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4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소각을 결정하자 월가의 시선이 매입 ‘타이밍’에 쏠렸다. 한 달 전 지금보다 높은 가격에 주식을 발행한 뒤 주가가 내려오자 다시 사들이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기업들의 과거 행보와 대조적”이라고 평가했다.
“비쌀 때 팔고 쌀 때 사들인다”…SK하이닉스 행보 주목

지난 20일(현지시간) WSJ은 SK하이닉스가 한국 증시 사상 최대 규모인 약 40조원의 자사주 매입·소각 계획을 내놓은 데 주목했다. SK하이닉스는 보통주 2407만주를 장내에서 취득한 뒤 전량 소각할 예정으로, 취득 예정 금액은 40조43억4000만원이다.
WSJ는 이번 결정을 처음에는 ‘의아한 일(head-scratcher)’이라고 표현했다. 최근 조정을 받았지만 SK하이닉스 주가가 여전히 1년 전보다 약 470% 오른 상황에서 대규모 자사주 매입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WSJ가 눈여겨본 대목은 매입 시점이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미국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미국주식예탁증서(ADR)를 발행해 26억달러 이상을 조달했다. 당시 주식을 판 가격은 현재보다 약 50% 높았다.
한 달 전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확보한 뒤 주가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자사주를 사들이게 된 셈이다. WSJ는 이 같은 선택이 결과적으로 높은 가격에 팔고 낮아진 가격에 다시 사들이는 투자 원칙에 부합한다는 점을 짚었다. 얼핏 이례적으로 보이는 4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이 가격 측면에서는 오히려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취지다.
자사주 매입에서는 결국 가격이 중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WSJ는 워런 버핏이 모든 자사주 매입을 주주에게 해로운 행위로 보는 시각을 비판했던 발언을 소개했다. 동시에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최근 거의 2년간 자사주 매입을 중단하고 막대한 현금을 쌓아둔 사례도 들었다.
“미국 기업들은 거꾸로”…닷컴버블·금융위기 때 고점 매입

WSJ는 SK하이닉스와 비교해 미국 기업들이 과거 주가가 높을 때 자사주 매입을 늘리고, 오히려 가격이 떨어지면 매입을 줄이는 모습을 반복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닷컴버블이다. 당시 증시가 정점에 달했던 분기에 S&P500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액은 사상 최대 규모로 불어났다. 하지만 S&P500 시가총액 대비 자사주 매입액을 나타내는 실질 자사주 매입 수익률은 1.2%에 그쳤다.
3년 뒤에는 상황이 뒤집혔다. 주가가 낮아졌는데도 자사주 매입 규모는 약 40% 줄었다. 반면 실질 자사주 매입 수익률은 오히려 3분의 1가량 높아졌다. 더 낮은 가격에 자사주를 확보할 수 있는 시점이 됐지만 기업들의 매입은 오히려 위축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해서도 비슷했다. 증시가 고점에 있던 2007년 미국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당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주가가 크게 떨어진 2009년 봄에는 자사주 매입 규모가 85% 급감했다.
WSJ는 기업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경영진조차 주가가 오를 때 자사주 매입에 적극적이었다가 저평가 국면에서는 소극적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짚었다. 이와 달리 SK하이닉스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주식을 발행한 뒤 가격이 낮아진 시점에 대규모 매입에 나섰다는 평가다.
월가도 대체로 호평…“주가 하방 지지할 것”

글로벌 투자은행(IB)들도 SK하이닉스의 이번 결정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바클레이즈는 SK하이닉스가 올해 예상 주가수익비율(PER) 3.8배 수준으로 저평가돼 있다며 ADR 목표주가 300달러와 ‘비중 확대’ 의견을 유지했다. 노무라 역시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의 지배력과 인공지능(AI) 수요에 따른 이익 성장을 근거로 긍정적인 시각을 이어갔다.
씨티그룹의 피터 리 애널리스트는 이번 자사주 매입이 단기적으로 주가의 의미 있는 바닥 역할을 하면서 하방을 지지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CLSA의 산지브 라나 애널리스트도 40조원 규모가 투자자들의 기대에 부합한다며 향후 추가 자사주 매입이나 특별배당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JP모건은 최근 8개월간 SK하이닉스가 이번 2407만주를 포함해 총 3940만주의 자사주 소각을 약속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메모리 업체 가운데서도 공격적인 수준의 주주환원이라는 평가다.
시장에서는 이번 조치가 단순한 주가 방어를 넘어 SK하이닉스의 현금 창출력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3년간 누적 FCF의 ‘50% 이상’을 환원하기로 한 만큼 반도체 호황이 이어질 경우 추가적인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으로 이어질 여지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