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2026년 들어 반도체가 끌어올린 호황 국면에 들어섰다. 경제성장률은 높아지고 수출과 대기업 이익도 급증했다. 문제는 이 성과가 내수와 고용, 저임금 노동자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느냐다. 지난 20일 ‘한국경제의 성장모델 변화와 최근의 K자 양극화 호황’을 주제로 진행된 제6차 국가미래전략 세미나에선 이에대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발제자로 나선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교수는 “K이코노미라고 하지만 이 호황이 많은 사람이 걱정하듯 K자 양극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꽤 있다”며 “K이코노미가 K자 이코노미가 되지 않도록 어떤 노력을 기울일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성장모델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되짚고 이재명 정부의 AI·반도체 중심 성장전략이 안고 있는 가능성과 위험을 분석했다.
그가 지목한 구조적 변화는 수출과 내수의 연결 고리가 약해진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세계 경제에 편입되면서 한국은 중간재와 자본재 수출을 크게 늘렸다. 수출은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산업이 자본·기술집약적으로 바뀌면서 수출 증가가 고용과 임금, 소비 증가로 이어지는 힘은 약해졌다. 이 교수는 “수출을 통해 고용이 늘어나고 내수가 확장되는 선순환은 상당히 약화됐다”며 “민간소비 비중은 낮아졌고 임금과 가계소득 증가는 상대적으로 정체됐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서는 “절반의 실패 내지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복지지출 확대로 가처분소득 기준 불평등과 노동소득분배율을 개선하는 성과는 있었지만, 투자 부진 때 적극적으로 재정을 확대하지 못하면서 성장 측면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는 훨씬 비판적이었다. 세계 각국이 팬데믹과 미·중 갈등 이후 경제안보와 산업정책을 강화하는 ‘국가의 귀환’으로 움직였지만 한국은 법인세와 소득세 감세, 연구개발 예산 축소 속에 2023년 이후 소득불평등이 다시 확대됐다고 했다.
이재명 정부의 경제정책은 긍정적인 면과 우려를 함께 제시했다. 이 교수는 AI·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산업정책과 적극적인 재정 확대에 대해서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불평등을 개선한다든가 재정구조 면에서 증세를 한다든가 하는 고민은 충분하지 않은 느낌”이라고 했다. 주식시장 성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반도체·피지컬AI·AI데이터센터에 집중된 ‘3대 메가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위험 분산이 필요하다고 봤다. AI 투자가 과잉으로 판명돼 버블이 꺼질 경우 한국 경제가 충격을 직접 받을 수 있고, 대규모 데이터센터 건설은 기후위기 대응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업이 성공해도 이익이 소수 대기업과 그 기업의 정규직 노동자에게 집중되면 오히려 격차가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용으로 연결되는 힘도 약하다. 이 교수는 반도체 산업의 취업유발계수가 제조업 평균보다 크게 낮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K자 경제가 돼서 양극화가 오히려 심화되는 현실이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며 “핵심은 수출 대기업이 벌어들이는 반도체 중심의 막대한 이득을 어떻게 전 사회적으로, 내수부문이나 취약한 노동자들과 공유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해법으로는 시장에서 임금과 소득이 결정되는 단계부터 구조를 바꾸는 방안과 조세·재정을 통한 재분배를 함께 제시했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이고 산별교섭을 활성화하는 한편 납품대금연동제와 공정거래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대기업이 큰 이익을 냈을 때 하청업체와 비정규직에게 성과가 흘러가도록 상생협력기금을 제도화하는 방안도 거론했다.
증세 필요성도 분명히 했다. 이 교수는 “저는 진짜 개인적으로 세금을 올려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일시적인 법인세 증가만 기대할 것이 아니라 고령화로 복지지출이 크게 늘어날 10~20년 뒤를 생각해 근로소득세와 금융·자산 과세, 소비세까지 폭넓게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경훈 동국대 교수는 종합토론에서 내수 확대와 소득분배 개선이 바람직하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이것이 정상적인 경기 상황에서 장기 성장률을 실제로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라고 지적했다. AI 투자에 대해서는 기업들이 지분투자와 공급계약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어 큰 충격이 발생하면 시스템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도 세계적인 AI 투자 흐름에서 한국이 빠지는 것보다는 위험을 감수하고 참여하는 쪽이 낫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계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투자의 ‘양’보다 ‘성격’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세제와 보조금, 산업정책을 통해 노동을 대체하는 투자보다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투자로 방향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AI 등 첨단산업뿐 아니라 보건·교육·관광 등 고용 효과가 큰 서비스업도 산업정책의 대상으로 삼고, 장기 전략을 실행할 국가의 조정 능력과 거버넌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이선화 국회미래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성장을 잘한다고 치고 그러면 이 부가가치를 가지고 우리가 행복하게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세계적인 조세경쟁 속에서 고소득층과 글로벌 기업에 대한 증세만으로 성과를 환수하기는 쉽지 않다며, 국민과 국가가 첨단산업의 투자자 지위로 참여하고 투자수익을 배당받는 새로운 ‘성과 환류 시스템’을 보완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는 2023년 이후 나타난 불평등 확대를 최저임금이나 임금 변화만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고령화와 자산·자본소득 집중, 코로나 시기 이전소득 증가가 사라진 데 따른 기저효과 등을 함께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일본·중국·대만에서 제조업 중심 성장과 부동산, 가계부채, 인구 문제가 어떻게 결합되는지 살펴봐야 동아시아 성장모델의 특수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논의는 지난달 열린 제5차 국가미래전략 세미나와도 이어진다. 당시 세미나는 한국이 AI 기술혁신에는 성공하더라도 그 성과와 충격을 사회적으로 흡수하지 못하면 ‘분열된 성장’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현재 위치를 ‘분열된 성장’과 성장동력이 고갈되는 ‘느린 퇴조’ 사이로 진단했다.
이날 논의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좌장을 맡은 김호기 NRC국가미래전략연구위원회 위원장(연세대 명예교수)의 말에도 담겼다. 김 위원장은 “우리 사회의 매우 중대한 과제는 경제의 지속 가능성과 사회의 지속 가능성, 이 두 개의 과제를 공존시키는 것”이라며 “이를 위해 필요한 매우 중요한 정책적 목표 중 하나는 재정정책과 복지정책의 양립 가능성, 그 균형의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미래전략 세미나는 NRC국가미래전략연구위원회가 주관하는 연속 세미나다. NRC국가미래전략연구위원회는 AI 기술 발전과 산업·사회 구조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해 ‘국가미래비전 2045’를 마련하기 위해 올해 3월 출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