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연 판결 사흘 만에 기자단에만 비실명본 제공…노상원 등 ‘알파벳’ 처리
“윤석열 내란죄 사건 판결문에 대한 기계적 비실명화는 위헌” 지적도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전직 대통령 윤석열 내란우두머리 사건에 유죄 판결을 내린 지 사흘 만에 익명화한 판결문을 법조기자단에 제공했다. 재판부가 12·3 내란의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 판결문을 국민에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는 지난 19일 윤석열 등 내란우두머리 혐의 사건 선고에서 '자세한 내용은 판결문에 기술했다'고 여덟 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정작 판결문은 '비실명화' 작업을 거친 뒤 22일 오후가 되어서야 법조출입기자단에 한해 파일 형태로 제공됐다.
법원, 법조기자단 소속 매체에만 익명화한 판결문 파일 제공
언론제공용 판결문 파일엔 '윤석열'과 '김용현'을 제외하고 노상원·김용군·조지호·김봉식·윤승영·목현태 등 모든 피고인과 관련자들이 익명 처리됐다. 중앙지법은 기자단 소속이 아닌 언론사가 판결문을 요청할 경우 평일 중에 파일이 아닌 종이 출력본으로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법원이 비실명화 작업을 이유로 공식 배포를 미루는 사이 일부 언론사는 지난 20일부터 판결문을 입수했다며 경쟁적으로 '단독' 보도를 했다. 언론사 기사마다 판결문 분량도 1234쪽, 1130쪽, 1252쪽 등 제각각이었다. 비공식 경로로 입수된 판결문이 법조계와 언론계에 알음알음 공유되며 일부 내용만 보도된 셈이다.
이 같은 법원의 내란 판결문 비공개와 비실명화 처리를 두고 비판이 나온다.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파괴한 중대 사건 판결문을 국민이 볼 수 있도록 공개하지 않고, 언론 공개본마저 '암호화'에 가깝도록 익명화했다는 지적이다.
윤석열 탄핵심판 사건 국회대리인단으로 실무를 이끌었던 김진한 변호사는 지난 21일 통화에서 "(내란 사건은) 역사에 기록돼야 할 사건이다. 판결문은 그 자체로 중요한 역사적 사료가 되며, 관련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남아 역사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며 "국민 알권리 측면에서도 공개해야 할 뿐더러, 내란사건은 (피고인 등 관련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조금도 개입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할 판결을 법원이 비실명화한다는 조치는 자신들이 한 재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라며 "내란사태에 연루된 자를 모두 비실명화하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워 사실상 암호화하고 비공개하는 것과 같다. 재판부가 이 같은 방식으로 심판받는 사람들을 감춰주는 것은 이 재판의 역사적 의미를 없애버림으로써 또 한 번의 실수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지법 방침과 대조적으로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결정문을 공개했다. 누구든 헌법재판소 웹사이트에서 피청구인 윤석열과 증인을 비롯한 모든 관계자 이름을 실명으로 밝힌 결정문을 열람할 수 있다.
"역사적 책임 있는 사건에 어둠의 경로로 기자·유튜버 논평 봐야 하나"
판사 출신인 차성안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이번 사건 판결문을 모든 국민이 볼 수 있게 공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차 교수는 22일 통화에서 "미국은 판결문은 물론 소송기록까지 폭넓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미확정 사건의 형사 판결문에 대해 일반 국민이 열람·등사할 수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최근 미확정 형사 사건의 (비실명) 판결문도 열람 또는 등사할 수 있도록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통과됐지만, 2년의 유예기간이 설정돼 있어 당장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법원이 헌법상 알 권리 차원에서 법률과 관련 규정에 반해 미확정 형사 판결문도 기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제공해 왔지만, 국민 전체에 대한 공개나 사생활의 비밀보다 국민의 알권리가 중요한 사건 유형의 실명본 판결 제공은 나몰라라 했다"고 비판했다.
차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에 남긴 글에서도 "국민들은 윤석열 내란죄 판결문 파일을 실명으로 읽고 토론하고 논할 자유가 있다"며 "윤석열 내란죄 사건 판결문과 같이 국민의 알 권리,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 측면에서 역사적 책임을 질 이들의 실명이 담겨야 하는 사건에는 실명을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원이 판결문을 공식 배포하기 전 일부 언론이 판결문을 입수해 보도한 상황을 두고 "실명 판결문을 어둠의 경로로 구한 기자들과 그 기자와 친분이 있는 유튜버의 간접적 논평에만 의지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해야 한다. 이게 무슨 해괴한 상황인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차 교수는 이어 "지귀연 재판부이든,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장이든, 법원행정처장이든, 그 공개의 책임을 지는 자에 의한 윤석열 내란죄 사건 판결문에 대한 기계적 비실명화는 위헌적 행위"라며 "수천, 수만의 국민들이 지귀연 재판부에 윤석열 내란죄 전체 실명본 판결문 즉시 교부 신청을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내란사건 판결문 실명본을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한 입장은 주중 답변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