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순성③]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까지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막혔던 백악이 스르르 열렸다. 그랬어도 자연스럽진 못했다. 동쪽은 말바위 안내소, 서쪽은 창의문 부근에서 신분증 제시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완전한 개방은 아니었다. 오래 닫혔던 길엔 그런 절차가 잔재처럼 남았었다. 군사 시설로 막힌 기억이 온전히 지워지지 않았었다. 지금은 비로소 다 열렸다.
휘어 굽은 성곽이 숲과 어우러져 절묘한 풍경을 선사한다. 고즈넉하다는 건 이런 풍경과 분위기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게 실감 난다. 숙정문에 오르는 동안 성 돌 사이로 여러 시대의 흔적이 겹쳐 보인다. 태조의 성과 세종의 성, 숙종의 성 돌이 모양과 크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깎인 성 돌 하나에도 각 시대의 기술과 자본, 노동 숙련도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도성을 쌓고, 고치고, 다시 수리한 각 왕의 시대는 안정된 치세에 모든 게 풍성했다고 추정된다. 옛말로 태평성대였을까.
도성 북문이니, 겨울을 상징한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4대 문의 하나로 성문을 두었으나,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왕조시대 내내 문루가 없었다. 따라서 무지개 모양의 문도 늘 닫혀 있었다.
▲ 숙정문 무지개 모양 문은 왕조시대 내내 닫혀 있었다. 1.21(1968) 후인 1976년 성벽 위에 벽돌로 여장을 쌓고, 문루를 앉혔다. 현판은 그때 쓰였다. 사진 오른 쪽으로 쌓은 모양이 다른, 각 시대의 성벽이 보인다. 사진은 2월 초의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