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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인사이드’에서 대한민국의 가장 생생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9월20일 제17회 대구퀴어문화축제에서 참가자들이 ‘우리는 지워지지 않아’라는 슬로건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뉴스민 제공 몇 해 전 엄마와 함께 대구퀴어문화축제에 간 적이 있다.
대구의 다양성·역동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함께 옷깃에 무지개 배지를 달았다.
‘퀴어’라는 단어조차 생소해하던 엄마는 금세 적응해 부스 활동가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행사 말미 퍼레이드를 보며 엄마는 나지막이 “대구는 참 신기한 도시”라고 말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며 스스로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대구퀴어문화축제는 2000년 서울퀴어문화축제 출범 이후 전국에서 두 번째로 시작된 유서 깊은 행사다.
2009년 1회를 연 이후 우여곡절 속에서도 매년 이어왔다.
올해도 9월20일 제17회 대구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이날의 슬로건은 ‘우리는 지워지지 않아’였다.
12·3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처음 광장에 나왔던 이들도 축제에 얼굴을 비췄다.
한 10대 시민은 광장에서 함께 들었던 노래를 섞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난 ‘우리는 구워지지 않아, 사탄들을 위한 지옥 불의 도시로’라고 적힌 스티커를 소중하게 챙겼다.
보수 개신교 단체의 반대 집회와 피켓 시위, 오물 투척에도 꿋꿋하게 이어온 축제는 대구의 저력을 보여준다.
당사자의 참여를 기대하기 어렵던 초창기 축제를 지탱한 건 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었다.
다 모아도 한 줌뿐인 지역 여건상 서로의 품앗이에 기댄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그렇게 버텨낸 축제는 4회 동성결혼식 퍼포먼스, 7회 교회 장로의 오물 투척 사건 같은 분기점을 거치며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역설적으로 개신교 단체와 무지개 활동가들의 공생이 효과를 봤다.
매년 열리는 축제는 지역의 활동가들이 모이는 장이 된다.
이들은 부스·퍼레이드·자원봉사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기획단에 참여한 청년들은 이 경험을 발판 삼아 활동가로 성장한다.
자신을 ‘대구퀴퍼 키즈’라 호명하는 임아현씨(29)는 19살이던 10년 전 처음 기획단에 합류했다.
20대에는 영남대학교에서 성소수자 동아리 ‘유니크’를 만들었고, 정의당 후보로 구의원 선거에도 도전했다.
그의 경험들은 개별로 존재하면서도 서로 깊숙이 연결돼 있다.
“대구퀴어문화축제는 내게 집과 같다.
명절이면 집에 가 전을 부쳐야 하듯, 때가 되면 돌아가 뭐라도 도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지역에서 어떻게 ‘잘’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 축제 장소는 그 자체로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 광장에서 열리던 축제는 참가자가 늘어나면서 2019년 반월당 대중교통 전용지구로 옮겨졌다.
주간 시간대 시내버스만 통행할 수 있는, 왕복 2개 차로다.
하지만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재임 당시 행정력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축제를 방해했고 축제 조직위는 대구시와 홍 전 시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6월 대법원은 대구시의 배상 책임을 최종 확정했지만, 여전히 경찰은 시민 통행권을 이유로 2개 차로 가운데 1개만 사용하도록 집회 제한 통고를 내리고 있다.
9월20일 대구퀴어문화축제에 나온 깃발들. ©뉴스민 제공 곧 20주년을 맞이할 대구퀴어문화축제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초창기의 우당탕탕은 박문칠 감독의 다큐멘터리 〈퀴어053〉(2019)에 섬세한 시각으로 담겨 있다.
9월27일 오후 대구 오오극장에서 열린 특별 상영회에서 한 참가자가 말했다.
“이제까지 축제의 흥행 요소가 혐오와 분노였다면, 앞으로의 축제는 시민들의 환대로 꽉 찼으면 좋겠다.
” 임아현씨는 나이 들어가는 성소수자가 지역에서 어떻게 ‘잘’ 살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싶다고 말했다.
축제는 1년 내내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담고 있다.
“참 신기한 도시” 대구의 우당탕탕 퀴어 축제 [전국 인사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