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기자들이 직접 선정한 이 주의 신간. 출판사 보도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기자들이 꽂힌 한 문장.
가난의 명세서
김나연 지음, 글항아리 펴냄
“설레지 않는 것은 버리라고 설파한 곤도 마리에는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
우리가 가난을 얘기할 때 말하는 ‘가난’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원고를 쓰는 내내 생각했다.
질문은 계속됐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 내가 처한 현실은 가난일까 아닐까, 가난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진정성이 생기나? 가난은 세상에서 ‘나’를 지웠다.
취향과 자존감, 미래를 축소하고 제한했다.
돈을 허튼 데 쓰지 않아도, 열심히 살아도 가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가난의 명세서’가 탄생했다.
10월 카드 명세서의 시작은 작업용 노트북 6만1900원이다.
12개월 할부의 마지막 회차다.
다음은 엄마 병원비 7만3319원. 이 책은 줄곧 가난을 혐오해오던 저자가 ‘가난을 토해낸’ 결과다.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
류현우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핵심은 이것이다.
혁명 자금은 어디에서 발생하며, 어디에 은닉되고, 어떻게 관리되는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는 누가 쓰고, 그의 비자금은 누가 관리할까? 세습 독재체제에서도 최고지도자의 생각과 다른 파벌이 존재할까? 김씨 일가의 진실을 알게 됐거나, 한국 드라마를 몰래 숨겨 들어온 사람은 어떻게 될까? 쿠웨이트 주재 북한 외교관이었던 저자가 베일 속에 가려진 ‘백두혈통’의 심장을 해부한다.
동시에 저자는 김정은의 공적 비자금을 관리하던 노동당 39호실 실장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김정은의 사적 비자금을 관리하는 북한 비밀 조직의 실체를 최초로 폭로한다.
조직의 이름은 ‘국무위원회 36국’. 저자는 36국이 김정은의 경호 장비와 방탄차, 요트, 시계 그리고 제비집과 상어지느러미 같은 고급 식료품에 이르기까지 김씨 일가의 모든 물품의 해외 공수를 맡는다고 전한다.
그에 따르면 36국이 집행하는 자산 규모는 수백억 원이다.
나는 미쳐가고 있는 기후과학자입니다
케이트 마블 지음, 송섬별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그리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이 책에 대한 은유 작가의 추천사는 이렇다.
“기후위기에 관한 긴 글은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만 읽는다는 속설이 있다.
알아서 애타는 소수와 몰라서 태평한 다수는 다른 언어를 쓰는 종족이다.
저자는 둘 사이에서 통역을 시도한다.
”
기후과학자인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오늘날 기후 문제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리고 싶었다.
둘째, 무너져가는 세계에서 기후과학을 연구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설명하고 싶었다.
셋째, 기후 문제에 대해 내가 느끼는 너무나 복잡한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 저자는 “만약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그건 결점 많고 한계도 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친 덕분일 것”이라고 말한다.
궁정인 갈릴레오
마리오 비아졸리 지음, 박초월 옮김, 소요서가 펴냄
“갈릴레오는 ‘대공의 철학자 겸 수학자’로 자신을 재발명했다.
”
지동설로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는 화형을 면하기 위해 천동설을 긍정했다.
그러나 재판정을 떠나며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뇌까렸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는 제쳐두고, 이 이야기를 통해 갈릴레이는 ‘과학적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외롭게 싸운 영웅으로 부각되어왔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인 갈릴레이는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뒤 이를 당대 최고의 권력인 메디치 가문에 헌정하고 그 대가로 작위를 받는 등 ‘정치’에도 매우 능숙한 인물이다.
그랬기에 당시엔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수학을 ‘우주의 원리’를 규명할 수 있는 학문으로 승격시켜 새로운 과학의 가능성을 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풍부한 1차 사료를 통해 갈릴레이 및 근대 과학 탄생의 행적을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한다.
인류 멸종,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디어
토드 메이 지음, 노시내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지구에서 우리가 정당하게 존속하기 위해 뭔가 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2023년 10월 발발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전쟁은 무수한 상흔을 남겼다.
가자지구에서만 6만6000명 이상이 숨졌고, 영양실조·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부상, 난민·인질 발생, 기타 사회·경제적 손실까지 더하면 그 피해를 다 헤아리기 어렵다.
다른 존재의 영향이나 개입 없이, 오로지 ‘인간’ 자신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창조적 재난’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인류가 꼭 존재해야 할까?” 쉽고 재미있게 철학하는 법을 설파해온 저자가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전쟁·기후위기·환경파괴 등 전 지구적 위기를 자초하지만, 멸종 대신 이 행성에서 살아가기를 택한 이들에게 보내는 ‘당부의 말’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의 필요성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해 더 나은 삶을 희망하는 일로 나아간다.
의미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엘리 펴냄
“그리고 당신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를 더는 바라지 않게 된다.
”
‘미친 여자’에게도 맥락이 있다.
‘광기’라는 낙인 뒤에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회문화적 구조가 존재한다.
문학의 역할 중 하나는 그 구조를 폭로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에게도 그랬다.
‘나’를 취약하게 만드는 우울과 불안, 상실과 소외는 문학을 통과하는 동안 삶의 ‘자원’으로 돌아온다.
책의 부제는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이다.
정신병원에서 보낸 3년간 “정신과 환자로 지내는 데 점점 능숙해”진 저자는 진단명으로 축소되기에 저항한다.
동시에 증상 위에 이야기를 긴밀히 겹쳐 보면서 자신의 광기를 살핀다.
엉망진창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난 이야기들이야말로 생이 품고 있는 어떤 ‘진실’에 가장 가까운 건 아닐까. “자아와 텍스트 사이 흐릿해지는 경계” 위에 삶을 구축하고, 몇 번이고 일으키며 저자가 발굴해나가는 ‘의미들’이 독자에게도 격려가 된다.
가난을 혐오해오던 저자가 ‘가난을 토해낸’ 결과 [새로 나온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