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서울고등법원은 후기 임신중지 사건으로 살인 혐의를 받았던 권○○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임신중지를 이유로 살인죄를 우회 적용한 1심 판단을 뒤집고, 살인의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번 사건은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7년째 이어지는 입법 공백과 안전한 임신중지 의료체계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재생산권 운동가들은 항소심 무죄 판결을 환영하는 한편, “보건복지부가 유죄다!”라고 외치며 국가가 유산유도제 도입, 임신중지 정보 제공, 의료가이드라인 제시 등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후기 임신중지 여성 살인죄 적용 사건’의 전말
이번 사건은 2024년 6월 임신 34~36주였던 20대 여성 권씨가 인천의 한 산부인과에서 임신중지 시술을 받은 뒤, 당시 과정과 심경을 담은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이후 보건복지부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검찰은 권씨와 의료진, 병원장, 브로커 등을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낙태죄’는 사라졌지만, 제왕절개 등으로 태아를 모체 밖으로 살아있는 상태로 분만한 뒤 숨지게 하면 살인죄가 성립될 수 있다. 재판의 쟁점은 권씨가 ‘태아를 사산시키는 임신중지’로 알았는지, 아니면 ‘살아 태어난 아기를 의료진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는지였다.
권씨 측은 임신중지에 관한 상담이나 의료체계가 부재한 현실에서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 임신 후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브로커를 통해 고액의 현금을 지불하고 병원을 소개받아 임신중지 시술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브로커로부터 태아가 “사산된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2026년 3월 4일, 1심 재판부는 권씨가 시술 당시 태아의 사산 조치 여부나 생존 여부를 의료진에게 확인하지 않았고 사체처리 동의서에 서명한 점 등을 근거로 권씨에게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또 병원장에게 징역 6년과 벌금 150만원, 집도의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국가의 책임방기를 개인이 감당하게 해선 안 돼
하지만 7월 2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는 권씨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짚으면서, 살인에 공모할만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할지를 결정하는 ‘자기결정권’을 인정하고, 권씨의 임신종결 의사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점을 감안해 병원장은 징역 6년에서 징역 4년 및 벌금 150만 원으로, 집도의는 징역 4년에서 징역 2년 6개월로 각각 감형했다.
항소심 판결 직후, 모두의안전한임신중지를위한권리보장네트워크는 기자회견을 열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임신중지에 관한 권리는 그 자체로서 보장되어야 하며, 다른 형사 처벌 조항이 무리하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법리로서 명확하게 확인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무엇보다 기자회견에서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7년이나 후속 입법을 하지 않으며 ‘방치’하고 있는 정부와 국회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권씨의 변호를 맡았던 김명선 변호사는 “이 사건이 산모 권 모씨의 개인적인 형사 처벌을 무죄로 바꿨다는 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계속되는 입법 공백 속에서 의료계와 산모들, 일반인들이 얼마나 큰 혼란에 빠져서 이와 같은 비극을 낳게 됐는지, 여기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의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을 통해, 유산유도제 도입이 미뤄지고 의료 가이드라인조차 마련되지 않은 가운데 음성화된 시장에서 브로커를 통해 임산부가 고액의 현금을 지불하고 사후 관리도 받지 못하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주희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널싱페미 활동가는 “권 모씨에겐 명확한 의료 가이드라인도, 충분한 상담 체계도, 안전한 약물도 마련되지 않았다”며, “(제도) 공백 속에서 환자는 안전한 의료체계 밖으로 밀려났고, 그 결과마저 개인이 책임져야 했다.”고 말했다.
의료인과 의료현장 또한 방치되어 온 것은 마찬가지다. 나영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셰어SHARE 대표는 “해외에서 다른 의료적 가이드가 계속해서 진전되어 오는 동안, (한국은) 어떠한 의료인도 그에 관한 최신 의료지식을 교육받지 못했다.”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