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변했는데...과거 ‘모범 답안’ 맹신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로 상징되던 한국 경제 역동성(Econo mic Dynamism)이 갈수록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우려가 들끓는다.
경제·산업 역동성은 혁신 활동이 활발해 경제 구조가 고착되지 않고 자원 배분이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재편되는 정도를 뜻한다. 역동성 저하는 과거 경제 구조 경로 의존성 심화를 초래하고 종국에는 성장률 둔화로 이어진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근 한국 경제가 반도체 초호황에도 불구하고 성장률이 1%대에 머문 것도 산업 역동성 저하의 결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역동성이 뛰어난 경제라면 핵심 산업 호황이 투자 확대와 신규 기업 진입, 고용 증가로 이어져 다른 산업과 내수로 번진다.
이번 반도체 호황은 다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표 기업 이익은 천문학적으로 늘었지만, 확산 효과가 미미하다는 우려 섞인 시각이 적지 않다. 혁신과 교체가 활발한 슘페터식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작동하지 못한 채 부문별 양극화를 뜻하는 ‘K자형’ 성장 고착화를 우려하는 시선이 팽배하다.
경제 역동성 저하 뚜렷
2010년대 이후 ‘뚝뚝’
경제 역동성 저하 징후는 도처에서 목격된다. 학계와 산업계에 따르면, 경제 역동성은 부문별 여러 지표로 측정된다.
거시 요인으로는 총요소생산성(TFP ·Total Factor Productivity), 산업 구조 변화 속도(Lilien Indicater) 등이, 미시 요인으로는 기업 진입·퇴출 비율 추이가 역동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널리 인용된다.
첫째, 총요소생산성 둔화다. 잠재성장률은 노동과 자본 투입으로 설명된다. 노동과 자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잔여 성장분이 총요소생산성이다. 여기엔 조직 효율, 제도적 환경, 혁신 전환·흡수력 등이 포함되며 일반적으로 기술 진보로 해석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의 총요소생산성은 대체로 3% 안팎 증가율을 유지해왔으나 2011년부터 1% 정도로 추락했다.
전문가들은 총요소생산성은 기술 혁신 그 자체보다는 조직·제도·노동 시장의 혁신 흡수 능력에 좌우된다고 본다. 한국이 지난 수십년간 IT 기술 고도화에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었음에도 총요소생산성이 추락한 것은 구조 개혁 지체로 경제 역동성이 둔화, 영역 간 혁신 확산에 제동이 걸린 결과로 분석된다.
둘째, 산업 구조 변화 속도를 보여주는 지표(Lilien 지표)로 측정된 산업 역동성이다. 산업 구조 변화 속도가 높을수록 산업 역동성도 높은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업 역동성은 OECD 국가들에 비해 하락세가 가파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연구원은 한국을 포함한 OECD 국가들에 대해 산업 역동성을 연도별로 측정한 뒤 5년 기간 평균값을 상호 비교했다.
1998~2003년에는 비교대상 31개국 가운데 10위였던 우리나라 산업 역동성이 2000년대 들어 급락한 것으로 분석됐다. 2014~2018년 산업 역동성은 비교대상 33개국 가운데 30위로 최하위 수준이었다. 2009~2013년에도 비교대상 32개국 중 29위였다. 2004~2008년에도 비교대상 31개국 가운데 29위로 최하위 수준으로 평가됐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산업 구조가 성숙해질수록 역동성이 하락하는 것은 일반적 추세”라면서도 “우리나라처럼 급속히 산업 역동성이 저하되는 경우는 보편적이지 않고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기업 진입·퇴출 비율 추이를 봐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에 따르면, 새로 생겨난 기업 비율을 뜻하는 ‘신생률’과 사라진 기업을 의미하는 ‘소멸률’ 모두 하락세가 뚜렷했다. 국내 전 산업 신생률은 2007년 17.9%에서 2019년 15.3%로 줄었다. 소멸률도 2007년 13%에서 2018년 11.1%로 낮아졌다. 특히 제조업 중에서도 고위기술(전자·컴퓨터·통신, 전기장비, 의료·정밀기기 등) 제조업 신생률이 2011년 11.9%에서 2019년 7.7%까지 줄었다.
김천구 대한상의 SGI 연구위원은 “신생률과 소멸률은 산업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지표인데 모두 하락한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산업의 성장 잠재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의미”라며 ▲성장 잠재력 약화 ▲일자리 창출 능력 저하 ▲사회 갈등 심화 등을 우려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1) 집단주의 경영 그늘
한국 경제 역동성 저하 원인에 관해서는 여러 분석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한국 대기업 특유의 집단경영 체제가 자원 배분 비효율을 초래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그룹 단위 집단경영 체제 아래 수익성 높은 계열사 이익이 부실 계열사 지원이나 승계 작업에 유리한 사업부로 몰리는 등 자원 배분 비효율이 초래됐다는 지적이다.
현재 대기업집단은 예측경영이 가능하던 시절 집단경영 체제를 기반으로 범용 제품에 특화한 중앙집중적 생산 구조를 갖췄다. 수년 전부터 범용 제품에 특화한 기존 성장 공식은 금이 갔다. 반도체 산업에서 미세공정·수율은 여전히 핵심 경쟁력이지만, 새 부가가치는 칩 아키텍처 설계 능력에서 갈린다. 자동차와 가전 산업도 경쟁 규칙이 변하고 있다. 이 같은 경영 환경 변화로 산업 질서가 재편되는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과 맞닥뜨리자 집단경영 체제 한계를 노출했다는 게 다수 전문가 진단이다.
무엇보다 대주주 지배력 강화를 위한 자본 배치와 집단경영이 환경 대응력을 떨어뜨릴 것이란 우려가 높다.
집단경영 체제 아래서는 개별 사업 수익성이나 성장성보다 계열사 간 유기적 연계와 대주주 지배력 유지가 우선 검토된다. 이 과정에서 성장 잠재력이 높은 사업이라도 다른 계열사와 형평성, 그룹 리스크 관리 등을 이유로 투자 규모와 속도가 제한될 때가 많다. 수익성 낮은 사업이 그룹 평판 리스크 등을 이유로 조기 정리가 지연되기도 한다.
특히, 집단경영 체제 아래 내부 자본 배치가 비효율적으로 이뤄질 때가 많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경제가 고도 성숙기를 지나면서 현금 창출력이 뛰어난 계열사가 수익성 낮은 계열사를 사실상 간접 지원하면서 자원 배분 비효율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SK그룹과 롯데그룹 등이 이런 사례로 입길에 오른다. SK그룹의 경우 전기차 시장 불황 골이 깊어지자 배터리 사업을 ‘상수’로 둔 사업 재편 타당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간다. 공격적인 설비투자가 필요한 신사업 리스크(SK온)를 모기업 SK이노베이션이 고스란히 떠안으면서 차입 확대와 재무 구조 악화, 주주 가치 훼손 논란에 직면했단 평가다. 롯데그룹 역시 화학과 건설 계열사 신용보강 등으로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설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익명을 원한 지주 업종 애널리스트는 “총수 일가 지배력 유지를 위해 유망한 신사업 투자를 미루거나,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방식의 합병·분할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했다”라며 “이는 한국 기업들이 과감한 피벗(Pivot·사업 전환) 시도를 어렵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고 꼬집었다.
(2) 부채성 자본의 두 얼굴
시장에서는 금융 기법 고도화에 따른 ‘부채성 자본’ 확산도 기업 신생률과 소멸률 등 역동성 저하에 일정 수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내다본다. 부채성 자본이 유동성 위기에 몰린 기업의 숨통을 터줬지만, 구조조정이 필요한 산업에 집중돼 중장기 경제 역동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환전환우선주(RCPS)·전환우선주(CPS)·주가수익스와프(PRS) 등은 부채와 자본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어 ‘숨은 부채’라고도 불린다. 이는 회계상 부채가 아니라 자본으로 분류돼 부채비율 악화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수년간 기업 자금 조달 수단으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자본으로 분류될 뿐 잠재적 상환 부담과 일정 수준 부채 성격이 내재돼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PRS 등 부채성 자본 논란에 휩싸인 기업이 속한 업종 대부분이 석유화학·유통·2차전지 등 구조조정 압력이 누적된 산업이라는 점이다. 수요 둔화와 공급 과잉 등이 겹쳐 본업 현금흐름이 크게 둔화된 상황에서 부채성 자본이 경제 역동성 저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계 사업 조기 정리나 시장 퇴출이 지연돼 신규 기업 진입과 산업 재편을 통한 생산성 혁신 경로가 막힌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금융안정보고서에서 “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은 일시적 부실기업의 회복을 지원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만성적 부실기업이 구조조정 없이 장기 존속할 수 있도록 해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부채성 자본을 깔고 앉은 기업은 현금 유출을 의식해 투자와 구조조정을 미루는 선택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부채성 자본은 형식상 자본으로 분류돼 부채비율을 낮추는 효과가 있지만, 상환·전환 조건과 수익 보전 약정이 내재돼 있다. 최근 시장에서 신규 투자보다 차환을 목적으로 한 회사채 발행이 쏟아지는 것도 이런 배경으로 분석된다.
(3) 손발 꽁꽁 묶은 규제 체계
‘포지티브(Positive)’ 방식 규제 체계도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이는 법에 사업 가능한 항목을 열거하고 이외 애매한 영역은 모두 금지하는 형태다. 포지티브 규제는 한국 산업이 정부 주도로 빠르게 성장하며 예측경영이 가능했던 시절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고도 성숙기에 접어든 현 경제 수준에서는 오히려 역동성을 떨어뜨린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콘텐츠, 플랫폼, 소프트웨어 같은 신산업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Learning by doing’을 통해 성장한다. 현재 규제 환경에서는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할 때마다 사전 승인·별도 인·허가를 받아야 한다. 규정에 명시되지 않은 모델은 시도조차 어렵다. 혁신 속도를 크게 떨어뜨리고 위험 감수형 아이디어가 싹트는 것조차 가로막는다. 이는 기업 신생률을 낮추고 산업 재편 속도를 떨어뜨려 종국에는 ‘창조적 파괴’가 활발히 작동하지 않는 환경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네거티브(Negative)’ 규제 전환 목소리에 힘이 실린 이유다. 이는 포지티브 규제와 반대로 안 되는 것만 빼놓고 다 허용하는 형태다. 김천구 연구위원은 “신기술의 시장 출시를 먼저 허용한 후 필요하면 사후에 규제하는 포괄적 네거티브 방식으로 규제 틀을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4) 피터팬 증후군
중소기업 지위에 머물러야 각종 세제·금융·규제 혜택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 역시 경제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일정 규모를 넘어 대기업으로 분류되면 출자총액제한 제도, 일감 몰아주기 규제, 계열사 공시 의무 등 규제 그물에 빠진다.
이 탓에 기업은 성장을 통해 중견·대기업으로 도약하기보다 외형 확대를 의도적으로 억제하는 ‘피터팬 증후군’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한상의는 기업 규모별 차등 규제로 인한 손실이 GDP의 4.8%(약 111조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규제와 조세 제도의 과감한 재설계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47호·설합본호(2026.02.11~02.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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