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전진하는 페미니즘』낸시 프레이저 지음
지난 6월 2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인근 이마빌딩 1층에서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출근에 앞서 연 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을 들으며 미소를 짓고 있다.
이날 강 후보자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들로 인해서 차별 또는 역차별을 받지 않고 입체적으로 경도되지 않은 시선으로 살피겠다"고 했다.
ⓒ손상민 사진기자
이재명 정권 한 달째다.
123일 간 이어졌던 윤석열 퇴진 광장의 열망을 이어받아 출범한 정부다.
나 또한 광장 참여자이자 페미니스트로써 이재명 정부의 행보와 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지명된 김민석 후보자는 과거 차별금지법 반대 의사를 밝힌 바 있음에도 이틀간 열린 청문회 내내 관련 질문 하나 받지 않았다.
여성가족부는 대통령 공약대로 성평등가족부로의 확대 개편을 앞두고 있다.
여가부 장관 후보자로는 가족학 전공자인 강선우 민주당 의원이 지명됐다.
성평등 정책은 상대적으로 지지부진한 한편 가족 기능만 강화됐던 민주당 정권하 여가부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을지 걱정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전 정부에서는 폐지 위기에까지 몰렸던 여가부이기에, 새 정부가 말하는 '성평등 추진체계 강화'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언급한 '역차별'과 '소수성 할당제' 등에 담긴 시각은 우려스럽다.
강 후보자 또한 지명 소감에서 차별과 함께 나란히 역차별을 언급하며 이를 살피겠다는 뜻을 밝혔다.
"구조적 성차별이 있다"는 데에는 꾸준히 동의했지만, 공무원 시험 등에서 여성 합격률이 훨씬 높다며 남성을 위한 할당제가 필요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해온 이 대통령의 시각과 일맥상통한다.
'역차별'이 결국은 구조적 성차별이라는 현실을 간과하고, 숲이 아닌 나무만 본 데서 비롯된 담론임을 감안하면 이러한 인식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공무원 시험 합격자의 여초 현상은, 시험이 특별히 여성들에게 유리해서 빚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공저로 쓴 책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에서 '여자 하기 좋은 직업'이라고 일컬어지는 직업의 공통점으로 성별에 따른 차별이 비교적 덜한 직종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직업 시장에서 채용 성차별이나 승진에의 유리천장, 성별 임금격차 등을 겪는 여성들은 그나마도 민간 영역보다는 성차별이 덜한 공공 부문을 더 나은 일자리로 여긴다.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는 민간 사업장이 존재하는 현실 속, 여성 공무원들은 절반 이상이 육아 휴직을 사용하고 있다.
공직은 그나마도 여자라는 성별이 페널티로 덜 작용하는 직장이라는 '숲'을 감안하면, 공무원 시험에 여성 인재가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역차별'의 산물이 아니다.
『전진하는 페미니즘』낸시 프레이저 지음 ⓒ돌베개
탄핵 광장 이후의 전진을 고민하다 만난 책이 『전진하는 페미니즘』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쓴 책은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어 서구 전체로 퍼진 제2물결 페미니즘을 톺아보며 대안을 제시한다.
프레이저는 제2물결 페미니즘의 역사를 3막짜리 연극에 비유한다.
1막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뿌리 깊은 남성중심주의를 폭로하고, 가사노동·재생산과 관련한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며 '경제적 분배'를 강조한다.
2막에서는 오늘날 소셜 미디어 상에서 보이는 움직임처럼 차이에 따른 인정을 도모하는 일종의 정체성 정치, '문화 정치'로 방향을 선회했다.
프레이저는 3막에서 1막의 '경제적 관심'과 2막에서의 '문화적 통찰'을 통합하는 정치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젠더는 경제적 계급의 문제임을 일깨우며, 문화적으로 젠더를 재정의하는 과정 전반에 '참여동수'라는 정치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참여동수는 젠더를 넘어서 인종과 섹슈얼리티, 종교와 국적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프레이저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머리로는 알 것도 같다.
그러나 그마저도 현실의 '어떻게'에 부닥친다.
내가 요즘 강연 자리에서 흔히 듣는 질문도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뭘까요?"다.
123일 간 광장에서 열심히 부르짖은 끝에 내란 수괴는 파면됐고, 새로운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됐지만 광장의 외침은 사라졌으며, 광장을 달구었던 2030 여성의 존재도 지워졌다는 고민에 봉착한 이들이 주로 하는 질문이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경제적 분배와 정체성 정치를 포괄하는 정치적 개입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이 가능하냔 말이다.
지난해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나의 제안은 일상에서의 광장 만들기다.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집회만이 광장은 아니다.
집회 밖에서도, 서로 정치적 의사 표현을 나누고 정치적 행동을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이면 광장이 될 수 있다.
온라인보다는 서로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마주하는 오프라인 모임으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천착한 독서, 페미니즘, 비거니즘 모임을 추천한다.
이미 아는 친구들과의 모임보다는,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있을수록 더 좋다.
이를 통해 나와 다른 타인의 의견에 수긍하고 공박하며 타협을 이어가는 일상의 정치를 통해, 개인의 삶과 동네의 모습을 바꿔 나갈 전략을 수립하는 장을 만들 수 있다.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제 내가 만난 청년 여성들 가운데는 탄핵 광장을 계기로 민주일반노조 산하 '누구나지회'에 가입하거나, 지역 여성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 동네 노동자 이슈에 연대하고, 일상에서의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동네 책방과 도서관 등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모임들이 있다.
그리하여 광장은 계속된다.
탄핵 광장에서 터져 나왔던 사회대개혁에의 요구와 내년 지방선거, 새 정부의 성평등 정책 방향 등을 예의주시하는 크고 작은 광장들에 의해. 일희일비하지 말고 꾸준히 전진하는 페미니스트가 되자는 다짐에서, 나도 적극적으로 일상의 광장을 도모할 참이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슬기의 무기가 되는 글들] 광장은 닫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