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에 찾지 못한 800억~900억 일부?
당사자 사망해도 ‘불법 재산 몰수’ 개정 법안
수사 전날, 본회의 통과…환수 법적 근거 마련검찰이 최태원 에스케이(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에서 불거진 ‘노태우 비자금 300억원’과 관련해,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 은닉 혐의에 대해 첫 강제수사에 나섰다. 이에 따라 수사 착수 배경과 실제 환수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해당 비자금이 노 전 대통령 일가에 불법적으로 은닉·승계된 정황이 밝혀지면,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범죄수익은닉 혐의가 적용돼 검찰이 몰수·추징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21일 한겨레 취재 결과,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부장 소정수)는 이날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과 조세포탈 혐의 등과 관련해 그의 부인인 김옥숙 여사가 머무는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집을 압수수색했다. 아들인 노재헌 주중한국대사가 각각 이사장과 상임이사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재단과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에도 자금이 유입된 정황을 포착하고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했다. 아울러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일가에 차명계좌를 제공한 것으로 지목된 당시 비서관들의 집도 압수수색했다.
‘노태우 비자금’ 의혹은 2023년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과정에서 처음 외부로 알려졌다. 노 관장 쪽은 아버지인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선경그룹의 성장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는 취지로 주장하면서, 1991년 선경건설 명의로 발행한 300억원어치 약속어음과 1998∼1999년 김 여사가 작성한 이른바 ‘김옥숙 메모’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해당 메모에는 ‘선경 300억원’ 등 총 904억원 규모의 비자금 내역이 담겼다. 하지만 최 회장 쪽은 비자금 300억원이 전달됐다는 주장을 줄곧 부인해왔다. 검찰 관계자는 최 회장 쪽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의혹이 공개된 뒤 2024년 10월 5·18기념재단은 김 여사와 노 관장, 노 대사를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재단 쪽은 ‘김옥숙 메모’에 등장하는 904억원 외에도 김 여사가 차명으로 보관하다 보험금 형태로 운영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210억원, 노 대사 쪽 공익법인에 출연된 152억원 등을 포함해 노 전 대통령 일가가 1266억원대의 비자금을 은닉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앞서 1995년 12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노 전 대통령이 4500억원∼46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 가운데 약 3690억원의 사용처를 확인했다고 발표하면서, 나머지 800억원∼900억원의 행방은 파악하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발장을 접수한 검찰은 그동안 노 전 대통령 일가의 비자금 은닉 여부를 수사해왔다. 이 가운데 노 대사 쪽 공익법인에 흘러들어 간 약 150억원이 이번 강제수사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파악됐다. 김 여사는 2016년부터 2021년까지 노 대사가 이사장으로 있던 동아시아문화센터(현 동아시아문화재단)에 총 147억원을, 2022년에는 노태우센터에 5억원을 출연했다. 범죄수익은닉죄의 공소시효가 7년인 만큼, 비교적 최근 이뤄진 자금 출연 및 이동 내역이 검찰 수사의 핵심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향후 검찰 수사의 관건은 해당 출연금의 원천을 어디까지 추적할 수 있느냐다.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려면 김 여사가 재단에 출연한 돈이 단순한 개인 재산이 아닌 노 전 대통령의 불법 비자금에서 파생됐다는 점, 그리고 이를 은닉하거나 출처를 가장하려 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결국 검찰은 2016∼2021년 재단에 출연된 150억원을 시작으로 김 여사의 개인 계좌와 과거 차명계좌 등을 역추적해 자금의 뿌리가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연결되는지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만 자금 추적 작업이 1993년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인 199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 실체 규명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최 회장과 노 관장 이혼소송에서 의혹이 제기된 ‘노태우 비자금 300억원’과 관련해선, 노 전 대통령과 최종현 에스케이(SK) 선대 회장이 모두 사망해 수사에 물리적 한계가 따른다. 김 여사 역시 고령이어서 조사의 실효성이 의문이다. 이 때문에 검찰로서는 이번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회계 및 금융 자료, 개인 소장 기록 등을 분석하는 데 수사력을 모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번 수사와 관련해 전날, 당사자가 사망해도 불법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독립몰수제를 규정한 범죄수익은닉규제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비자금 국고 환수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기도 했다. 법안은 공포 후 1년 뒤 시행된다. 특히 법안은 내란 등 헌정질서 파괴 범죄와 이에 근거해 획득한 직무상 지위를 이용한 뇌물·횡령·배임 범죄를 몰수 대상에 적시해 노 전 대통령 일가를 겨냥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압수수색은 독립몰수제 법안 통과와는 전혀 별개로 진행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