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에 주목하기로 했으면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
뜬금없이 불어온 영포티 조롱 바람에 제도권 언론이 호응하는 방식은 ‘바이러스적 담론 주체들’과 다를 바 없다.
2016년 ‘트렌드 예언서’에서 시작된 ‘영포티’는 최근 세대 간 혐오의 언어로 부상했다.
©시사IN 이명익 참 하기 싫은 말이지만 해야 할 때가 있다.
누군가 듣기 싫어할 고언(苦言) 같은 걸 가리키는 건 아니다.
고언은 애초에 그 말의 정의가 “듣기에는 거슬리나 유익한 말”이다.
그런 건 별 주저 없이 한다.
약간 사이코패스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은 하기 싫지 않다.
유익하다면 상대가 거슬려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그 말을 하는 내가 미움을 받을까 봐 주저하는 거라면, 그냥 해야 한다.
소명으로서의 내 직업은 원래 그런 직업이다.
그렇다고 ‘미스터 쓴소리’ 같은 허접한 칭호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고언이라기보다는 다른 누군가에게 인기를 끌기 위함일 경우가 많아서다.
그건 고언이라기보다는 감언에 가깝다.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감히 던지는 말인 감언(敢言)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달달해서 내게 이로운 감언이설(甘言利說)이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할 말이란 무얼까.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사회에 도움이 되는 걸까 싶기는 해도, 반드시 ‘인용’해서 ‘언급’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을 가리킨다.
예컨대 나는 어지간해서는 정치인들의 말을 인용하는 걸 매우 싫어한다.
그들은 어떻게든 인용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족속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귀와 심장에 콕 박히는 말을 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것 자체는 나쁠 것 없다.
또 애초에 정치란 그런 거다.
하지만 정치인이, 권력자가 한 말이라고 해서 그냥 옮겨주고 싶지는 않다.
정말 해야 할 말이고 들어야 할 말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퍼뜨리고 싶어서’ 하는 말에 나까지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미스터 쓴소리’가 그렇듯 ‘명언 제조기’라는 호칭 역시 전혀 명예롭지 않다.
잘 퍼지는 말과 좋은 말은 같지 않으며, 때로는 그 성격이 상충되기까지 한다.
지금처럼 혐오가 소셜미디어를 타고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인용하여 언급하기 싫지만 그래도 그럴 필요가 있는 경우란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떠오를 때다.
현존하게 됐고, 누구나 인지할 수 있게 된 걸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하는 게 옳지 않을 때인 것이다.
근거에 대해서는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는, 주장을 위한 주장, 애초부터 억지를 부리려고 지어낸 말들은 비록 언급하기 싫지만 때로 해야 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책임이 큰 자리에 있는 이들의 발언일 경우 정확한 사실을 짚고 논박 해주지 않으면 자칫 사회적 영향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 인용은 무익하다.
‘비판’과 ‘교정’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혐오의 언어다.
인용을 하는 내 입과 손이 더러워질뿐더러 그걸 보고 들어야 하는 이들의 눈과 귀가 불쾌해지고 나아가 오염이 될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비판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여의치 않다.
혐오는 감정이다.
이성과 달리 감정은 비판으로 교정되지 않는다.
다른 감정으로 감화시키거나 튕겨내는 수밖에 없다.
혐오를 만들고 퍼뜨리는 자들은 혼내야 하지, 설득할 수 없다.
이들을 혼내는 건 그들의 반성보다는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윤리의식’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언급하기 싫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언급하기 싫지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같은 최근의 혐오 언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영포티’이다.
나는 이 말이 대략 한 달 전쯤부터 부쩍 많이 언급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생뚱맞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만들어진 지 오래된 말이었다.
세대를 규정하는 숱한 말들이 거의 그렇듯, 매우 부적절하고 그리 설득력도 없다.
지적으로는 참으로 나태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감성적으로도 별반 달라붙는 맛도 없는 단어였기에, 그냥 무시하고 살던 터라서 더 그랬다.
별안간 이 단어의 언급이 온라인에서 급격히 늘어난다 싶더니, 이미 떠돌던 것들이 다시 호출되거나 새로운 밈이 만들어졌다.
그걸 총망라한 이미지가 등장했다 싶더니, AI 시대에 걸맞게 동영상으로 ‘실사화’된 것들까지 나왔다.
급기야 제도권 언론이 이를 언급하는 데에 이르렀다.
문제에 주목하기로 했으면 분석이 뒤따라야 한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라 보고, 그것의 주체와 원인, 그리고 그것이 지금 활성화되도록 이끈 조건을 탐색하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엄밀한 학술적 분석이 필요한데, 지금 이 자리에선 그걸 하나하나 수행할 순 없다.
그래서 관련된 주체의 다양성과 그들의 ‘동기적 다양성’에만 초점을 맞출 생각이다.
요컨대 이 현상의 배후에는 여러 주체들이 얽혀 있으며, 각자가 이것에 주목하고 언급할 때 어떤 감정적 동기가 작동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조롱과 폄훼, 혐오의 대상이 된 당사자들은 당연히 불쾌해하며 이를 언급한다.
불쾌하기만 했으면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을 테다.
이걸 만들고 퍼뜨리는 자들의 의도가 그런 불쾌감을 자극하여 ‘발끈’하게 만드는 데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요즘 많이 쓰이는 ‘긁힌다’라는 표현은 일부러라도 피할 생각이다.
저들의 언어, 가뜩이나 조잡하고 저열하기 짝이 없는 언어를 굳이 가져다가 우리의 마음, 이 복잡하고 중층적인 심사를 표현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은 딱히 어쩌지도 못한 채 난감해한다.
자신들의 자식뻘, 조카뻘, 한참 후배 혹은 멀기만 한 어린 직원급에 해당하는 이들이 온라인에 숨어서 자신들을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다.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까지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연령이나 지위로 치자면 저 단어를 쓰며 낄낄대는 이들이 조금 더 약자라면 약자인 것 같다.
풍자라고 말하기엔 저급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의 혐오라고 말하기도 어색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불쾌하지만, 주춤하며, 난감해한다.
8월30일자 〈조선일보〉에 ‘영포티’ 현상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 갈무리 이걸 만들고 퍼뜨리는 자들은 모처럼 신이 났다.
원래는 자신들이 만든 단어도 아니었고,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케케묵은 표현에 불과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반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 시선으로 보자면 꼴같잖은 늙다리들이 ‘미중년’이니 ‘영포티’니 하면서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별로 젊지도 않은 시늉을 하는 게 못마땅하고 역겨웠을 뿐일 테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들의 주변에서 흔히 마주할 만한 그런 ‘꼰대’ 초입의 인간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자신이 늙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군상들의 ‘청춘 코스프레’가 가뜩이나 싫었는데, 그걸 기가 막히게 짚어서 조롱하는 이미지가 나왔다.
게다가 마침 조롱의 대상이 된 그들은 ‘요즘 젊은것들’을 욕하고 훈계하던 윗세대로 직장에서, 학교에서, 혈연과 지연이 작동하는 공간 안에서 자신들을 ‘아랫것들’로 찍어 누르던 ‘윗것들’이다.
오프라인에서야 보는 눈이 있고 본인과 상대의 사회적 체면이 있으니 대놓고 조롱할 순 없지만, 온라인에서는 눈치 볼 일도 없고 세력이 딱히 밀리지도 않는 듯하니 좋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대는 ‘성별’에 의해 ‘정치적 성향’이 나뉘는 것 같았는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만은 상당 부분 일치단결한다.
딱히 혐오의 대상이 된 세대도 아니고, 또 이걸 만들고 퍼뜨리는 적극적 주체도 아닌 이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심하게 시크’하다.
하지만 은근히 신경 쓰이고, 은근히 재미나기도 하고, 은근히 고소하기도 하고, 은근히 긴장도 된다.
연령대는 비슷하지만 정치 성향이나 행태 등에서 거리가 있는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
요컨대 ‘나는 대충 그 세대에 걸쳐 있지만, 너희들이 욕하고 싶은 그런 사람은 아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알려주는 영포티에 속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모양새다.
영포티 조롱 이미지에 등장하는 복장과 액세서리는 가급적 피한다.
‘스윗남’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여성주의로부터도 거리를 두고, 김어준 추종자라거나 민주당 지지자라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 그들의 편향과는 다른 자신들의 공정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렇게 온라인에서 손가락질하는 젊은이들을 이해해주면서,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을 탓하는 진정한 서티·포티·피프티·식스티 등등이 되려 한다.
뜬금없이 불어온 영포티 조롱 바람에 제도권 언론이 호응하는 양식 속에서도 이런 감정적 동기가 읽힌다.
이들이 공을 들여 그 바이러스적 혐오를, 그 혐오의 밈을 받아서 퍼뜨리는 동기는 결코 불쾌감이나 우려 혹은 비판에 있지 않다.
한편으로는 신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흥미롭다.
은근히 고소하지만 대놓고 공감하긴 멋쩍다.
이런 감정적 동기는, 아주 쉽게 말하면, 언필칭 민주당 지지자들과 김어준 추종자들을 ‘까고 싶은’ 마음, 요컨대 ‘스스로 정치적 성향이 없다고 말하기 위해 갖게 되는 실질적 정치 성향’에 의한 것이 크다.
게다가 지금 당장 제도권 언론의 기층에서 시쳇말로 박박 기는 사람들은 이 ‘현상’의 적극적 주체에서 소극적 주체까지 폭넓게 구성하고 있는 아랫세대와 겹친다.
그리고 이걸 승인하고 내보내기로 결정하는 ‘편집권’은 스스로 영포티라 조롱받고 싶지 않은 윗세대에게 있다.
이들 모두, 대놓고 영포티 담론과 밈에 공감할 수야 없지만, 자신들이 영포티를 손가락질하는 세대의 적극적 일원은 아님을 입증하는 한편, 스스로가 영포티라 조롱받지 않아야 할 사람들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로서 적합하다.
게다가 혐오 바이러스에 올라타는 게 그 어떤 ‘뉴스 가치’보다도 성공이 보증되는 ‘달달한’ 공식 아니었던가? 언어와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마저도 나는 제도권 언론이 이렇게 영포티 바이러스에 올라타기 전에, 적어도 애초에 그 담론을 만들고 퍼뜨린 주체가 자신들이었다는 점만은 알고 또 인정했으면 한다.
영포티라는 단어는 지금부터 10년 전인 2015년에 창안됐다.
세칭 ‘트렌드 분석가’ 김용섭이, 제목에는 2016년을 붙였지만 정작 2016년이 오기 전 몇 개월간 팔리는 게 목적인 ‘트렌드 예언서’를 내면서부터였고, 새해 벽두에 그 책 저자를 인터뷰한 〈한국일보〉가 참으로 상세히도 이 용어를 설명해줬다.
이른바 X세대 열풍의 주역이던 1970년대 초반생들이 40대로 진입했는데, 과거에는 명백한 중년에 해당하는 나이지만 결코 중년으로 부를 수 없는 ‘여전히 젊고 적극적인 소비층’으로서 이들을 시장에 묶어둘 필요가 있었던 거다.
〈동아일보〉는 이에 화답해서 ‘사초세대’라는 말을 더하기도 했다.
그런데 워낙 이런 말들이 많이 만들어지다 보니 별로 쓸모가 없었고, 사실상 죽은 말이 되어 잊혔다.
‘영포티’ 현상을 다룬 언론사들의 유튜브 영상들. ©유튜브 갈무리 그러다가 이제는 자신들과 같은 마케팅 주체가 아니라 혐오 표현에서 정체성을 느끼는 바이러스적 담론 주체들이 이걸 되살려버린 것이다.
아뿔싸, 담론적 주도력은 물론 의제에서부터 유행어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는 언론들은 혼란스러운 행보를 보인다.
원래 지칭하고자 했던 이들이 이미 40대를 지나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실은 그 바이러스적 혐오 담론 주체들의 간판급인 이준석 의원이 40대로 진입해버렸기 때문에, 황급히 ‘영피프티’ 같은 변형 단어를 만들려고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영피프티’는 2024년 김난도 교수가 만들었다.
솔직히 영포티라는 실패한 선행어에 10년을 더한 것밖에 없어서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그걸 〈중앙일보〉가 인터뷰해줬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망언적 명언 이후 칭찬은 물론 욕으로부터도 멀어졌던 김난도 교수는 이걸 계기로 2030한테 잔뜩 욕을 얻어먹었다.
당시 ‘영피프티 현상’을 두고 〈주간경향〉도 분석 기사를 썼다.
하지만 분석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2030의 반발 안에서 이미 도사리고 있던 단단한 혐오의 감정을 짚지도 않으며, 오히려 그들의 ‘정서’를 이해해야 함을 넌지시 타이르고는, 혐오의 대상이 된 세대들의 성차별적 편향을 문제 삼는 식으로 그런 혐오 감정에 나름의 근거를 제시해주기까지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 정당화해주고 싶었던 감정은 불과 1년 뒤에 ‘영포티’ 혐오 담론으로 총결집하는 바탕 동력이 되고 있다.
1년 전에는 그걸 볼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혹시 지금도 그걸 보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리하여 원래 마케팅 목적에서 호출되었다가 이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폄훼 목적에서 재호출된 세대의 실제 ‘연령대’와는 무관하지만, 대충 눈 껌벅대며 서로 다 알고 있다는 시늉을 한다.
영포티가 가리키는 건 ‘생물학적 40대가 아니’라면서 말이다.
하기야, 애당초 혐오에 무슨 용어적 정확함 같은 게 필요했겠는가, 혐오하는 감정만 퍼뜨리면 그만인 것을. 언어와 정보를 다룬다는 자들마저도 이렇다.
참으로 가관이다.
‘영포티’에 긁히는 자, 신나는 자, 뻘쭘한 자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