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 이름과 전화번호 쌍을 가나다 순으로 누구나 검색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지금이라면 미쳤단 소리를 들을 일인데, 예전에는 이게 되는 게 오히려 상식이었다. 공중전화부스마다 이 책이 하나씩 배치돼 있었다.”
20일 쓰레드에 올라온 게시물이다. 공중전화 부스마다, 때로는 집집 마다도 굴러다니던 두꺼운 책이 있었다. 전화번호부다. 언제부터인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물건이다.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종이 전화번호부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전화번호부, 하면 떠오르는 영화 장면도 있다. 1984년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미래에서 온 ‘살인기계 T-800’은 전화번호부를 펼쳐 ‘사라 코너’를 찾는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집 전화번호와 주소가 공개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추적법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놀랍지만 당시는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이었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 전화번호부는 사람과 가게를 찾는 가장 보편적인 ‘검색엔진’이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한국전화번호부가 내놓은 전국판 CD전화번호부에는 인명 가입자 약 1300만명과 상호 가입자 400만곳의 전화번호가 수록돼 있었다. 종이책을 컴퓨터에서 검색하는 CD로 바꾼 상품까지 등장했다. 당시만 해도 전화번호부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은 하기 어려웠다.
전화번호부는 왜 사라졌을까. 개인정보보호법으로 발행이 금지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는 다르다. 우리나라 개인정보보호법은 2011년 3월 제정돼 그해 9월 시행됐다. 전화번호부를 금지하는 조항은 없다. 오히려 전기통신사업법은 2004년 번호안내서비스를 법정 의무로 만들었다. 가입자의 동의를 받아 전화번호를 음성·책자·인터넷 등으로 안내하도록 한 제도였다.
흥미로운 대목은 휴대전화다. 유선전화 가입자가 줄고 휴대전화가 급속히 확산하자 정부와 국회는 처음에는 휴대전화번호까지 번호안내 체계에 편입하려 했다. 2006년부터 이동전화 번호안내서비스를 의무화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휴대전화번호를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05년 9월 12일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회의록에는 이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김희정 한나라당 의원은 “유선전화의 경우 전화번호부와 114가 이미 운영되고 있지만 휴대전화번호는 성격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휴대전화번호는 대부분 국민이 밝히기를 꺼리는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번호안내를 의무화해도 실효성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유승희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도 개인정보와 위치정보가 결합될 경우 발생할 문제를 들어 법 개정을 제안했다.
논쟁은 현실이 됐다. 2006년 도입된 휴대전화 번호안내 ‘m114’는 이용자가 자신의 번호 공개에 사전 동의해야 검색이 가능했다. 2007년 7월 말 기준 등록자는 5124명뿐이었다. 17개월 동안 9953명이 등록했지만 이 가운데 4829명, 48%가 다시 탈퇴했다. 번호 공개 뒤 광고나 스팸전화가 늘어났다는 불만도 나왔다. 휴대전화 이용자가 수천만명에 이르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전화번호부로 기능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따라서 과거 휴대전화번호도 ‘전화번호부에 실렸다’는 증언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휴대전화번호도 한때 법정 번호안내 대상이 된 것은 맞지만, 유선전화 인명부처럼 가입자 번호가 대규모 종이책에 일괄 수록된 것이 아니라 공개에 동의한 이용자의 번호를 m114 등에서 검색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기술 변화가 제도를 앞질렀다. 2022년 허은아 당시 국민의힘 의원이 낸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의 제안 이유에는 이 변화가 노골적으로 적혀 있다. 번호안내서비스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번호를 찾는 이용자는 “사실상 거의 없고”, 관공서나 은행·병원 번호도 대부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정보의 중요성이 높아진 만큼 휴대전화번호를 번호안내 대상으로 유지할 이유도 없어졌다고 했다.
이 개정안의 취지는 2023년 국회를 통과한 대안에 반영됐다. 전기통신사업법이 개정되면서 휴대전화번호는 번호안내서비스 의무 대상에서 빠졌다. 이동통신 3사와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가 운영하던 m114도 2024년 1월 19일 서비스를 종료했다. 상당히 최근 시점이다.
그렇다고 전화번호 안내 자체가 불법이 된 것은 아니다. 현재 전기통신사업법 제60조도 이동통신 번호를 제외한 전화번호에 대해서는 이용자 동의를 받아 음성·책자·인터넷으로 번호안내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규정한다. 114 번호안내 역시 현재 운영 중이다. 개인 인명 검색보다 상호와 업종, 업체 정보를 찾는 서비스가 중심이다.
전화번호부의 퇴장은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유럽연합은 이미 2002년 전자통신 개인정보보호지침에서 종이·전자 전화번호부에 개인정보를 싣기 전에 가입자에게 그 목적을 알리고, 가입 여부와 공개 정보를 본인이 결정하며 언제든 철회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전화번호부 자체를 금지한 것이 아니라 ‘기본 공개’에서 ‘정보주체의 선택’으로 원칙을 바꾼 것이다.
영국에서는 1880년부터 발행된 BT 전화번호부가 2024년 3월 마지막 인쇄를 끝냈다. 종료 직전까지도 연간 1800만부를 인쇄했지만 BT는 이용 감소와 인쇄·배송에 따른 환경 부담을 이유로 종이책을 폐지했다. 번호부 자체는 PDF와 번호안내 서비스로 남았다.
캐나다도 비슷하다. 통신 규제기관 CRTC는 종이 전화번호부 의무 배포를 단계적으로 없앴다. 2024년과 2025년에는 통신회사들의 잔여 인쇄 전화번호부 제공 의무도 잇따라 폐지했다. CRTC가 든 이유는 간단했다. 전화번호 정보를 이제 디지털 방식으로 훨씬 쉽게 찾을 수 있고 통신의 중심도 유선전화에서 모바일과 브로드밴드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결국 전화번호부를 사라지게 한 범인은 하나가 아니었다. 인터넷 검색과 포털·지도 서비스가 ‘사람이나 가게의 번호를 찾는 기능’을 대신했다. 가정마다 하나씩 있던 유선전화 대신 개인별 휴대전화가 통신의 중심이 됐다. 동시에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개인정보 관념도 바뀌었다. 이용자가 줄자 수백만부를 인쇄해 모든 가정에 나눠주는 사업은 경제성도 잃었다.
순서를 따지면 기술이 먼저 전화번호부의 필요성을 없앴고, 개인정보 보호 강화가 공개할 수 있는 정보를 줄였으며, 법과 규제가 마지막으로 현실을 따라간 셈이다.
그래서 지금 <터미네이터>를 다시 보면 전화번호부를 펼치는 장면 자체가 시대를 보여주는 장치가 됐다. 1984년에는 이름 하나만 알아도 도시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사람의 집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40여년 뒤에는 오히려 그런 책이 거리마다 무료로 배포됐다는 사실부터 설명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