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 부르는 무기 패러다임 시프트(9) 제네바 합의, 9·19 공동성명, 2·13합의, 싱가포르 회담, 판문점 선언, 평양회담 모두 핵고도화 수단 돼
북한의 핵 개발 시도는 지난 70년 넘게 집요하게 이어졌다. 도발→협상→보상→도발 악순환의 기만전술로 점철된 결과 수십 기의 핵무기를 갖게 됐다. 북한이 핵 개발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직후다. 전쟁 중 김일성은 “미국이 언제 핵폭탄을 터뜨릴지 모른다”며 불안해했다(미국 외교문서). 김일성은 핵 기술 기초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1954년 ‘핵무기 방위’ 조직을 만들었다. 1962년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과학자들을 소련에 보내 핵 기술을 전수하도록 했다. 소련으로부터 2MW급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해 1967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북한이 본격 핵 개발에 나서고 기만전술을 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 1980년 영변 5MW 원자로, 1985년에는 50MW 원자로 건설에 착수했다. 1985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해 놓고 핵심인 안전조치를 거부하다가 1992년에야 수용했다. 미신고 지역 사찰도 거부했다. 망명한 황장엽은 “1985년 소련이 핵 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며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고 폭로했다. 1989년 9월 프랑스 상업 위성이 북한 비밀 핵시설을 공개하면서 북핵 문제는 국제 이슈화가 됐다. 이 시기는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 공산권이 무너진 때다. 김일성에게 이런 전철은 통치 기반 붕괴를 의미한다. 소련 와해와 중국 덩샤오핑의 실사구시로 후견국이 사라진 상황에서 김일성은 체제 안전 보장을 위한 길은 핵 보유뿐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전쟁 직후 소련에 과학자 보내 핵 기술 전수
북한이 핵무기 보유 속셈을 공식적으로 드러낸 것은 1990년. 동유럽 공산권 해체와 더불어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하는 등 북한으로선 불리한 외교 안보 지형이 형성됐다. 김영남 외교부장은 소련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 때 “소련이 남조선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 우리는 동맹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일부 무기’는 핵무기를 가리킨다. 이런 와중에 미국은 1991년 9월 한국에 배치된 전술핵무기 철수를 시작했다. 남북한은 12월 31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1992년 핵안전협정에 각각 서명했다. 핵무기 시험·제조·보유·저장·배치·사용 금지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수용했다. 핵사찰은 6차례에 걸쳐 시행됐으나 북한이 제출한 플루토늄 양과 실제 양이 일치하지 않은 데다 추가 핵 의심 지역이 발견됐다. 남북 상호 사찰도 북한의 소극적 태도로 진전되지 않았다. IAEA가 사찰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한은 NPT 탈퇴 성명을 발표했다. 1차 북핵 위기가 터진 것이다. 곡절 끝에 핵 동결 수준에서 대북 지원을 하는 제네바 합의가 탄생했다. 북한은 흑연감속로 포기 대가로 경수로 건설, 중유 제공 등을 얻어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북한은 경수로 건설 지연을 한국과 미국 탓으로 돌렸다. 이는 미국 내 강온파가 맞선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대북 불신에 있다. 제네바 합의 이후 북한 비밀 핵 개발 정황이 포착됐다. 파키스탄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방북해 핵기술 협력을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북한이 우리늄 농축시설을 짓고 있다는 정보도 포착했다. 북한은 1998년엔 대포동 미사일을 태평양으로 날려보냈고 미국과 일본에선 대북 강경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미국은 대북 식량지원과 경수로 지원 중단 검토에 들어갔다. 제네바 합의 진행, 영변 지하시설 의혹 규명, 4자 회담 개최 등 내용의 북미 고위급 회담 합의, 북미 대화를 핵심으로 한 ‘페리 프로세스’, 조명록 북한 특사의 방미 등을 계기로 채택된 ‘공동 코뮈니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이 이어지면서 북핵 해법 실마리를 찾는가 싶었다. 하지만 대북 신뢰는 해소되지 못했다. 미국 강경파들은 북한의 대이라크 무기를 제공 의혹을 제기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북한이 핵농축을 시인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찾아왔다. 이후 어렵사리 6자회담이 시작됐지만 북한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협상을 줄곧 핵무기 관철을 위한 시간벌기용 수단으로 활용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채택됐다. 북한 핵무기와 핵프로그램 포기, 미 불가침 약속, 미·북 관계 정상화, 적절한 시기 경수로 제공 논의, 비핵화 공동선언 준수 등이 합의됐다. 북한의 달러화 위조와 돈세탁 관련 의혹으로 미국은 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금융제제를 가하고 있었으며 북한 계좌 2500만달러가 동결됐다. 북한은 6자회담 중 핵연료 재처리, 핵 개발 완료 선언을 했고, 대포동 2호를 발사했으며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미북·남북 정상회담, 비핵화는 뒤로 밀려
6자회담이 재개돼 2·13 합의가 나왔다. 영변 핵시설 폐쇄, IAEA 요원 복귀, 중유 지원, 영변 주요 핵시설 불능화, 핵프로그램 신고 등이 주요 내용이다. 북한은 냉각탑을 폭파했고,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했다. 그러나 북한은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신고를 거부했다. 영변의 플루토늄 재처리 프로그램만 신고하고 IAEA의 표준 검증 절차인 시료 채취는 불허했다. 6자회담은 수포로 돌아갔다. 북한의 2009년 장거리 미사일 발사, 6자회담 거부, 2차 핵실험,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핵농축 시설 공개 등이 이어졌다. 2013년 3차 핵실험, 2015년 목함지뢰 도발, 2016년 4·5차 핵실험과 위성발사체 발사, 2017년 6차 수소핵폭탄 실험 뒤 핵무력 법제화 및 완성 선언이 뒤따랐다. 2018년 미북 싱가포르 회담이 열렸지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뒤로 밀렸다. 그나마 포괄적인 목표만 담는 데 그치고 핵 신고와 검증 방안 등 구체적인 내용은 빠졌다. 김정은은 비핵화 한마디도 안 했다. 남북한 판문점 선언도 비핵화는 남북관계 개선, 군사 긴장 완화,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뒤에 위치했다. 미북 하노이 회담은 김정은이 영변 이외 강선 우라늄 농축 단지 등 핵심 핵 시설 해체 방안은 내놓지 않으면서 ‘노딜’이 됐다. 남북 평양회담에서 김정은은 처음으로 ‘핵 없는 한반도’를 언급했으나 선언문엔 핵무기와 핵물질 신고와 비핵화 일정은 빠졌다. 조엘 S 위트는 ‘폴아웃’에서 “한국은 영변 문제를 해법으로 제시했으나 미국은 문제 해결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경고했고 한국 측은 합의를 위한 합의만 찾고 있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폴아웃’에는 “북한 최선희와 그의 상관들은 티베트의 날씨나 프랑스의 포도 가격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포장할 사람들”이란 표현도 등장한다. 북한의 핵 보유를 위한 눈속임 지연전술을 비판한 것이다. 북한 핵은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⑩회에 계속) 홍영식 한국핵안보전략포럼 운영위원(전 한국경제 논설위원)