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기획]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던진 질문, ‘더럼’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모두가 발레리노가 될 순 없다”… ‘차갑고 텅 빈 땅’에 남은 이들의 이야기런던으로 떠났던 빌리 엘리어트가 더럼 마을로 돌아온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2026년 4월 개막을 앞두고 있다. 2022년 2월 삼연을 마치고 떠난 지 4년 만이다. 이 공연처럼 폐막과 개막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공연이 또 있을까.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원작으로 하는 공연이다. 영화는 많은 사람의 인생 작품으로 유명한데, 대부분 ‘발레에 재능을 지닌 소년이 자신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을 이겨내고 마침내 꿈을 이루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장애물은 아주 복합적이다.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젠더적 편견, 광부들의 파업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 영국 노동자계급 특유의 남성적이고 폐쇄적인 문화, 아이를 돌보지 않는 혹은 돌보는 법을 모르는 가족 같은 것들이다.
이 각각의 주제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이 작품을 ‘소년이 꿈을 이루는 이야기’ 정도로 기억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쉬울 수밖에 없다. 굳이 뮤지컬로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그 아쉬움을 말하고 싶어서인데, 뮤지컬은 상대적으로 장애물에 좀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야 ‘빌리 엘리어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재능 있는 한 소년이 쇠락해가는 마을을 떠날 수 있게 도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떠나지 못하고 그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야기라고.
광부들의 한 줄기 빛이었던 발레리노
뮤지컬과 영화의 이야기 얼개는 거의 동일하다. ‘철의 여인’이라고도 불렸던 신자유주의 전도사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효율성을 이유로 탄광 폐쇄를 강행한 1980년대,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광부노조는 대처의 행보에 맞서 총파업을 벌인다. 빌리가 태어나 자란 곳은 광부들의 도시, 영국 북부 더럼주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광부이거나, 광부의 아내이거나, 광부의 자식이거나, 혹은 광부 가족을 손님으로 둔 곳이다.
빌리도 당연히 광부의 자식이다. 나이 차가 조금 나는 형도 지역 광부노조의 주요 간부로 활약한다. 빌리가 어릴 때 엄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치매 증상이 있는 할머니가 함께 살지만 실질적으로 빌리를 돌보는 것은 아빠와 형, 두 남성이다. ‘돌본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평생 광부로 살아온 두 사람에게 양육과 학대는 같은 행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두 남자는 빌리를 ‘사나이답게’ 키우고 싶어 한다. 남자라면 축구를 해야지, 남자라면 권투를 배워야지, ‘여자애들이나 하는 것’을 하는 남자애는 분명 동성애자일 거야. 그런 편견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 빌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아빠는 파업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빌리를 권투 수업에 보낸다. 권투를 가르치는 사람도 물론 광부다.
억지로 간 권투 체육관에서 빌리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는다. 윌킨슨 선생의 발레 수업이 우연히 같은 공간에서 진행됐던 것이다. 더럼에서 발레는 당연히 ‘여자애들이나 하는 것’이다. 발레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 십수 명은 모두 여자아이다. 빌리는 어쩐지 발레 수업에 시선이 가지만, ‘사나이답도록’ 자란 탓에 주저한다. 윌킨슨 선생은 그런 빌리의 마음을 알아채 발레를 배워보도록 배려하고, 한번 재미를 알게 된 빌리는 빠르게 발레에 빠져든다. 권투 배우라고 받은 돈을 꼬박꼬박 윌킨슨 선생에게 갖다 냈다.
앞서 말했듯 빌리는 발레에 재능이 넘치는 아이였다. 자기보다 먼저 발레를 배웠던 있던 아이들의 실력을 금세 훌쩍 뛰어넘었다. 중산층이자 더럼과 불화하는 윌킨슨 선생은 빌리의 재능에서 어떤 희망을 본다. 패배할 것이 뻔한 파업, 패배한 뒤에는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것이 뻔한 더럼, 빌리가 이곳을 탈출해 발레리노의 꿈을 품고 훨훨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윌킨슨 선생이 자비를 써서라도 빌리에게 런던에서의 오디션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은 그런 이유다.
아빠는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예상대로 빌리가 발레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형 또한 이 사실을 알고 빌리를 압박한다. 빌리의 가족을 만난 윌킨슨 선생은 분노와 절망을 품고 돌아섰다. 하지만 빌리는 분노와 절망의 감정마저 춤으로 전환한다. 그해 크리스마스, 빌리는 아빠의 면전에서 춤추는 것으로 나름의 저항을 한다. 그 모습에 아빠도 결국 마음을 바꾼다. 빌리를 날아오르게 하겠다고, 파업 대오에서 벗어나기까지 한다. 그런 아빠의 마음을 동료 광부들은 비난하지 않았다. 파업 중이라 소득도 없으면서 있는 돈 없는 돈을 끌어모아 빌리의 오디션 비용을 함께 마련해준다.
빌리는 결국 로열발레스쿨 합격 통지서를 받아냈다. 이 소식을 자랑하기 위해 동료 광부들을 찾아간 아빠에게 돌아온 것은 ‘파업이 끝났다’는 동료들의 말이었다. 빌리는 런던으로 떠났고, 아빠와 형은 동료들과 다시 탄광으로 내려갔다. 뮤지컬은 이 지점에서 끝나지만, 영화는 몇 년이 흐른 뒤 아빠와 형이 성인 발레리노가 된 빌리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으로 끝난다.
댄서가 된 빌리, 파업에서 패배한 광부들
여기까지가 영화와 뮤지컬이 공유하는 이야기의 얼개다. 이렇게만 보면 소년이 꿈을 이루는 이야기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목할 여지도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뮤지컬은 끊임없이 남겨진 사람들을 바라본다.
빌리의 합격 소식과 파업 패배 소식이 교차하던 날, 형 토니가 “다 괜찮을 거야”라며 철없는 위로를 전하는 빌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돌아왔을 때 네가 아는 사람들은 다 실업자가 돼 있을 거야. 20만 명(광부 수)이 모두 너처럼 잘난 댄서가 될 수는 없잖아.” 바로 이 대사가 영화와 뮤지컬의 길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윌킨슨 선생에게 합격 소식과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간 빌리는 또 천진난만하게 말한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선생님 보러 올 거예요.” 하지만 윌킨슨 선생은 정색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충고 하나 할게. 이 거지 같은 동네에서 빨리 꺼져버려. 돌아보지 말고, 전부 새롭게 시작해야 해. 여긴 더 이상 너한테 좋을 게 없어.”
광부들이 무력하게 패배할 때, 빌리는 중간계급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올라탄다. 연대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마을에 남겨지고, 재능 있는 한 사람은 ‘거지 같은 동네’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댄서가 될 수 없는 것은 광부들만이 아니다. 빌리만큼의 재능을 갖지 못한 발레 수업의 여자아이들도 댄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특별한 재능을 가진 빌리에게만 허락된 일이고, 사다리에 오를 특별함이 없고 사다리를 만들 경제적 조건도 없는 다른 아이들은 더럼에, 그리고 앞으로 더욱 끔찍해질 수렁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다.
뮤지컬의 마지막 장면은 빌리가 단짝 친구인 마이클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런던으로 떠나는 것이다. 마이클은 작중 성소수자로 묘사된다. 빌리에게 볼 뽀뽀하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빌리가 무대를 벗어나 사라지면 조명은 무대에 외롭게 남은 마이클을 비춘다. 마이클도 더럼을 떠나지 못한다. 성소수자이자 크로스드레서(다른 성별의 것으로 인식되는 복장을 즐겨 입는 사람)인 마이클은 광부 공동체인 더럼에서 건강하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남겨진 마이클의 표정은 어쩐지 막막해 보인다.
일터로 복귀한 광부들이 탄광으로 내려가는 장면도 뮤지컬의 묘사가 더욱 인상적이다. 완전히 암전된 무대에서 광부들의 헤드랜턴 빛줄기만이 관객을 향한다. 광부들은 ‘한때 우리는 왕들이었지’(Once we were kings)라는 제목의 노래를 합창한다. 정의와 평등, 모두의 자유를 꿈꿨던 과거의 영광된 순간들을 회상한다. 그 순간은 끝났지만 자신들은 하나 되어 당당하게 걸어나갈 것이며, “차갑고 텅 빈 이 땅에서 끝까지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조차 멈추면 광부들은 캄캄한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고 그들의 합창만이 무대를 채운다.
모두가 ‘잘난 창업가’가 될 수는 없다
‘빌리 엘리어트’는 산업 전환기의 이야기다. 석탄산업에 황혼이 깃들고 석유와 금융의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이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다. 육체노동자인 광부가 패배할 때 발레리노를 향한 꿈이 승리하는 대비는 상징적이다. 이 전환기에서 저항에 패배한 더럼이 훗날 어떤 모습이 됐는지는 더럼을 배경으로 한 켄 로치 감독의 2024년 영화 ‘나의 올드 오크’를 참고할 수 있다. 황량하고, 삭막하다.
우리도 지금 산업 전환기에 놓여 있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화력발전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길목, 급격하게 발전한 인공지능(AI) 산업이 가져올 변화에 맞춰 전환하는 길목을 지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전환기 대비에 크게 신경 쓰는 것 같다. 2026년 1월30일 ‘국가창업시대 전략회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AI 로봇이 우리 일자리를 대체한다고 하니 얼마나 공포스럽겠냐. 그러면 결국 우리가 어떻게든 대응해야 한다. 결국 방법은 창업이다.” 이 말은 청년실업 문제의 대안으로 이야기된 측면도 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럼 광부들의 심정이 됐다. 무대에 남겨진 마이클의 처지가 된 것 같았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창업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창업할 아이디어도 없고, AI 산업에 맞춘 기술적 역량은 더욱이나 없다. 사람을 고용하는 것도 감당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생각해도 창업은 나의 길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나뿐이겠나. 그나마 나는 30대 중반의 경력직이지만, 이제 막 취업의 길로 들어서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이재명 대통령의 ‘창업 중심 사회 전환론’은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빌리의 형처럼 말하고 싶은 심정이 아닐까. “모두가 잘난 창업가가 될 수는 없잖아.” 더럼을 떠나지 못하는, 더럼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줄 것인가. “차갑고 텅 빈 이 땅에서 끝까지 함께할” 것을 약속할 공동체도 완전히 붕괴된 이 차가운 세상에서.
강남규 ‘토론의 즐거움’ 멤버·‘지금은 없는 시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