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탈 아케르만의 『브뤼셀의 한 가족』을 덮으며

“만약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그녀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모든 것에 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 데 능한데, 적어도 그러려고 애쓰고, 애쓰는 건 정말이지 피곤한 일이다. 그 바람에 그녀는 항상 아주 피곤하다.”(샹탈 아케르만, 『브뤼셀의 한 가족』 p.14)
 
 
상탈 아케르만(Chantal Akerman)의 『브뤼셀의 한 가족』은 잠이 잘 오지 않을 때 가끔 꺼내보는 책 중 하나다. 고독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신경 쓰는 딸의 고독한 시선에 이입하다 보면 점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다가 졸음이 쏟아지곤 했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문단이 나눠지지 않는 긴 호흡과 만연체의 문장, 이렇다고 할 특별한 사건 없이 생각과 생각으로 이어지는 긴 독백의 소설은 졸음이 쏟아지기 딱 좋다.
 
하지만 졸음이 쏟아지는 책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거나 무료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교통으로 이동 중에 혹은 낯선 여행지에도 나는 이 책을 소중히 챙겨가곤 했다. 소음이 거의 없는 적막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물론 ‘나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상념 또한 여행지에서 가장 멀리 나아가곤 했다. 여자와 여자, 어머니와 딸, 살아가는 자와 죽어가는 자, 기억과 기억,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부유하는 시선. 그것은 관음증적 시선이라기보다는 언제나 타자일 수밖에 없는 ‘보이는 자’를 향한 배려이자, 간격 속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묘한 안내였다.
 
하지만 나는 늘 이 소설이 무언가를 여전히 말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그것을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는 일이 더 피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글은 『브뤼셀의 한 가족』에 관한 글이지만, 『브뤼셀의 한 가족』을 읽는 일의 난처함, 그로 인해 점점 더 커지는 피로함에 관한 글이기도 하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지만 
 
“그리고 나는 다시 브뤼셀의 거의 텅 빈 넓은 아파트를 바라본다. 통상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 한 명만 있는 그곳을.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여자.”(p.11)
 
첫 페이지의 첫 문장임에도 ‘그리고’로 시작하는 이 목소리는 브뤼셀의 아파트에 혼자 사는 여자를 관찰하는 일이 ‘나’에게 특별한 사건이 아님을 드러낸다. ‘나’는 ‘통상 가운을 입고’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여자’를 늘 바라보곤 했으며, ‘다시’ 바라볼 뿐이다. ‘나’는 그녀의 ‘메닐몽탕에 사는 둘째 딸’로 추측되는데 ‘나’의 시선은 타지에서도 어머니를 향해 있지만,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 밖 어딘가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있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뿐이다. 어머니인 ‘그녀’는 종종 가족들과 통화를 하고 가끔 가족 모임에 가며 곧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남편이 죽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그리고 그 너머에 늘 존재해 왔던 어떤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다른 생각-가족의 근황과 남편과의 추억-을 멈추지 않는다.
 
소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생각들로 채워져 있고, 독자는 문장이 다음 문장을 밀어내는 힘에 떠밀려 다음 페이지로 그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이처럼 한쪽에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어머니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녀의 딸이 멀리서 거리둔 채 ‘보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 소설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에서 출발하지만, 모든 방향과 각도에서 제한 없이 어머니의 일상을 관찰하고 있으며 주로 어머니의 내면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로 어머니 그 자신의 시선이기도 한다. 이때 어머니와 딸을 교차시키는 하나의 사건은 남편이자 아버지의 죽음이다. 남편이, 아버지가 얼마 전에 죽었기에 슬픔에 빠진, 하지만 살아가는 여성‘들’. 그녀들은 그와의 시간을 현재처럼 읊조리고 그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받아 적는다.

 
“다행히도 전화벨이 울렸는데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애들이 있는 딸이 아니고 애가 없는 딸이었는데 전화를 받으니 과연 그 애였고 그 애는 당연히 내게 어떤지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답했는데 그 애는 엄마 목소리를 보니 안 괜찮은 것 같은데라고 했고 나는 그러면 내가 뭐라 할까라고 되물었고 그 애는 모르지라고 답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이 얘기 저 얘기를 했고 마지막에 그 애는 아버지를 바꿔 달라고 했는데 나는 그이에게 무선전화를 가져다주면서 당신 딸이야라고 했다.”(p.41)
 
자전적 소설이라고 명시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 아케르만과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부유하면서도 결코 대상에 밀착하지 않는 작가의 시선은 그녀의 영화 전반에 나타난다. 〈집에서 온 소식〉(News from Home, 1977)에서도 어머니에게서 온 편지는 현재 아케르만이 사는 뉴욕의 도시 소음 속에서 줄곧 묻힌다. 그녀는 어머니가 보내는 목소리를 듣지만, 그 목소리를 향해 다가가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편지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시선이 자신을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
 
노년의 병든 어머니를 찍었던 아케르만의 마지막 작품 〈노 홈 무비〉(No Home Movie, 2015)에서도 이러한 거리감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영화에서 아케르만은 브뤼셀의 아파트에서만 지내는 어머니를 찍는다. 하지만 촬영 대상인 어머니와의 거리를 의식적으로 유지하며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영화에서 아케르만은 카메라 뒤에 서 있기도 하고, 카메라 뒤에서 프레임 안의 어머니와 대화하기도 하고, 어머니를 향해 카메라를 설치해 둔 채 어딘가로 사라지기도 하고, 고정된 프레임 속으로 자신이 들어오기도 한다. 때로는 카메라를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이나 창가에 비치기도 하고, 스카이프로 자신과 대화하는 어머니를 (카메라를 든 채) 바라보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아케르만의 어머니는 거실에서 창 밖을 내다보는 뒷모습으로, 부엌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뒷모습으로, 문틈 사이로 보이다가 사라지는 옆모습으로, 스카이프로 딸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스카이프로 통화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어머니의 모습이 전면에 클로즈업되어 나타나는 장면이지만,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할 때도 둘 사이에는 여전히 스크린이 존재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쯤에서 어머니는 아케르만에게 “이제 너와 내가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도 아케르만은 카메라를 들고 있다. 영화를 개봉하기 직전 아케르만의 어머니는 죽었고, 이 영화는 또한 아케르만의 유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노 홈 무비〉에 대한 수많은 각주 중 하나이다.
 
어머니, 딸, 그녀
 
『브뤼셀의 한 가족』은 영화감독 샹탈 아케르만의 첫 소설이며, 벨기에 브뤼셀에 사는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케르만이 벨기에 브뤼셀 출신이며, 그녀의 부모가 2차대전 발발 직전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이라는 사실, 그녀의 어머니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라는 사실은 아케르만의 책과 소설 전반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케르만의 외조부모는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했으며,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 딸에게 침묵했지만 아케르만은 자기 삶과 작업 세계 전반에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기억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외할머니는 1905년생이고, 증조할머니는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어요. 외할머니는 당신이 꿈꿨던 삶을 살지 못했고, 그건 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에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죠. 약간 폭력적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지금 잘 모르겠어요. 내가 이 모든 것의 수탁자라는 걸까요? 분명 그렇겠죠, 이것과 또 다른 것들의 수탁자.”(책 속에 삽입된 ‘파자마 인터뷰’ 중 p.96)
 
‘이것과 또 다른 것들의 수탁자’로서 아케르만의 소설은 그런 점에서 단순히 자전적 가족 이야기, 모녀 관계, 죽음과 애도에 관한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머니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속에는 남편의 죽음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형성된 어떤 거대한 죽음의 기억이 자리한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 생각과 거리두기, 그렇게 생각을 생각으로 밀어내며 살아가는 한 인물을 기록하기. 이것이 아케르만이 어머니를 통해 남기고자 했던 역사의 상흔이자,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말하지 않은 것은 이게 다일까. 생각하지 않으려 밀어내는 것은 아우슈비츠의 기억, 유대인의 역사, 전쟁의 기억, 죽음의 트라우마라고 얘기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나는 여전히 『브뤼셀의 한 가족』을 읽으며 어떤 무거운 피로함을 느끼는 것일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
 
“사실 언제나 ‘창작자’를 모르는 편이 낫죠. 누군가 내게 당신의 작품이 좋아서 당신을 알고 싶다고 하면, 난 항상 모르는 편이 낫다고 답해요. 당신이 실망할 거라고요.”(p.117)
 
작년에 실험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벨기에의 영상 작업 〈폭풍우(샹탈 아케르만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Vents Violents (Two Letters to Chantal Akerman), 시라 포이겔 브루트만, 에이탄 에프랫, 2024)에서 두 감독은 아케르만의 영화 〈노 홈 무비〉 촬영지였던 이스라엘 남부에 있는 식민지화된 팔레스타인의 알-나캅 사막을 방문한다. 〈노 홈 무비〉에 잠시 등장했던 황량한 사막의 풍경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폭풍우〉를 보고 나서야 그곳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추방된 땅인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지역이지만 다르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그곳에 존재한다.
 
황량한 사막을 바라보며 아케르만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노 홈 무비〉는 말하지 않는다. 〈노 홈 무비〉에 등장했던 사막의 장면은 고향도, 집도, 이스라엘도 의미하지 않는 그저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는 풍경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아케르만에게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고향이었을지, 트라우마와 접촉하는 경계 지대였을지, 그저 미지의 공간이었을지 알 수 없다. 아케르만의 작업에서 이스라엘에 관한 태도, 팔레스타인에 관한 태도를 찾아내기엔 그녀가 남긴 말들이 부족하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라는 그 감각, 부재하다는 감각이 우리에게 어딘가 불편함을 남긴다는 사실, 그것을 무시하는 일에서 이제 피로함을 느낀다는 사실, 다시 읽고 다시 보고 새롭게 말하려는 힘을 우리가 멈출 수 없다는 사실에 집중해 보자.
 
어쩌면 아케르만이 말하지 않은 것은 아케르만이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소설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는 ‘피곤함’이라는 반복되는 단어 뒤에 존재했을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상상하며, 나는 아케르만의 〈집에서 온 소식〉을 보며 방랑하는 이민자의 감각에 대해 배웠고, 〈노 홈 무비〉와 〈호텔 몬터레이〉를 보며 공간을 잠식하는 고독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브뤼셀의 한 가족』을 읽으며 가족 안에 가라앉은 트라우마의 기억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마음과 몸을 잠식하는지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다’라고 적었지만 결코 나는 아케르만이 느낀 것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절대 모를 것이라는 감각 또한 그녀의 작업 속에서 배웠다.
 
그렇기에 나는 아케르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녀의 그림자에 가려진 또다른 그림자를 찾아내고 싶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그게 다가 아니다”(p.19)라는 아케르만의 말대로, 말 속에 남겨진 말해지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그게 다가 아니라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멈추지 않고 말했던 아케르만의 목소리를, 우리는 이렇게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소개] 전솔비. 시각문화 연구자. 독립기획자. 정체성과 수행성의 문제를 연구하며 전시와 책을 만들어왔다. 동시대 현장에서 생산되는 이미지의 정치성과 예술적 실천을 탐구하며 예술가, 연구자, 활동가 동료들과 여러 협업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