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와 재일조선인 여성(하) 권력을 담는 용기를 깨부순 신체화된 저항재일조선인들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던 막걸리(탁주)는 이전 일본의 주세법 하에서 적발 대상이었다. 막걸리를 둘러싼 재일조선인 여성들의 생활과 저항의 역사를 식민지주의, 젠더 관점에서 풀어내는 도쿄경제대학 이행리(李杏理) 교수의 글을 3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좌파 남성들이 간과한 것, 생존을 건 여성들의 저항 ‘탁주 전쟁’(1940~1950년대 일본 조선인 집단 주거지역에서 주로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막걸리를 만들며 세무사찰의 적발에 맞선 역사)을 어떻게 정의 내릴까. 전쟁 중부터 전쟁 후까지 재일조선인, 특히 여성들이 생활을 위해 탁주, 즉 막걸리를 만들며 일본 세무서와 경찰의 적발과 싸우고, 식민지주의와 젠더 질서 양쪽을 교란시킨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들이 중심이 된 것은 탁주 제조가 가내노동으로 여성에게 맡겨져, 생활고를 가장 절박하게 떠맡을 수밖에 없어, 그 신체와 일상이 식민지 지배와 젠더 역할의 교차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후, 일본의 사회운동 진영과 좌파 정당은 탁주를 ‘밀조’로 간주, 조선인 여성을 공적인 노동 주체로 보지 않았다. 일본공산당은 ‘독선적 밀조’를 멈추고 노동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고, 조선인 남성 활동가 중 일부도 ‘해방민족의 체면’을 위해 암거래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이자 활동가 출신인 김달수(1920~1997)가 훗날 “그것은 나의 로맨티시즘이었다.”라고 고백했듯, 공적인 정치이념을 우선시하는 입장은 현실 생활로부터 괴리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인 조직과 좌파 정당의 주체는 남성이었으며, ‘정치=공적 영역을 맡는 남성, 생활=사적 영역을 맡는 여성’이라는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공사 분리 자체가 근대 가부장제뿐 아니라 식민지 지배에 의해 제도화된 젠더 질서였다. 여성 활동가인 이순자는 1953년, 〈해방신문〉에서 “술에 취해 큰 소리를 내고,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바깥에 나가서는 혁명은 남자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집에서는 이불조차 개지 않는, 배우자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남성들”을 비판했다. 간과되었던 것은 탁주 단속을 당한 여성들의 저항이 단순한 가계 보전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들은 저항은 지배 관계를 뒤흔드는 행위의 수행이었다.
아이치현이나 시즈오카현에서의 항의행동에서는 아이를 업은 여성들이 ‘엄중하게 단속하기 어려운’ 처지를 역이용, 창구에 몰려가 “(당신들은) 쌀 한 톨도 암거래 안 하나?”고 되받아치며, “우리를 죽이는 것이나 매일반”이라며 몰아부쳤다. 제국의 권력과 젠더 질서 양쪽을 흔든, 탁주 투쟁 제3세계여성(구 식민지·점령지, 글로벌 사우스의 여성들)은 남녀 공사 구별의 기초가 되는 경제적 혜택(남성 생계부양자가 있는 경우를 뜻함)을 입지 않았다. 이들은 공적·정치적인 압력이 사적 영역을 침식하는 현실 속에서, 생존을 건 투쟁을 떠맡아왔다. 생존권과 주거권에서의 배제는 가족과 개인 생활을 붕괴시켰고, 경찰과 사법에 의해 집중적으로 체포와 수감, 송환되었다. 목숨을 건 상황에서 해방 후의 조선인 여성에게는 스스로 만들어 지키지 않는 한, 사적 영역 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탁주 투쟁이란, 제국 권력과의 대치임과 동시에 남성중심적인 사회운동이 돌봄과 생활을 정치 바깥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공사 분리’라는 프레임 그 자체에 대한 교란이었다. 그녀들의 실천은 ‘정사’(正史)에도 운동사에도 충분히 기록되지 못했다. 하지만, 적발 현장에서 술독을 깨부수는 행위에는 식민지주의와 젠더 질서라는 권력이 담긴 용기 그 자체를 깨부수는 신체화된 저항이 깃들어 있었다. [끝] -번역: 고주영, 감수: 이행리. 〈일다〉와 제휴 관계인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 기사를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