, 대선 3차 토론에서 성폭력을 묘사한 망발을 쏟아냈다.
이후, 한 유세장에 ‘차별·혐오 선동 후보 반대한다’는 피켓을 든 시민들이 나타났다.
해당 후보는 이에 답하는 대신 “뒤에 계신 분들 가재, 붕어, 개구리가 되는 삶에 동의하시면 환호해달라”며 조롱 섞인 발언으로 대응했다.
그가 진짜 오마주해야 할 것은 텅 빈 공터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부산 명지시장 온다고 다 노무현 아입니더 [전국 인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