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 돈·튀르키예 방산 기술·파키스탄 핵무기 바탕 ‘메카 협정’ 체결“세 국가 중 어느 한 국가에 대한 무력 공격은 세 국가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이슬람력 1448년 사파르월 24일.”
8월 7일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파키스탄이 공동 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사우디에 세 나라 지도자가 모여 발표했는데 장소는 수도 리야드가 아닌 메카였고, 보도자료에는 날짜를 이슬람력으로 적었다. 안보동맹을 ‘이슬람 연대’라는 상징성으로 감싼 것이다.
이날 메카의 알사파 궁전에 사우디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겸 총리,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셰바즈 샤리프 총리가 만나 협정에 서명하고 공동 발표를 했다. 맨 앞에 인용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식 집단방위 조항이 핵심이다.
조약 전문이 아닌 요약문만 공동성명 형태로 발표했기 때문에 실제 협정 내용은 불명확하다. 나토처럼 회원국 간 구체적인 동맹 의무를 명시했는지, 적용 지역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지휘·협의 체계는 어떻게 될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불필요하게 역내 긴장에 기름을 붓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덩치 큰 세 나라가 모였는데 듣기 좋은 말 잔치로만 볼 수는 없다. 사우디와 파키스탄이 먼저 지난해 9월 ‘전략적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고, 그 직후부터 확대 논의를 시작해 튀르키예를 끌어들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걸프 최대 경제국이자 주요 석유 수출국이고, 이슬람 종주국이며 군사력을 확대 중인 나라다. 나토 회원국 튀르키예는 나토 안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다. 방산 수출 능력이 급성장하고 있고, 근래에는 드론 강국으로 꼽힌다. 파키스탄은 핵무기 보유국이며 실제 전투 경험을 가진 병력이 있다. 즉 사우디의 돈과 튀르키예의 방산 기술과 파키스탄의 군사력이 만나게 된 것이다. 파키스탄은 중동이 아닌 아시아 국가로 분류돼왔는데 6월 미국-이란 간 휴전협정 중재에서 보이듯 근래 중동과 긴밀히 엮이고 있다.
60년 군사 동거와 ‘도하 피격’이 만든 협정
협정의 주축인 사우디와 파키스탄의 군사관계는 오래됐다. 파키스탄 군사훈련단이 1960년대부터 사우디에서 활동했고, 1980년대부터 사우디에서 완전히 철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왕정에 불만을 품은 극단주의자들을 비롯한 안팎의 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는 대가로, 사우디는 수십년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파키스탄의 재정을 지원해왔다. 이미 굳은 관계인데 지난해 나토식 협정을 맺고 올해 들어 더욱 확대한 데에는 계기가 있었다. 지난해에 이스라엘이 카타르 도하를 공격해 하마스 협상단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카타르는 미국의 동맹국이고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인데 이스라엘은 서슴없이 공격했고, 걸프에서 미국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우디가 파키스탄과 양자 협정을 맺은 것은 그 여드레 뒤였다. 올해 들어 미국과 이스라엘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이란의 보복 공격 유탄을 맞으면서 사우디의 위기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튀르키예는 어떻게 세 번째 파트너가 됐을까. 이 관계에서도 핵심은 파키스탄이다. 최근 몇년간 튀르키예가 파키스탄에 무기 수출을 많이 했고, 훈련도 도와주며 군사협력을 강화했다. 사우디는 2018년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왕정을 비판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 뒤 튀르키예와 껄끄러운 사이였다가 단계적으로 관계를 풀었다. 2023년 7월 에르도안의 걸프 순방 때 튀르키예는 자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방산 수출 계약을 사우디와 맺었다.
메카 협정이 군사적 형태를 갖춘다면, 아마도 사우디에 주둔하는 파키스탄 병력에 튀르키예의 방공망, 드론, 훈련 부대가 합류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세 나라 군사 시스템은 제각각이어서 통합 지휘체계를 갖추는 데 최소한 몇년이 걸린다. 현재로선 메카 협정은 군사적 압박수단이라기보다 정치적 신호다. 이란과 이스라엘을 향한 경고이면서 동시에 미국에는 안전보장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뭉치겠다, 다른 보험을 들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중동의 ‘집단안보 체제’가 과연 가능할까? 중동에서는 1950년대부터 여러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게 미국이 부추겨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1955년 만든 바그다드 협정이었다. 이 협정은 뒤에 중앙조약기구(CENTO)로 재편됐으나 유명무실했다. 아랍연맹의 공동방위 조약도 있지만 실제로 운영된 적은 없다. 사우디 등 걸프 6개국 모임인 걸프협력회의(GCC) 집단안보 구상도 실효성이 없었고, 군사력 자체도 취약하다.
하지만 이번엔 관측이 좀 다르다. 느닷없이 3자가 손잡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사우디, 튀르키예와 각기 긴밀한 관계였고 이 두 관계가 하나로 수렴된 것이었다. 튀르키예는 2017년부터 카타르에 군대를 대거 배치, 몇년 전부터 걸프에 상주하는 군사 강국이었다. 중동정치경제연구소(MEPEI) 전문가는 이미 공고해진 관계가 합쳐져 메카 협정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파키스탄 핵우산이 중동을 덮나
이제 파키스탄이 중동의 핵우산이 되는 것일까. 최대 관심사는 이 문제인 듯하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핵보유국인데, 이란은 핵무기를 욕심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메카 협정이 체결됐으니 말이다.
메카 협정은 핵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로이터 등의 질문에 파키스탄은 “핵은 관련 없다”고 한 반면 사우디 측은 “모든 게 포함돼 있다”고 했다. 역내 핵 경쟁을 부추기는 모양새를 피하면서 불확실성을 계속 억지 수단으로 남겨두려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사우디가 파키스탄 핵 개발을 지원해준 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1999년 사우디 국방장관이 파키스탄의 우라늄 농축시설을 방문하자 미국이 항의한 일도 있었다. 메카 협정이 역내 핵 경쟁을 부추길 것인가, 줄여줄 것인가에 대한 관측은 엇갈린다. 핵보유국과 동맹을 맺었으니 사우디, 튀르키예 핵 야심이 당분간 줄어들 것이라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사우디의 자금과 파키스탄의 탄두, 튀르키예의 미사일 기술이 결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확산을 부추길 것이라는 이들도 있다.
다른 나라들이 가세해 중동-북아프리카-남아시아를 아우르는 안보 협정 체제가 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나라는 이집트다. 이집트는 몇달간 메카 협정 협상에 참여해왔는데 막판에 서명에서 빠졌다. 사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사우디에 비해 이집트가 느끼는 위협 수준은 낮을 수밖에 없다. 이란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외교 채널도 유지하고 있다. 이스라엘과는 이미 1980년에 수교했다. 군 출신 압델 파타 엘시시 대통령이 이끄는 이집트 정부는 ‘이슬람 연대’ 같은 종교적 색채도 경계한다. 사우디가 반대했다는 얘기도 있다. 미들이스트아이(Middle East Eye·MEE)는 사우디가 이집트에 재정 지원을 많이 해줬는데 무엇 하나 받은 게 없어 마땅찮아했다고 보도했다. 이집트의 역내 영향력이 줄었고, 군수산업도 별 볼 일 없어 기여할 게 적다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이집트가 동참을 거부한 것은 아니며, 당분간 지켜보려는 입장인 듯하다. 이집트 외에는 튀르키예와 친한 카타르, 파키스탄과 안보 협력을 강화해온 쿠웨이트가 다음번 가입 후보로 거론된다.
이란은 포위, 인도는 경계…엇갈리는 시선
메카 협정을 경계하는 나라도 많다. 이란을 가운데 놓고 서쪽의 사우디, 북쪽의 튀르키예, 동쪽의 파키스탄이 손을 잡아 이란을 포위하는 형국을 만든 것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이란 당국자들과 분석가들은 메카 협정의 의미를 축소하면서 이란을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사우디가 미국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했다. 내부 강경파 논평가는 결국 군사 자문이나 무기 판매, 합동 훈련 정도로 제한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이란의 동쪽 국경을 맞댄 핵보유국이자, 미국과 이란 사이 중재자였던 파키스탄이 이번 협정에 참여한 것을 경계하는 시각도 있다. 튀르키예가 역내 질서에서 이란의 경쟁자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이스라엘 정부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언론은 대체로 평가절하했다. 이란을 제대로 압박 못 하는 미국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지 이스라엘을 겨냥한 게 아니라거나, 그동안의 무의미한 협정과 비슷할 것이라는 해석이 들려온다. 그러나 동맹이 꼭 공동으로 전쟁을 치러야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 강국들이 손을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국가들의 비용-편익 계산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행보에는 인도도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지난해 사우디-파키스탄 협정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인도 정부는 “주시하고 있다”는 공식 반응만 내놨다. 튀르키예는 파키스탄과 계속 가까웠지만, 사우디는 인도와 경제 관계가 많다. 사우디가 파키스탄을 위해 인도와 척을 지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다만 사우디나 튀르키예가 파키스탄에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해주는 걸 경계하는 듯하다. 외교차관을 지낸 인도 전직 관리는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이제 인도도 아랍에미리트, 이스라엘, 그리스, 키프로스, 아프가니스탄 등 전략적 선택지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도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에는 메카 협정 3개국 모두 군사적 협력 국가다. 이란의 위협에 맞서 중동이 스스로 나서면 미국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만들어놓은 역내 질서가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메카 협정을 반길 이유와 경계할 이유를 모두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메카에 모인 세 나라가 실질적인 통합 군사역량을 구축하기까지는 몇년이 걸리겠지만 달라진 중동 분위기를 반영하는 건 분명하다. 미국에 대한 신뢰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역내 국가들은 미국과 계속 협력을 하더라도 안보 의존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메카 협정은 사우디를 필두로 한 중동 국가들이 미국 의존을 줄이고 독자적인 안보체제를 본격 구축하려는 움직임 중 하나다. 한 축에는 아랍에미리트를 중심으로 미국-이스라엘과의 안보 밀착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이슬람권 연대 명분의 새판짜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움직임을 대립하는 국가군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게 중요하다. 그보다는 필요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무력화해 중동 판도를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바꾸려 했는데, 당장의 변화는 오히려 이슬람권 세 나라가 손잡고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보 우산에서 안보의 짐이 돼가는 미국, 의존하면서도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 중동. 지정학적 변화는 어디로 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